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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flanzen (옮겨심기)>를 준비하는 어린 날







흔히 말해지는 것과 달리 우리의 생은 무언가를 쉽사리 창조하거나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갖추어진 세상에 던져져서, 살아가는 내내 타자의 죽음을 마주한다. 이런 점에서 생은 견뎌내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어린 날의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씨앗이라느니 하는, 학교에서 세뇌하다시피 주입되는 말들과는 너무 다르게 나는 하루하루 나의 무력함만을 마주했다. <벌새>를 보면서 조금 울었던 것은, 그 무력함을 어쩔 줄 몰랐던 어린 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배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른들의 태도들, 그들조차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그들의 태도들을 영화는 독백하듯이 쏟아낸다. 영화에서도 목격되지 않은 우리의 어른처럼, 그것은 우리 어린 날 어른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아직도 나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또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일들이 잦아져서 무덤덤해지는 것인지, 그런 일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덤덤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른이 되면 모두 그렇게 무덤덤해지는가보다, 한다. 나도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무덤덤하게 누군가를 잊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지금보다 고작해야 한두 살 어릴 때만 해도 그런 무덤덤함을 쿨-함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처럼, 그런 쿨-함들이 구질구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아니, 그런 순간이 있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을 지나고 보니 이미 그렇게 되어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쿨-할 때엔 삶(이 단어의 무게가 늘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을 한다)을 타자화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흔히 쓰이는 메타라는 단어를 나이브하게 주워 쓴다면, 그때엔 메타적 시선으로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 가능했다. 아마도 이미 어른들에 의해 정해진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정해진 것 이외의 것들을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부터, 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부쩍 힘들어졌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일이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나는 거의 어른이 다 되었거나, 진작에 어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그런 순간들도 있다. 나의 시선이 갑자기 우주 저 너머로 내던져져서, 갑자기 나를 무한히 먼 저 너머에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삶의 한 중간에서 헤엄치는 우리에게 이런 순간들은 자주 찾아오지 않지만, 화장실에서 무심코 마주한 거울 같은 곳에서 종종 내 시선은 그렇게 내던져진다. 그렇게 무한히 먼 시선으로 나는 흉측한 인간의 피부를 본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형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형태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본다. 나는 그 매끄러움을 뚫고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요철을 가졌는지를 본다. 그렇게 그 시선은 내 피부를 하나하나, 나의 기관과 점액까지 그 하나하나를 후벼 파낸다. <젊은 모색>에서 본 몇 작업들은 그런 경험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들은 아무래도 어른들은 더 이상 가질 수 없거나, 아주 짧은 순간의 향수로만 남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현실의 형상을 갖게 된 그런 기록들은 그래서 쿨-하면서 동시에 구질구질하다. 그것은 구질구질하게, 우리가 헤엄치는 물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런 시도가 쿨-하게 느껴지다가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어떤 순간을 상기시키면 동시에 구질구질해진다. 사람들이 젊음이라는 형용사를 쓸 땐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젊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한쪽으로만 달리는 기찻길 위 하나의 역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타인들이 나와 다른 레일을 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창밖으로 보이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내가 탄 열차는 도무지 다음역이 어딘지, 지금이 어디 즈음인지 알려주지를 않는다. 놀랍지만 도이체반은 서비스가 좋은 편이다. 지금 나에게는 이런 것들이 구질구질하다. 언젠가는 분명 쿨-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어 겨우 안경이 내 눈과 대상의 거리를 만들어주는 기분이다. 글쎄, 되돌아보면 그렇게 쿨-했던 적도 없었다. 모든 순간을 구질구질하게 끌어안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쓰이는 이 글이 살아온 모든 순간에서 가장 쿨-할 수 있겠다.

쿨-함과 구질구질함을 파들거리는 속도로 오가는 지금의 나는 아직 사라지는 타자에 완전히 무덤덤해지지도, 그렇다고 무력함에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고 이대로 있다. 파들거린다는 말도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그냥 그 중간에 이렇게 있다. 나는 그냥 있는데, 한 꺼풀 밖의 그 기준이 계속해서 파들거린다. 그 위태롭게 파들거리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흥미롭다. 내가 기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세상의 시스템은 사실 내가 기댈 수 없고, 내가 움직임으로 내게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것(내가 그것을 지탱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내 세계에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나를 규정하고 나를 보호해준다던 그 시스템에서 나는 늘 애매한 중간에 있다는 것. 빨간색과 파란색만 이름이 있는 세계에서 늘 포도나 나무의 색을 가졌던 나는, 나의 이름을 어떻게 찾아 나설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필자 소개


라현진

우리들의 현재를 모아 미래로 가는 꿈이 있다.

지금은 이 위태로운 구조로<umpflanzen(옮겨심기)>라는 이름의 풍경을 만들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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