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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



올가미


길혜연




등장인물

딸 올가(女/30세)

어머니 올가(女/60세)

피터(男 /45)

미란다(女/21)

그 외 인물들- 히피청년들


장소

숲 속 흰 오두막집


무대

오두막 집 안 전경, 왼쪽에 부엌, 가재도구들과 식탁 의자가 있다. 오른쪽에는 침대와 침대 옆으로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 옆, 무대 뒤편에는 뒷문이 있다. 실루엣으로 조명이 켜질 때 그림자가 보인다.

집 밖, 무대 왼쪽 하얀 자작나무 하나 서 있다. 집의 문, 입퇴장구는 무대 오른쪽 대각선이다.



1막


숲 속 흰 오두막 집, 어머니 올가, 식탁 앞에 앉아 담배를 말고 있고 딸 올가, 침대를 정리하고 있다. 침대 아래에서 실뭉치가 담긴 바구니를 꺼내는 딸 올가, 식탁 쪽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기면증에 빠지게 되고 바구니를 떨어뜨린다. 바닥에 흩어지는 실뭉치들.


딸 올가: (선언하듯이) 폭풍이 온다. (사이) 문을 열면 쏟아 내리치고 문을 열지 않으면 조용히 지나가리.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든다) 뭐라구요?

어머니 올가: 폭풍이 온다.

딸 올가: (떨어진 실뭉치들을 주우며) 꿈을 꿨어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머리도 땋고 있었어요. 언제쯤 실현 될까. 내 예지몽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잖아요.

어머니 올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넌 네 꿈을 기억 못하잖아.

딸 올가: (어머니 올가를 흘겨본다)

어머니 올가: 네 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미래를 본다 한들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니.

딸 올가: (식탁에 앉으며) 아, 제발 담배 좀 꺼요.


어머니 올가, 담배를 끄고 딸 올가와 함께 실을 감기 시작한다. 풀어진 실을 잡고 있는 이는 어머니 올가이고, 실을 감는 이는 딸 올가이다.


어머니 올가: 꼼꼼히 감아야 해. 쉽게 풀리지 않도록.


딸 올가, 실 감기에 집중하고 점점, 무아지경으로 격해지는 동작. 그때 문 앞에서 비에 흠뻑 젖은 피터, 가쁜 숨을 내뱉으며 등장한다. 집 외관을 감탄하며 바라보다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다시 가쁘게 숨을 내뱉는다.


피터: (문을 두드리며) 안에 계십니까.


올가 모녀, 문쪽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딸 올가 기쁜 기색으로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가는데 어머니 올가가 팔을 잡는다.


어머니 올가: (고개를 저으며)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딸 올가: 무슨 소리에요?

어머니 올가: 미친놈이거나 살인자이면 어떻게 하니.

딸 올가: 그럴 리 없어요.

어머니 올가: 네 꿈 말이다.

딸 올가: 내가 이곳에서 나가 춤추고 노래하고 축제를 여는 꿈이죠.

어머니 올가: 그건 네 꿈이 아니야.

피터: 길을 잃었습니다. 아무도 안계신가요.


딸 올가, 어머니 올가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열어 준다.


피터: 아, 안에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숲에서 길을 잃어서요.

딸 올가: 어서 들어오세요.


피터, 떨면서 집으로 들어온다. 어머니 올가, 구석 벽에 붙어 피터를 지켜본다.


딸 올가: 다 젖으셨네요. (벽난로 쪽으로 의자를 놓으며) 이쪽으로 와서 불을 좀 쐬세요. 비를 맞으신 건가요?

피터: 정말 감사합니다. 네, 폭풍우 속에서 겨우 빠져 나왔어요.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비는커녕 먹구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 나오더군요. 그 부근에서 계속 걷다보니 이렇게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올가: (불쑥 끼어들며) 태풍의 눈이지.

피터: 예?

딸 올가: 이곳은 지형 상 폭풍우가 닿지 않아요. 태풍의 한 가운데거든요. 폭풍우가 원을 그리며 몸집을 불려 나가기 바쁠 때 정작 그 중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잠깐의 소나기 정도면 몰라도.

피터: 흥미롭네요. (불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떤다)

딸 올가: 아, 죄송해요. 따뜻한 차를 드릴게요.

피터: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제가 큰 실례를 범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어머니 올가: (소리치며) 올가! 가만히 있어라. 넌 아직 차를 끓일 줄 모르잖니. (피터를 보며) 이름이 뭐요.

피터: 피터 닉슨입니다. 신원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죄송합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딸 올가: (주전자를 집어 들며) 피터, 신뢰 가는 이름이네요. 친근하고 좋아요. 피터, 걱정하지 마세요. 폭풍우가 물러 갈 때까지 여기에서 몸을 추스르세요.

피터: 감사합니다.

