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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메디아


* TXTTXTTXT 4호 <et cetera>에 수록 (https://smartstore.naver.com/now_afterbooks/products/4547176800)



사랑에 대해 쓰겠다

이렇게 적어두고 나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아니야 그래 맞아 아직은 아니지 하며 유예의 시간을 늘렸다. 이것은 비단 쓰는 행위에만 국한된 유예가 아니었다. 사랑을 생각하는 것, 펼쳐둔 생각들을 주워 담아 재편하는 것, 편집된 갖가지 정의들을 나름으로 세공하는 것, 혹 한쪽만 너무 매섭지는 않은지, 도리어 뾰족해야 할 곳이 뭉툭하진 않은지 공들여 살펴보고 뜸을 들이는 것, 더 이상 다듬을 것이 없다고 판단이 들 때쯤 그것을 그 상태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교하게 옮겨내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과 다짐이 자칫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켜내는 것, 이 전부.


그러기는 쉽지 않았고, 나는 지껄이기를 관두었다


사랑에 호들갑 떨며 미쳐 날뛰는 시절은 지났잖아? 아 됐어 지겨워. 뭐 이런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이제 의연하게 해내기는커녕 도전할 엄두도 나지 않는 세계의 단어가 된 것만 같았다. 나 따위가 함부로 은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도망 가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말 도망이 맞았다.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혹은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게 된 시점부터 나는 그 행위가 종내에는 무연함에 그칠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제법 쉬웠다. 내가 발견하고 체득한 것 중에 이토록 의심 없이 진실된 전언이 있었나 싶게, 그것을 수렴하는 손끝은 늘 가벼웠고 문장은 길어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랑을 논하는 텍스트로부터 미끄러지듯 빠져나왔고, 약간이라도 그 빌어먹을 것의 냄새를 풍길만한(그것이 악취일지언정) 발전가능성이 있는 다이얼로그라면 지레 겁을 먹고 퇴장하곤 했다. 돌이켜보니 수개월간 주변 지인들조차 내게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애인과의 정체기를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렇게 고인 채로 묻어버리고 다른 둑을 터트려야 하는 것일까 하는 중차대한 결론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거나, 레이더에 잡힌 뉴 원의 혹시 모를 결격사유를 찾아 본격적인 구글링을 해본다든가 하는. 대체로 시시껄렁해서 대화가 끝나고 나면 헛헛하기 그지없지만, 그만큼 가장 많은 소비 시간을 지닌 대화 주제도 없었는데. 타인을 만나 타인의 또 다른 타인인 제3자들을 하나 둘 소환해가며 얼마나 많은 인류 탐구를 해왔던가. 현남친의 전여친, 전여친의 현여친, 현남친의 가장 친한 지인의 애인, 친구 애인의 전남친, 그 전남친의 같은 과 동기의 남친이 옛 회사 동료였는데 걔가 그때 문어발식 관계를 시전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지, 그 후로 사내 교제를 하게 될 경우엔 반드시 인사과에 고지를 하라는 프로토콜이 생겼다더라... etc. 이러한 후일담에 인용된 사람만 나열해도 러시아 소설의 인물 관계 도상쯤은 거뜬히 완성할 수 있다. 것도 꽤 큰 사이즈로다가.

