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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영화! #2] 상영 후



상영 후


김민규



남자는 길을 걷다 벽에 그려진 ‘TURE LOVE’라고 적힌 그래피티를 한참 바라보았다. TURE LOVE? 문득 남자는 ‘TURE’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TRUE를 쓰려다가 실수한 것 같았다. 혹은 진실이라는 단어 속 R과 U의 철자를 뒤바꿈으로써 ‘진실하지 못한 너의(your) 사랑’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문득 지난 산토끼님과의 대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그날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진실일까.



남자와 산토끼님은 지난 서울아트시네마에 위치한 관객 라운지에서 만났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SNS를 통해 서로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사이버 세상 밖에서 면대면으로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 둘이 함께 보고 나온 영화는 미구엘 고메스의 <자신에 적합한 얼굴>이었다.

미겔 고미쉬, 미구엘 고메즈, 미구엘 고메스 등으로 다양하게 적히는 포르투칼의 영화감독인 “Miguel Gomes”는 포르투칼의 영화 비평가로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미구엘 고메스의 영화를 보기 전 남자는 그가 평론가 시절에 쓴 글이 궁금해졌고,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그가 쓴 비평문에 대한 글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가 했던 인터뷰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에 적합한 얼굴>은 포르투칼의 영화감독인 마누엘 모조스와 함께 작업한 고메스의 첫 장편 데뷔작이지만 고메스 감독이 모조스 감독과 처음 작업한 것은 아니었고, 그 이전 단편 작업도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남자는 알게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미구엘 고메스와 마누엘 모조스는 고메스가 영화 평론가로 약 4년간 활동하던 시절에 만나게 되었다. 당시 Publico에서 글을 쓰던 미구엘 고메스는 다른 영화 감독에 대한 인터뷰를 잘 진행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감독에게 직접적으로 별달리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누엘 모조스는 달랐다. 우연히 미구엘 고메스는 모조스 감독의 2000년도 작품인 <번개가 칠 때(Quando Troveja)>을 보게 되었고, 이 작품에 단숨에 매료된 고메스는 모조스 감독과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한다.

마누엘 모조스의 <번개가 칠 때>는 희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안토니오는 자신의 연인 루스에게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받는다. 루스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페드로와 함께 살기로 한 것이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불편한 진실을 갑작스레 마주한 안토니오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강가에 몸을 던진 안토니오가 물에 잠겨 죽기 일보 직전, 근처를 배회하던 요정과 악마, 그리고 천사가 결합한 비현실적 존재인 비올레타와 가스파가 그를 발견하고 구해주게 된다. 비올레타와 가스파의 도움으로 안토니오는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게 되고, 스크린 가득 내려치는 번개와 함께 비올레타와 가스파는 사라진다.

이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미구엘 고메스는 마누엘 모조스와 함께 인연을 맺게 된다. 고메스는 자신의 단편 시절부터 모조스와 함께 작업하게 되었고, 장편 데뷔작의 시나리오를 작업해달라는 제안까지 그에게 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에 적합한 얼굴>의 시나리오가 모조스의 손끝에서 쓰여 세상에 나온다.

모조스의 영화가 현실에서 갑작스럽게 비현실로 이동하던 것처럼, 고메스의 영화 역시 현실에서 비현실로 갑작스레 이동한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 유명한 장 뤽 고다르의 점프가 시간을 건너뛰는 것이라면, <자신에 적합한 얼굴>의 점프는 세계를 건너뛴다. <자신에 적합한 얼굴>에서 어린이집의 교사인 프란치스코는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카우보이 코스튬을 입고 무료하게 학예회를 진행하는 그는 퇴근 후 아내와 함께 즐길 생일파티만을 기다리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터진다. 갑작스레 학생이 다치고, 자신은 공연 도중 코피를 흘리고, 심지어 직장동료와 바람을 피우는 와중에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깨어나 거울을 확인하니 자신의 얼굴에 발진이 발생한 것을 발견한다.