어머니 올가: (주전자를 뺏으며 속삭이듯이) 폭풍우는 아주 오래 계속 될 거야. 끝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딸 올가: 어머니, 피터는 우리 집에 온 손님이에요. 이 흰 오두막집에 발을 들인 몇 안 되는 귀한 손님 중 한 명이라구요. 편히 계세요. 여긴 제 집이니까요.

어머니 올가: 우리의 집이지.

피터: 집이 아주 예뻐요. 밖에서 조금 살펴봤는데 외벽 마감이 훌륭하더군요. 정교하고, 꼼꼼하게... 놀랐습니다. 이곳에서 계속 사신 건가요?

어머니 올가: 당신의 증조부가 태어나기 전, 그 훨씬 전부터 계속 우린 이곳에 있었지.

피터: 여태 많은 숲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곳은 처음 보았습니다. 사실 제가 어디에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요.

딸 올가: 여기에 온 건 행운이에요 피터.

어머니 올가: (찬장에서 찻잎이 든 통을 가져와) 이걸 넣어라.

딸 올가: (속삭이듯) 그건 안돼요!

어머니 올가: (무시하고 자신이 가져온 찻잎을 넣는다) (피터를 향해) 이제 몸을 다 녹였으면 의자를 가지고 식탁 앞으로 오도록 해요. 원래 의자는 항상 이 자리에 있어야 하니까.

피터: (의자를 식탁 앞으로 가져와 앉으며) 이거 두 분께 큰 실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올가: (중얼거리듯) 잘 아는군!

딸 올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계세요.

피터: 거듭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이름이?

딸 올가: 올가라고 해요.

피터: 부인께서는..?

어머니 올가: 올가라고 부르시오.

피터: 재미있군.

딸 올가: 뭐가요?

피터: 모녀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게..

딸 올가: 당신은 아닌가요?

피터: 우리도 물론 이름을 물려받기는 합니다. 내 이름은 돌아가신 내 외조부의 이름이죠.

어머니 올가: 내 자매들과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와 그 자매들, 또 그의 어머니도 같은 이름이었어. 당연한 거지.

딸 올가: (피터에게 차를 건내며) 난 가끔 날 다른 이름으로 불러요. 제인이나 엘리자베스. 피터, 원한다면 그렇게 날 불러줘요.

어머니 올가: 바보 같은 소리 마라.


피터, 딸 올가가 건내는 차를 받아 마신다. 올가 모녀 숨죽여 피터를 지켜본다.


피터: (놀라) 차 맛이 특이하네요. 이런 차는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어요. 무슨 차죠?

어머니 올가: 몸을 가볍게 하고 꿈 없이 잘 수 있도록 해주는 차지.

딸 올가: 머무는 동안 당신이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흰 오두막집까지 온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피터: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폭풍이 잦아들자마자 떠나야 합니다. 보좌관과 건축업자들이 절 찾고 있을 거예요.

딸 올가: 보좌관이요?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 지 알 수 있을까요?

피터: 저를 소개하는 일에는 언제나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소개를 하니 조금 어색하네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는 이곳의 주지사입니다. 그 전에는 사업가였죠.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셨다면 제가 누군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을텐데, (집안을 둘러보며) 유감스럽게도 이곳에는 아무 소식도 닿을 수 없었던 것 같네요.

딸 올가: 세상에, 이렇게 귀한 분이.

어머니 올가: 주지사가 여기까진 왜 온 거요.

피터: 사업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안목이죠. 어릴 적에 여름이 되면 이런 숲 속에 있었던 별장을 자주 찾았죠. 그래요, 내 조부인 피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몇 날 며칠 별장에 묵으며 사냥을 했어요. 총, 석궁, 사냥개를 이용해 노루와 토끼, 매를 잡곤 했습니다. 토끼와 노루는 함께 먹었고, 매는 박제해 아직까지 내 서재 벽면에 자리하고 있죠. 사냥거리들이 넘쳐나던 때였는데... 숲길에 들어서기 전 도로에 죽은 동물들이 널려 있더군요. 도로에 널린 동물 사체들을 보셨나요? 정말 엄청납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죠. 이곳에 호텔과 리조트를 지으면 어떨까. 사냥터를 만들고 넓은 풀장과 스포츠 센터를 만드는 거예요. 관광객이 몰리겠죠. 동물들은 감이 좋아요.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없앨 걸 미리 알고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도망쳐 나온 거예요.

딸 올가: (깜짝 놀라) 호텔이라구요?

피터: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몇몇 환경 보호자들이니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금방 지나가 묻혀버릴 소동이었죠. 주지사로 출마해 이 지역을 개발하는 것을 공약으로 걸어 덕분에 당선 될 수 있었습니다. 아, 올가. 이곳에 오래 살았다면 지형을 잘 알고 있겠군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딸 올가: 제가요? 도움이 된다면 영광이죠.

어머니 올가: 이곳을 뭉개 없애 버리겠다, 그 소리요?

피터: 개발이라고 해주세요. 뭉개 없앤다는 말은 폭력적으로 들리는 군요.

딸 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어머니 올가: 조용히 해라 올가.