쏠쏠한 낙을 잃었으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젬병이 되어갔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에 반해 관계를 맺기로 했던 것 아니었나? 어째서 너, 그 자체보다 너의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 너를 더 위하고 돕는 일이라 여기게 된 건지. 로맨스라는 가운을 벗기고 일상을 공유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마치 그 가운이 제 몸인 양 각자의 생활 속에 켜켜이 박혀 있었고, 그걸 제외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도리어 부자연스러웠다. 다들 어떻게 해내고 있는 거지. 그들에게는 태연하게 남아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것이, 왜 내게는 귀신보다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감정으로 전환되는 걸까. 이쯤 되니 도망간 쪽은 사랑이 아니라 나였다. 당연하게도 이는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결과이자 내 어떤 시기의 산물이다. 그렇다. 내가 사랑을 나라는 연대기의 시기적 산물이라고 여기면서부터 이 몹쓸 답보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건강한 엔딩의 학습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한 자문이다. 그에 대한 자답으로 내게 벌어진 수많은 장면들을 원인 삼았다. 나라는 건축물이 지금껏 물컹거리던 와중에도 재건 불가의 붕괴 사고 없이 꾸역꾸역 버텨온 까닭에는 강박에 가까운 사후 평가의 공이 컸다. 왜 이런 사달이 났는지, 예방은 못하더라도 원인을 따지려는 노력은 사춘기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각종 서사화된 기억들은 버튼을 누르면 기계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만큼 반복해 사용되어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건 11살 때의 일이었어. 처음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가게 됐는데 그건 좀 무서웠단 말이지. 왜냐하면 우리 집은 불교였거든. 친구들이 주일마다 달란트 마켓에서 구입한 물건을 자랑할 때, 나는 할머니랑 절밥을 먹고 있었거든. 왜 절에서는 스님들이 예쁜 브로치 같은 것도 안 팔아? 짜증을 내면서.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어. 이번 주일에 자길 따라서 한 번만 교회에 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목사님이 전도를 한 애들만 데리고 삼겹살을 먹으러 간다는 거야. 자긴 친구가 나밖에 없다는데 나라도 데려가지 못하면 이번 주도 삼겹살은 물 건너가는 거라고, 그러니 제발 이번 주만 어떻게 좀 하나님의 자녀가 돼줄 생각이 없겠느냐고. 나는 완전한 육식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제안에 혹할 수밖에 없었고 까짓것 가주고 말지, 하는 생각에 교회에 갔어. 역시나 이상했어. 찬송가를 부르던 애가 갑자기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는 목 놓아 통곡을 하질 않나, 한쪽에서는 방언을 터트리질 않나. 그 분위기에 갑작스럽게 동화되기란 쉽지 않잖아. 도대체 예수님 뭐기에 저 꼬마애가 사연 많은 중년처럼 가슴을 치며 울게 만드는 거야 싶고. 삼겹살을 먹으러 가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어. 입 밖으로 꺼내본 적도 없는 악령과 마귀 같은 단어들이 서슴지 않게 등장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우리 가족들은 죄 계도해야 마땅한 무지하고 불쌍한 닝겐들이고. 듣는 내내 거북했지만 친구 때문에라도 다음 주에도 교회에 나오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어. 심지어 새끼손가락까지 걸었으니까. 집에 오는데 자꾸만 불안해졌어. 약속을 어기는 죄를 범치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목사님 얼굴이 약간 사대천왕 닮았었거든. 사실은 사대천왕님이신데 내가 절에 가지 않은 걸 혼내려고 목사님으로 변신한 거 아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어. 이상한 죄의식이었지. 그렇게 집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걸.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안방에 누워있는 거야. 감기라도 걸렸나 싶어서 집안에서 무슨 마스크를 써, 하고 계속 묻는데 엄마가 대꾸도 안 하더라고. 혹시 내가 교회 갔다 와서 화났어? 다신 안 갈게 잘못했어, 하면서 징징거렸는데 엄마가 울기 시작하더라고. 그러더니 자기 얼굴 보고 놀라지 말라고, 그러면서 마스크를 벗는데 엄마 입술이 안면 한쪽으로 완전하게 찌그러져 있는 거야. 스트레스성 안면마비가 온 거였어. 나중에야 그 스트레스가 아빠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나는 그날 그 순간의 충격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 전날 밤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얼굴이 어째서, 내가 교회에 다녀온 그 짤막한 사이에 그렇게 됐냐고 도대체. 이건 분명히 벌을 받는 거다. 예수든 부처든 아님 쌍으로 내게 벌을 내린 거라고 나는 일단 누구한테라도 사정은 설명해야겠다 싶어서 절을 했다가 손을 맞대고 기도를 했다가 별 지랄을 다했어. 그러고도 엄마 얼굴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어. 그렇게 1년을 넘게 엄마 입술은 왼쪽 귀밑에 있었지. 그 일 이후로 나는 종교라면 기가 빨려.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패스. 그런 죄의식과 공포는 웬만하면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거든.


종교, 라는 버튼을 누르면 바로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다. 죄의식, 엄마, 어릴 적 부모로부터 수혈 받은 최악의 이미지, 등등의 키워드에도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변주하여 응용한다. 이렇게 서사화 해놓은 장면들은 차곡차곡 쌓여 현재 나의 성격을 만들어낸 여러 분석적 요인들로 작용한다. 잘게 쪼개놓은 나는 도통 미워할 수가 없다. 파편의 나는 설득에 능하다. 이것이 바로 진정성 가득 담긴 변명을 갑옷처럼 두른 자의 든든한 방어기제다. 그 파편들이 한데 모여서는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악마 짓을 일삼는다는 걸 애써 간과한 채.

맨몸으로 대면하는 사이일수록 ‘파편의 나’는 앞 다투어 빌런이기를 자처했다. 나도 나의 총합이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지 못하면서 상대에게 나를 들이밀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사랑의 하나뿐인 호환 방식이라 여기며. 네가 싫어 죽겠는데도 헤어지지 못하는 건 그때 그 일 이후로 상실에 대한 공포가 생겼기 때문이야. 내가 말해놓고도 어쩌라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이별을 감당하는 세포 같은 게 애당초 없을뿐더러 만일 복제해 주입한다 하더라도 면역거부반응을 보이다가 금세 사라지리라 장담한다. 얼마 전, 담담하게 첫사랑과의 엔딩 장면을 묘사하던 친구를 보면서 내게도 건강한 이별의 선례가 있었다면 모쪼록 로맨스로부터 이렇게까지 피신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해 쓰겠다, 는 문장을 쓰고는 몇 주간 파일을 열어보지 않던 와중에 우연히 듣게 된 일화였다. 산뜻한 이별이 있었기에, 이후 진창 같았던 연애에서도 황급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사랑은 무슨, 된장이나 발라먹고 말지.

좋은 작별의 서사화. 이별은 내게 버튼이 눌리지 않은 키워드. 아직 최초의 자리가 남아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미래는 무궁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다고, 뭐 그렇다고 당장 틴더를 접속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99개 이상 좋아요를 받았다는 사실에 얄팍하게나마 안도하면서.



어둠으로 우리 달려가봐요(1)


산뜻한 엔딩 장면은 없었지만 내게도 각별한 질주들이 존재했다. 이러다가 그냥 콱 죽어버려도 좋고 아니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 같은 감상평이 내내 지속되는 질주. 속력의 후유증은 컸다. 상대의 폭정에도 순순히 끌려 다녔다. 아니 에르노가 읊는 문장들이 내 역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이지 기다리는 일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뜨거운 적요. 아무것도 하지 못함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처럼 열렬한 행위가 있을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손에 땀이 차고 열이 오르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는. 아니 뇌하수체 호르몬에 이상이라도 생긴 게 아니야 하다가 실제로 열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다. 벅참, 이라는 것도 질병이 될 수 있다고 해열제를 맞으며 나는 정의했다. 그야말로 각별한 질주였다. 결코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온몸 타령을 하던 때도 그 시절이었다. 사랑도, 쓰는 것도 온몸으로 해낼 것이라고, 나는 ‘온몸’론을 주창하며 다녔다. 현재의 나를 이루는 무수한 파편 중에는 지나치게 솔직할 것을, 까무러치더라도 일단은 멈추지 않으려던 내가 있었다. 그 파편의 나는 꽤 오랜 시간 내 신체를 점유했고, 기실 파편이 아닌 전부로서 존재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사랑과 소설을 하나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생산 체계에 그것들은 동일한 코드로 입력되는 것이다. 온몸론에 가담한 자에게 파토스는 위대한 동력 기제니까.

그리하여 미적지근한 도망자의 처지인 지금, 점화 온도가 현저하게 낮아진 상태로 뭔가를 쓰고자 하는 건(심지어 사랑에 대해 쓰겠다는 용기!) 무척 난감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다른 걸 쓰자고, 최대한 객관을 유지하며 온몸은커녕 안전거리 너머에 있는 것들로, 나의 반응와 어조 따위 묻히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것들로만 글을(이라고 썼지만, 실은 내 생활을) 구성하고자 했다. 나의 직관보다는 레퍼런스가 건네는 시선을 본뜨기로. 좋거나 싫을 것도 없고 다만 미온한 상태로 강렬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은은하게라니... 이 개같은 태도가 나를 얼마나 망쳤는지!

열감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는 나를 감각하게 하지 않는다. 단어 대신 그 어떤 것을 대입해도 내게 이 명제는 언제나 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사랑과 소설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엔 어쩐지 부끄럽다. 그 부끄러움이 자꾸 은은하게, 와 같은 어울리지 않는 형용으로 나를 옭아맨다. 온전히 나 자신이 주체여야 할 거대한 두 패를 쥐고서 나는 내 육체가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숨기기 바쁘다. 나는 점점 안티-온몸론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건 나의 무궁한 미래를 산산조각 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다시 또, 파편이다.



오르가슴은 파편이 아니에요(2)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을 완성할 수 있다면 집이 불타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가진 적이 있다. 비극적인 상상을 함으로써 운명에 대항할 만큼의 욕망을 지녔는지 스스로 저울질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쓰는 행위를 등가로 해석했다. 어리석은 그의 소설 제목(3)처럼 그것들은 단순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한 통속이었고,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을 만큼 그것들을 욕망했다.