멀리서, 천둥소리 들린다.


피터: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네요. 여기까지 오지는 않겠죠?

딸 올가: 걱정 말아요.

피터: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간다)

딸 올가: (기면에 빠져) 멈춰요.

피터: (멈추고 돌아보며) 네?

딸 올가: (몽롱한 목소리로) 우린 안전해요. 폭풍도 소음도 질서도 닿지 않는 곳이니까요. (정신을 차리고) 뭐라고 하셨죠?

피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 올가: (혀를 찬다)

피터: 그나저나 먹을거리가 좀 있을까요. 숲 속을 헤매 오다 보니 배에서도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하.

딸 올가: 그럼요. 진작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리 와 앉아 계세요. 담요도 더 드릴게요.

피터: 이런 곳에 오니 어릴 적 생각이 계속 나네요. 사냥에서 돌아오면 하녀 나디아가 사냥해 온 토끼와 노루를 손질해 와인과 함께 졸인 음식을 해주곤 했어요. 정말 맛있었는데. 음식 솜씨가 훌륭했거든요, 죽기 바로 전까지도 제 저녁으로 내 올 미트 로프를 준비하다 부엌에서 죽었죠.

딸 올가: 저런..

피터: (입맛을 다시며) 다신 그녀와 같은 요리사이자 하녀를 들일 수 없을 거예요.

딸 올가: 그녀만큼은 아닐 지라도 저도 요리를 할 수 있어요.

어머니 올가: 넌 요리 못해.

딸 올가: 할 수 있어요.

피터: 스토브가 있나요? (웃으며) 밖에 나가 불을 피워야 하는 건 아니겠죠?

어머니 올가: 눈이 삐었나? 여기 있잖수.

피터: 농담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없다고 해서. 전기는 어디에서 오죠? 가스는? 생필품은?

어머니 올가: 다 이곳에 있지.

딸 올가: 가서 토끼 좀 잡아 오세요. 엄마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딸 올가, 어머니 올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머니 올가 고개를 저으며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나간다.


피터: 제 아내도 요리를 못해 냄비를 태우곤 했어요.

딸 올가: (실망한 듯이)아내 분이 계셨군요..

피터: 딸 미란다를 낳다 죽었습니다. 딸애가 클수록 제 엄마를 쏙 빼닮았지요.

딸 올가: 상심이 크셨겠어요.

피터: 참 총명한 여자였는데, 너무 일찍 가버렸어요. (상념에 잠긴 듯)

딸 올가: 음식을 준비 할 동안 차를 좀 더 드시겠어요?


딸 올가, 피터에게 차를 더 따르다 피터의 바지에 차를 흘린다. 어쩐지 실수가 아닌 것 같다.


피터: 이런!

딸 올가: 죄송해요. 이걸 어쩌죠.

피터: 어차피 비에 젖긴 했지만, 이거 참...

딸 올가: 감기에 걸리겠어요. 옷을 벗어서 말려야 할 것 같아요. (피터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정말 단단하시네요. 운동선수 같은 근육이에요.

피터: 하하, 한 때 투포환 선수생활을 했었죠.

딸 올가: 대단해요.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를 때 즈음, 어머니 올가가 묵직해진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황급히 피터에게서 떨어져 바구니를 받아드는 딸 올가.


딸 올가: (어머니 올가를 향해) 새 옷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젖어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르니까요.

피터: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머니 올가: 가지가지 하는군. 흠, 내 남편 옷이 남아 있을 거야.


어머니 올가, 뒷문을 열고 나간다.


피터: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아, 아버지가 저 방에 계신가요?

딸 올가: 내 아버지는 죽었어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죠.

어머니 올가: (옷을 가지고 나오며) 이 옷이면 맞을 거요.


피터, 옷을 받아 든다. 어머니 올가는 흐트러진 물건들을 투덜거리며 제자리에 놓고 치운다.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는 피터.


딸 올가: (황급히 뒤돌며) 어머!

피터: (태연하게) 아, 습관이 되어서. 뒤돌아보지 말아요. (옷을 다 입고는) 내 옷처럼 딱 맞네요. 감은 좀 거칠지만 치수가 딱 맞아요.

딸 올가: (힐끔 거리다 다 입은 것을 확인하고 뒤돌며) 다행이에요. 엄마, 봐요 딱 맞아요.

어머니 올가: (잘 듣지 못하고) 뭐라고?

딸 올가: (소리친다) 딱 맞는다구요. 아버지도 이런 모습이었나요?

어머니 올가: 그 사람은 털이 좀 더 많았어. 사냥꾼이었거든.

딸 올가: 아버지는 오늘처럼 폭풍이 치던 날 밤에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대요.

어머니 올가: (잘못 알아듣고) 거지가 아니라 사냥꾼이었어. 이름은 제임스가 아니라 잭이야.

딸 올가: 한쪽 귀가 먹어서 잘 못 들어요. 아, 정말 아버지 모습이 딱 이랬을 것 같네요.

피터: 원한다면 아버지라 불러도 좋아요.

딸 올가: 그건 이상해요. (웃으며) 차라리 여보 당신이 낫겠어요.

피터: 선생님은 어때요.

딸 올가: 짓궂으시네요. (피터의 젖은 옷을 받아 든다)

피터: 정말로요. 올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여보 당신이라고 해요 그럼.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니까 원하는 대로 내가 맞춰주죠.

딸 올가: 좋아요. 재밌네요. 어머니는?

어머니 올가:(찬장을 정리하다 뒤돌아보며) 뭐라고?

피터: (어머니 올가를 향해) 나디아, 토끼 수프를 준비해!

딸 올가: (킥킥댄다)

어머니 올가: 꿈을 꿨니?

딸 올가: (장난스럽게) 네, 꿈을 꿨어요.

피터: 당신이 수프를 끓이고 우리에게 대접할 거라고 하더군, 나디아.

어머니 올가: 나디아가 누구야.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올가, 올가라고 불러. (화를 내며 식탁 위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어 피운다)

딸 올가: (기침하며) 제발 담배 좀 꺼요.

어머니 올가: 여긴 내 집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던 곳이야.

피터: 올가, 당신이 할 줄 아는 말은 그 말 밖에 없는 것 같군요.

딸 올가: 덕분에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꼼짝 없이 살아 온 거죠.

피터: 당장 문을 열고 나가면 되잖아!

딸 올가: 주위에 폭풍우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는데도요?

피터: 폭풍우가 끝나면?

딸 올가: 이곳을 지켜야죠.

피터: 이해가 안 되네.

어머니 올가: (버럭) 그 애를 현혹시키지 마.

피터: 진정해요 나디아. 아니, 올가.

딸 올가: (부엌으로 가) 저녁을 준비 할게요. 당신이 좋아하는 걸루.


딸 올가, 선반에서 냄비를 꺼내는데 떨어뜨리고, 접시들이 부딪혀 요란스럽다. 어머니 올가, 기겁하며 달려와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딸 올가를 밀친다.


어머니 올가: 그렇게 어지럽히지 마라. 다 질서가 있어. 넌 아직 그걸 모르니 가만히 있어라.

딸 올가: 가만히 있어라! (콧방귀끼며) 지겨워.

피터: 맞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어요. 그런데 그 질서는 어떻게 정해지는 겁니까? (딸 올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올가, 당신의 질서는 어디에 있어요?

어머니 올가: 올가의 질서가 바로 이곳의 질서야.

딸 올가: (어머니 올가를 밀치며) 비켜요. 저이에게 줄 저녁을 준비해야 해요.

어머니 올가: 단단히 홀렸구나.

딸 올가: (속삭이며)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요.


딸 올가, 요리를 한다. 피터,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딸 올가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한다. 어머니 올가, 담배를 다시 피우려는데 피터가 양복 주머니에 넣어 둔 아편을 비롯한 마약을 꺼내 온다.


피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올가. 폭풍우가 멈추면 난 떠날 거예요.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이곳에서 얼마나 더 살 예정이죠? 만일 이... 나무 판떼기로 만들 집에서 벗어나 더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하면 그리로 갈 텐가요?

어머니 올가: 여긴 내 집이야. 내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살았고 지켜온 집이야. 내가 죽고 사라져도 저 애 올가가 여기에서 살아야 하지.

피터: 아, 올가. 여긴 물론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태풍이 조금만 방향을 튼다면 무너져 내릴거예요. 세상은 쉴 새 없이 바뀌거든요. 바람도 땅도 포크레인도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어요.

어머니 올가: 숲을 헤매다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피터: (약을 건내며) 자, 우린 좀 더 많은 얘기가 필요해요. (어머니 올가의 담배를 뺏으며) 그런 것 피지 말고 이걸 좀 피워 봐요. 훨씬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어머니 올가, 피터가 건낸 마약을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피터가 먼저 약을 말아 피우자 어머니 올가도 피터가 건낸 담배를 조심스럽게 피워본다.

어머니 올가가 약에 취하고 딸 올가가 요리를 할 때 집 안 곳곳을 탐색하는 피터. 뒷문을 열어보는데 문틈으로 토끼가 튀어 나온다.


딸 올가: (토끼를 발견하고) 나오면 안 돼, 잭.

피터: 귀여운 토끼네요. 작고, 부드러워요.

딸 올가: 잭, 인사해. 피터 씨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키운 토끼랬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땄죠. 이 애는 내 자식과도 같아요.

피터: 자식이요? (비웃으며) 토끼가 자식이라니. 지금 요리 하고 있는 건 잭의 형제나 자매인건가?

딸 올가: (속상해) 당신이 마음에 들면 했어요.

피터: 이 토끼를요?

딸 올가: (울상을 지으며) 잭도, 내 요리도.