그 말고도 나는 사랑과 소설, 이라는 두 가지 패를 능란하게 드러내는 작가들을 알고 있다. 야마다 에이미와 모니카 마론의 문장들. 야마다 에이미는 사고처럼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리게 된 사랑을, 모니카 마론은 오랜 연인을 유적처럼 애도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써내려갔다. 무수한 작가들이 사랑을 다루었으나, 내게 홧홧한 열감을 끼쳤던 작가는 이 세 여성이다. 1인칭으로 부르짖는 절실한 문장들. 아니 이렇게까지 하려면 사랑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니, 싶은 인물들의 상태. 참혹하고 끔찍하고, 와중에 오글거리기까지 하는 대사들. 유치해서 더는 못 보겠는데, 하다가도, 유치하다고 느껴질 만큼 솔직하게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싶어 다시 반하게 되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책을 반복해 읽었다. 다 아는 얘기고, 사랑에 미쳐서 돌아버리겠다 뭐 이런 건데도, 왜인지 내가 어떤 작심을 해야만 하는 순간에 늘 교본처럼 그들의 책을 펼치게 된다. 나의 작심이라 함은 결국 무언가를 쓰겠다고, 이제는 정말 써야 된다고 느껴질 때 몽글몽글 솟아나는 어떤 의지다. 불안이 반드시 따라붙는 의지. 사랑에 관한 글을 쓸 때만 꺼내보는 레퍼런스는 아니다. 나는 그들이 쓴 문장, 거기에 콕콕 박혀 있는 활자들을 보면서 고유한 아우라를 마주한다. 반듯하게 수놓인 문장들, 그 배면에는 그들이 사랑을 생각하고, 펼쳐둔 생각들을 주워 담아 재편하고, 편집된 갖가지 정의들을 나름으로 세공하여 혹 한쪽만 너무 매섭지는 않은지, 도리어 뾰족해야 할 곳이 뭉툭하진 않은지 공들여 살펴보고 조금 뜸을 들이다가, 더 이상 다듬을 것이 없다고 판단이 들 때쯤 그것을 그 상태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교하게 옮겨내며, 덧붙여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사랑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다짐이 자칫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켜내기 위해 쓰인 엄청난 시간이 담겨 있다.

결국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쓰는 자들을 몰래 살펴보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써야겠다, 고 생각한 자들의 선행. 그것들을 쓰는 내내 완성만 할 수 있다면 집이 불에 타버려도 상관없어! 하며 욕망의 최대치를 끌어올려 빽빽하게 활자를 채웠겠지. 사랑에 빠진 캐릭터가 내뱉는 절실함은 내게 글을 쓰는 자가 가져야 하는 절실함으로 전이된다. 관계의 파멸을 맞은 인물은 내게 글을 쓰는 자가 겪는 자책과 무능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사랑의 전언을 끝없이 남기는 그들의 대사는 내게 져도 좋으니 일단 해내고 보자는 응원으로 읽힌다. 사랑이 기능하는 모든 작용과 행위, 그리고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전부 쓰는 행위로 치환 가능하다.

그 두 가지 패 말고, 나를 맹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맹목을 통해야만 나는 나를 꼼꼼히 응시하게 된다.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나의 눈을 멀게 하고, 곧 죽어도 앞을 향하여 질주하게 된다면, 비로소 나의 생활은 안전해진다. 반대로 그것들이 주춤하거나 부끄러워 숨기 급급하게 된다면, 나는 다시 파편의 나로 돌아갈 것이다. 사건의 결말에서도 도망칠 것이고, 원고는 미완에 그칠 것이다. 나는 이제 맹목의 상태로 다시 질주. 어지럽고 산란하며 붕 뜬 상태로의 회귀. 안전하지 않고 거칠 수도 있는 그 궤도에서,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더 정직하고 진실되게, 무언가를 쓰려고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작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런 만남과 폭력에서 책이 나오는 것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파편의 나를 불러 모아, 흉측하기 그지없는 나의 총합을 응시했을 때, 나의 오르가슴은 시작될 것이다. 나를 누구보다도 미워했던 나와 약간의 말다툼을 하거나 개무시를 하거나 뭐 그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얻게 된 찰나의 순간. 그 고된 체험의 끝에 언젠가는 내가 가진 두 가지 패를 능란하게 직조할 때가 오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유예는 지속된다. 오르가슴의 순간은 늘 기대보다 아주 짧으니까.



1) 김사월의 '연인에게Lover' 가사 중 발췌. <로맨스Romance>(2018) 앨범에 수록

2) <수전 손택의 말: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조너선 콧, 김선형 옮김, 마음산책

3)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2001.



필자 소개


차현지

소설가. 도래할 연애를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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