피터: 아 미안해요.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 해주는 모든 것이요. 내게도 자식이 있죠. 딸 미란다, 그 애는 곧 결혼 할 거예요. 유능한 증권가인 신랑이랑. 사돈이 될 분도 월 스트리트의 큰 손이랍니다. 결혼식이 성대 할 거예요.

딸 올가: 저도 결혼식에 갈 수 있나요.

피터: (눈치를 살피다 다시 연기하는 톤으로) 물론이죠, 여보. 당신이 꼭 와야 해요.


부엌에서 끓는 소리가 나고, 토끼를 다시 방 안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닫는 딸 올가.


피터: 문 뒤에는 뭐가 있죠?

딸 올가: (무시하고 수프를 내오며) 결혼식에 꼭 가보고 싶었어요. 자, 드세요.

피터: (수프를 먹는다) 음.. 정말..

딸 올가: 맛있나요?

피터: 당신은 요리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냄비를 태우지 않아 다행이지!

딸 올가: (풀 죽어) 미안해요, 난 요리 체질이 아닌가 봐요.

어머니 올가: (쉰 목소리로) 이제 그만 그를 내보내라.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작아진 것 같으니.

피터: (비아냥) 잘 들리지도 않는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지?

딸 올가: 이 사람은 계속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내 남편이니까요. 아니면 나도 이 사람을 따라 이곳을 떠날 수 있겠죠. 우린 결혼식에 가야 해요.

피터: (뒷문을 가리키며) 올가, 저기엔 뭐가 있죠?

딸 올가: 편하게 말해요. 여보라고 불러요.

피터: (찡그리며) 올가. 저기엔 뭐가 있죠?

딸 올가: (딱딱하게) 알 것 없어요. 알려고 하지 마요.

피터: (안되겠다 싶어) 여보, 여기가 당신이 집이니 곧 내 집이기도 하겠지. 난 이 집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둘 필요가 있어. 여긴 정말 이상해. 너무나도 아늑한데, 어디에서 자꾸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단 말야. 이곳에 호텔을 지으려면 외풍이 들어서는 안 돼. 바람의 방향과 지형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지.

딸 올가: 호텔?

피터: (딸 올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상상해봐. 사람들이 북적일 거야. 날마다 파티를 할 수도 있겠지.

딸 올가: 잘 모르겠어요. 당신과 여행을 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최대한 먼 곳으로,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오페라도 보고 캐나다에 가서 폭포를 볼 수도 있겠죠.

어머니 올가: (몽롱하게) 여행? 넌 여행 못가. 여기에 있어야 해. 우린 여길 지켜야해.

딸 올가: 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어머니 올가: 올가 얘야, 어서 해라. 이제 슬슬 지쳐가는구나.

피터: 뭐를?

딸 올가: 아무 것도 아녜요. 피곤하지 않아요? 침대에서 눈을 좀 붙이는 게 어떠세요?

피터: 아, 난 낯선 곳에선 잠을 잘 못자요. 저 찬장이 침대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게 거슬리기도 하고.

딸 올가: (찬장을 낑낑 대며 침대에서 떨어뜨리며) 이 정도면 어때요?

피터: 좀 더.

딸 올가: (더 옆으로 찬장을 밀며) 됐어요?

피터: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방향도 좀 바꾸면 좋겠네요. 누웠을 때 부엌 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어떻게 생각해요 올가? (어머니 올가를 보며)

어머니 올가: (피터 손에 든 아편을 뺏으려 한다)

피터: (손에 든 아편을 흔들며) 이걸 원해요?

어머니 올가: (피터에 손에서 뺏으려고 버둥거린다)

피터: 좀 더 공손하게 말해야죠, 올가.

어머니 올가: 그걸 내게 주시게.


피터, 어머니 올가를 조련하듯 손을 내밀게 하고 아편을 준다. 어머니 올가, 식탁 앞에 앉아 다시 편안하게 기대어 아편을 피운다. 딸 올가, 낑낑대며 겨우 침대 위치를 바꿨다.


딸 올가: 됐어요. (침대에 앉아) 이제 이리 와요.

피터: 아, 올가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다가가) 어머니의 눈은 가려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딸 올가: 어떻게요?

피터: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니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딸 올가: 그렇게 생각해요?

피터: 난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딸 올가: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줘요.

피터: 폭풍이 지나가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어쩐지 쉽게 지나갈 것 같진 않은데.

딸 올가: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어머니 올가: (취해서) 올가, 다 잡았니? 꼼꼼하게 묶어야 한다!

피터: (어머니 올가를 의자에서 일으킨다)

어머니 올가: (화들짝 놀라) 이거 놔!

피터: 진정해요. 올가, 걱정 말아요.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니까. 내가 결론을 내려주지. 이곳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인 것 같거든. (뒷문을 가리키며) 저기에 뭐가 있지 올가?

어머니 올가: (몽롱하게) 내 남편이..

피터: (달래듯이) 그래그래, 가서 죽은 남편 유령과 춤을 추든지 하는 게 어때.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은 이미 많이 흐릿해. 죽은 것만 같다고.


어머니 올가, 뒷문을 연다. 피터, 문밖으로 어머니 올가를 밀어 버린다. 의자를 가져와 문을 막아둔다.


딸 올가: (두렵고 흥분한 듯 거친 호흡)

피터: 이제야 좀 조용하네.

딸 올가: 이제 이리와요.

피터: (인상을 쓰며) 날 겁주려는 게 아니면 그만 둬. (퍼뜩 깨닫고) 아, 그래. 올가, 앞으로 내가 당신을 좀 더 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게 있어요. 이 집 부동산 등기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혹시라도 도둑이 들 수도 있으니까...

딸 올가: 난 당신이 이리 왔으면 좋겠는데요.

피터: 해야 할 일을 먼저 합시다.

딸 올가: 그런 건 없어요. 그런 종이 쪼가리 없이도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증거이고 표식이에요.

피터: 없다고..?

딸 올가: 그러니까 이제 이리 와요, 피터.

피터: (돌변하며) 아직 밖은 비가 쏟아진다고. (중얼거리며) 세상 물정 모르기는,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알만 하지.

딸 올가: 언제든 비를 멈출 수 있어요. 이리 와서 좀 누워요. 우린 부부잖아요.

피터: 게임은 끝났어. 그 울퉁불퉁한 피부와 구닥다리 옷과 빗자루 같은 머리를 어떻게 좀 하면 고민해 보지.

딸 올가: 그게 무슨 소리에요?

피터: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소리지. 아니지, 이곳을 밀어버리고 호텔을 짓게 되면 떠나야하겠네. 어디로 갈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딸 올가: 아, 기억났어.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피터: (침대에 누우며 딸 올가를 밀친다) 알았으면 가서 장작 좀 더 때봐. 춥고 습하고 아주 기분이 더러워.


딸 올가, 무력한 기색으로 터덜터덜 벽난로로 가 불을 바라본다. 누워서 콧노래를 부르는 피터를 돌아보다, 이내 벽난로 옆에 놓여 있는 피터의 옷을 불 속으로 넣어 버린다.

그때, 등장하는 미란다. 숲을 헤매다 흰 오두막 집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린다.


미란다: 안에 계시나요?

피터: 누구지?

미란다: 아무도 안 계시나요?

피터: 이 목소리는.. 당장 문을 열어. 내 딸이야!


딸 올가, 힘없이 걸어가 문을 열어 준다. 미란다가 들어온다. 비달 사순 짧고 단정한 쇼트 머리에 얌전한 정장을 입고 있다.


미란다: 아,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길을 잃어서요.. (피터를 발견하고) 아버지! 여기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피터: 미란다,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냐? 무사했구나. 난 네가 폭풍에 휩쓸려 다치지 않았나 걱정했단다. 몸 조심해야 한다. 어디 다친 데 없지?

미란다: 모두가 아버지를 찾아요. 톰 보좌관은 아버지를 숲에 홀로 두고 온 것 같다는 죄책감에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구요.

피터: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니.

미란다: 모르겠어요. 폭풍우를 피해서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여기에 오게 되었어요. (딸 올가를 보며) 저 분은 누구죠?

피터: 차와 음식을 내오고 잠자리를 봐주지.

미란다: 이곳의 주인이신가요? (딸 올가에게 다가가며) 아, 실례했습니다. 이렇게나 불쑥...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드리고. 죄송해요.

딸 올가: (경계하며) 아무 것도 만지지 말고 거기에 그대로 있어요.

미란다: 죄송합니다. 저는 미란다라고 해요. 성함이?

딸 올가: 올가.

피터: 접시나 어서 닦아!

딸 올가: (구시렁대며 접시를 닦는다)

미란다: 왜 그렇게 막 대하세요? 저분은 이곳 주인이잖아요.

피터: (무시하고는) 그래, 그래. 프래드는 어떻게 하고 있니. 결혼 준비나 열심히 하면 될 것을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야.

미란다: 프래드는 바빠요. 자기가 원할 때 빼곤 잘 보지도 못해요.

피터: 널 정말 사랑해서 그런 거야. 그렇게 바쁜 데에도 널 보러 시간을 내준다는 게 어디니.

미란다: (못마땅) 글쎄요. (딸 올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실례지만 잠시 앉아도 될까요?

딸 올가: (무심하게) 그러던지요.

미란다: 저 임신했어요.

피터: (감격해 미란다를 안으며) 정말 축하한다 얘야. (돌변해) 프래드의 아이 맞지?

미란다: (신경질) 맞아요.

피터: 그래, 네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이제 완전히 가족을 이루는 거지. 그거야 말로 인간의 큰 기쁨 아니겠니.

딸 올가: 하! 그런 줄 알았지 나도.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그건 토끼들도 다 하는 거야.

피터: 차 좀 내와 올가.

미란다: 아빠! (딸 올가에게 다가가) 미안해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버지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답니다.

딸 올가: (미란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어요. 어지럽히지 말고.


딸 올가, 이번에는 실수 없이 능숙하게 스토브를 다루고 차를 끓여 미란다에게 준다.


미란다: 감사합니다, 올가. 이런 곳이 숲 속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곳에서 계속 사신건가요?

피터: (말 끊고) 미란다야 아이 이름은 뭘로 지을거냐? 내 이름을 따 지으면 좋겠구나. 남자아이라면 말이야.

딸 올가: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자매들부터 살아왔어요.

미란다: 굉장하네요. 혼자 사시는 건가요?

딸 올가: 자식이 있었는데 죽었어요. 사냥꾼 때문에.

미란다: 아.. 죄송합니다. 힘드셨겠어요.

딸 올가: 내가 죽으면 여긴 누가 지키지?

피터: (끼어들며) 분명 남자 아이 일거야. 미란다. 엄마가 되는 기분이 어떠니?

미란다: (질색하며) 그만 좀 해요.

딸 올가: (일어나 몽롱한 말투로) 여긴 누가 지키지? 누가? 일어나 올가, 일어나, 일어나.

미란다: 올가?

피터: (미란다의 어깨를 잡고 마주보며) 넌 훌륭한 엄마이자 퍼스트 레이디가 될 거다 얘야. 내가 대통령이 되면 죽은 네 엄마 대신 내 옆에서 이 아비를 위해 성심성의껏 일해야 한다.

미란다: 대통령이라구요?

피터: 그래, 난 포부가 커.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더 넓은 곳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딸 올가를 향해) 올가, 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장작 좀 가져와 불을 피워. 집 안이 너무 습하잖아. 미란다야, 알겠니? 더 넓은 곳, 높은 곳, 큰 곳. 잊지 마라, 이 집도, 숲도, 나라도 네 것이 될 수 있어. (다시 소리친다) 올가! 빨리 움직이라니까.

미란다: (뿌리치며) 끔찍하네요. 아버지, 당신은 꽉 막혔어요.

피터: 내가? 꽉 막힌 건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여길 지키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 말이야.

미란다: 세상을 좀 봐요, 거리에서 외치는 말이 들리지도 않아요? 사랑, 화합, 자유!

피터: 그 거적대기를 입고 다니는 히피 족속들 말이야? 웃기지도 않네.

미란다: 못 참겠어요. 나가서 말해요, 남의 집에서 부끄럽지도 않나요?

피터: 나가긴 어딜 나가. 내가 원하면 난 여기에서 지낼 수 있어.

딸 올가: (기면에 빠져) 그래, 당신은 여기에서 계속 살게 될 거야. 영원히. 조심해, 사냥꾼이 온다.

피터: (못 듣고) 뭐라고?

미란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예요.

피터: (펄쩍 뛰며) 뭐라고??

미란다: 이런 식으로는 안돼요. 난, 낳고 싶지 않아요. 프래드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피터: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딸 올가: (정신을 차리고 비틀 거린다)

미란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프래드와 만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제가 바본 줄 아세요? 제 뒤에 사람 붙여 가면서 프래드와 의도적으로 만나게 한 걸 모를 줄 아냐구요.

피터: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미란다: 그래요, 아버지 당신에겐 상관없겠죠. 내가 누군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지. (지친 듯 침대 끝자락에 털썩 앉는다)

딸 올가: (미란다 옆에 다가간다) 어떻게 할 거죠?

미란다: 아이를 지울 거예요.

피터: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폭풍을 뚫고 오느라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구나.

미란다: 폭풍은 멈췄어요.

딸 올가: 이제 나갈 수 있겠네요. 미란다, 떨지 말아요.

피터: 내 딸한테서 떨어져, 괴물 같은 것아. 미란다, 일어나라. 결혼을 서두르면 너도 마음이 달라질거다.

미란다: 난 원하지 않아요.

피터: 아이를 지운다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겠다는 소리냐? 여태 잘 해왔잖니, 미란다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딸 올가: (비웃으며) 질서!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재밌네요.

미란다: 이 옷도, 머리도, 신발도 답답해 죽겠어요.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말고 지겨워 죽겠다구요. 한 번도 내가 하는 말은 듣지 않았죠.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뒤에서 외쳐댔는데 기어코 말을 듣지 않고 헤매다 이제 남의 집까지 헤집어 놓은 건 가요?

피터: 네 남편이 될 사람을 사랑하고 이 애비를 존경한다면 그렇게 말 못할 거다.

미란다: (소리치며) 이건 사랑과는 관련 없어요, 존경과는 더더욱 관련 없어요. 이해가 안 되나요? 내 몸이라구요!


천둥소리, 가까이서 크게 들린다.


피터: (듣지 못하고) 뭐라고 하는 거야!


천둥소리, 다시 크게 울려 퍼진다.


피터: 이제 폭풍이 여기까지 온 모양이네. 올가, 내 옷을 줘. 난 가야겠어.

딸 올가: 당신 옷은 장작 대신 태워버렸어요.

피터: 뭐라고?

딸 올가: (웃으며) 춥다고 했잖아요. 불쏘시개로 썼죠.

피터: 멍청하기 짝이 없네. 그래, 어디 도망가지 말고 여기에 가만히 있어. 다시 올 땐 이 집을 부술 포크레인과 함께 오지. 미란다, 이리 나와.

미란다: (단호하게) 싫어요. 길이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피터: 내가 모르는 길은 없다 미란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나오라니까!

딸 올가: 난 길을 알아요.

미란다: 가세요, 아버지.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피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집 안을 난장판을 만든다. 식기구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식탁이 엎어지는데도 딸 올가, 아랑곳하지 않는다. 피터, 집을 나간다. 벽 옆에 세워진 도끼를 들고 자작나무를 내리 찍는데, 나무 꼼짝하지 않는다. 신경질을 내며 집 뒤쪽으로 쿵쾅쿵쾅 걸어간다.

잠시후, 의자로 막아 놓은 뒤쪽 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덫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미란다: 여기까지 폭풍이 왔나 봐요.

딸 올가: 걱정 말아요. 여긴 태풍의 눈이에요. 우린 안전해요. 폭풍도 소음도 질서도 닿지 않는 곳이니까요.


덜컹거리던 뒷문이 잠잠해 진다. 딸 올가, 일어나 먼 곳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다.


미란다: 집이 엉망이 되어서 어떻게 하죠. 미안해요.

딸 올가: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괜찮아요, 내가 원하던 바에요.

미란다: 네?

딸 올가: 길을 안내해 줄까요?

미란다: 그렇다면 감사하죠.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딸 올가: 아뇨, 나도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같이 나가요.

미란다: 아버지가 길을 또 잃는 건 아니겠죠.

딸 올가: 걱정 마요, 그는 제 자리로 돌아갈 거예요.

미란다: (떨고 있는 딸 올가를 보며) 추우세요?

딸 올가: (문가에 서서) 아뇨. (잠시 생각에 잠긴다, 드디어..) 나가죠.


문을 열고 나가는 미란다, 딸 올가 뒤돌아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나간다.

암전.



에필로그

조명이 켜지고,

히피 청년들, 빙 둘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있다. 흰 오두막집이 있었던 터에서. 청년들 옆에는 자작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청년들 사이에 있는 긴 곱슬머리의 미란다.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복장이다.


청년1: (노래)폭풍이 온다. 문을 열면 쏟아 내리치고 문을 열지 않으면 조용히 지나가리.


그때, 토끼 한 마리 수풀 속에서 튀어 나온다.


청년2: 저것 봐.

미란다: (일어나 토끼에게 다가가 들어 올리며) 정말 가볍다. 조금만 힘주면 죽어버릴 것 같아. 잠깐만, 발에 상처가 났네. 가여워라.

청년3: 덫에 걸렸었나.

청년2: 데려가 치료해주자.

미란다: 자연의 것은 자연으로. 여기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도 얘의 운명이지.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어.

청년1: 여기가 집이니까. 여기에 살아야지.

청년2: 토끼야, 이리와 우루루.

청년3: 술이나 더 마시자, 미란다. 그만 놓아주고 와.

미란다: 그래! (토끼를 내려 놓으며) 잘 가, 피터.

청년2: 피터? 피터 레빗?

미란다: (돌아가 앉아 청년1의 기타를 치며 노래) 폭풍이 온다. 뒤를 돌아보면 쏟아져 내리고, 돌지 않으면 조용히 지나가리. 올가, 길을 알려 주세요. 아이야, 숲에서 길을 잃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걸어라.

뒤를 돌아보지 말고 걸어라.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지.

두려움 없이 법 없이. 폭풍의 이름 올가, 어디든 그녀의 집이라네, 무덤이라네.


암전.


작가 노트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들과 저를 옭아매는 질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난스러워져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베라 치틸로바(Vera Chytilova) 감독의 영화 데이지즈(Daisies, 1966)의 동명의 두 여자, 마리와 마리는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규율을 어기며 장난을 치며 세상을 교란하다 결말에는 그들의 장난처럼 파멸합니다. 해방과 구속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고 어쩌면 그 차이는 한 끗에 불과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이 바로 그랬습니다.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어떠한 형식도 없음에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동시에 보지 않음으로써 쓸 수 없는 한계에 구속되었습니다. 영화 올가미(Traps, 1998)는 베라 치틸로바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고, 그 절실함을 담아 글을 구상했습니다. 연극을 하는 연극적 느낌이 들기를 바랐고, 어떻게 하면 인물들이 ‘잘’ 장난스러워질 수 있을지 고심하며 썼습니다. 불안에 떨던 여성이 불안의 근원 자체가 되고 대가없는 복수를 하고, 파멸하는 결말이 아닌 마른 햇빛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는 결말을 맞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결말 이후를 살아가는 희곡 속 여성 인물들은 유쾌하게 살아갈 겁니다. 또 다른 장난을 궁리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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