그 순간 영화는 갑작스럽게 2부로 넘어간다. 작은 오두막에는 일곱 남자가 살고 있다. 니콜라, 해리, 그로츠, 꼬피, 트라비소스, 텍사스, 시모엥스라는 이름의 이 일곱 남자는 ‘붉은 방'에 누워있는 프란치스코를 보살피는 것이 주된 일이다. 작은 오두막에는 몇 가지 엄격한 규율이 존재하고, 그 규율을 어긴 자는 무언가로부터 사라지거나 잡아 먹힌다. 예를 들어, 12시를 알리는 종이 열두 번 울리기 전엔 모두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자야만 한다. ‘붉은 방'에는 ‘붉은 것'만이 존재해야 하므로 이 방에 들어가기 위해선 붉은 로브를 걸쳐야 하고, 프란치스코의 식사(붉은 사과와 스프)는 붉은 식기에 담겨야 한다. 몇 가지 룰을 제외한 모든 것은 허락된다. 이 일곱 남자(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를 상징하는)는 술래잡기와 같은 장난을 치며 논다. 총을 가지고 놀다 실수로 다른 형제를 쏴버리지만, 그것은 금기에 벗어난 행동이지 않기 때문에 용서된다. 총에 맞은 그로츠의 이가 부러지고, 이는 마법의 금화로 바뀐다. 마법의 금화가 담긴 보물 상자를 찾아다니는 해적의 이야기가 중간에 갑작스레 끼어들고, 그 이야기는 사실 일곱 난쟁이가 지어내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금기는 어겨지기 마련이고, 난쟁이들은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하고, 미로 같이 얽힌 알 수 없는 이야기와 장면이 이어지다 영화가 끝이 난다.



남자는 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영화를 함께 해석해보고자 하는 기이한 욕심에 사로잡혀 산토끼님을 붙잡게 되었다. 그날 그 둘은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하지만, 남자는 산토끼님이 SNS에 가끔 올리던 그의 셀카를 본 적이 있어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남자는 그 이전에도 몇 번이고 산토끼님을 극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벤 리버스 감독의 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릴 때, 검은 백팩을 앞으로 맨 산토끼님이 헐레벌떡 상영관에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어릴 적 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만화 속에서 회중시계를 든 토끼가 “늦었다!”고 끊임없이 말하며 뛰던 광경을 떠올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는 굴속으로 들어가고, 그 굴이 비현실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검은 가방을 메고 허겁지겁 들어오는 시네필의 동굴은 이곳인가 하는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산토끼님이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동굴은 컴컴한 암흑으로 뒤바뀌며, 곧 전주국제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가 화면에 나타났다. 남자는 산토끼님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어쩐지 이상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극장에 들어설 때마다 괜스레 산토끼님이 여기 어디 있지 않을까를 살피게 되었다. 어떨 때는 산토끼님은 그보다 더 먼저 극장에 와있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남자보다 늦게 입장하기도 했지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산토끼님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ㅡ 산토끼님이시죠?

ㅡ 아, 네… 맞는데요.

남자는 자신을 트친이라고 소개하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자신의 닉네임을 이야기하자 산토끼님은 멀뚱거리며 남자를 쳐다보다 무엇인가 생각난 듯,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남자와 산토끼님은 그렇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는 미구엘 고메스 영화를 처음 보았다. 산토끼님에게 남자는 이 감독이 포르투칼의 Publico에서 영화 평론가로 이력을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산토끼는 미구엘 고메스가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엇다. 남자와 달리, 그는 고메스의 영화가 처음이 아녔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산토끼는 <타부>라는 영화를 보았다. <타부>의 상영이 끝나고 세 명의 비평가가 함께 그의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좌담 행사가 있었다. 그 좌담에서 산토끼는 고메즈가 영화 평론가로 일했던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들으며, 산토끼는 <타부>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특히 F.W. 무르나우의 <일출>이 왜 연상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씨네필인 감독은 티가 난다. 씨네필은 어쩔 수 없네. 산토끼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구엘 고메스와 마누엘 모조스의 관계를 설명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산토끼는 남자에게 <타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ㅡ 그 영화도 이 영화랑 비슷해요. 1부랑 2부가 나뉘어 있어요. 1부는 유성영화로 되어있고 2부는 무성영화로 되어있어요. 다만 이 영화의 후반부처럼 2부가 완전한 비현실인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현실적'이죠. 현실에 기반해서 멋대로 상상한 이야기에 가깝거든요. 1부의 주인공은 필라라는 여성인데요, 그가 사는 건물에 백발의 할머니 아우로라가 죽으면서 “벤투라"라는 남성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남깁니다. 필라는 그 벤투라라는 남자를 무작정 찾습니다. 힘겹게 그를 찾아낸 필라는 그에게 아우로라의 소식을 전하죠. 벤투라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우로라는 포르투칼의 한 식민지에서 거대한 농장을 가진 부르주아 여식이었고, 그녀는 모험가였던 벤투라와 일종의 ‘금지된’ 사랑에 빠지게 되었죠. 허락되지 않은 그들의 사랑은 결국 살인이 얽힌 비극으로 치닫고, 결국 서로를 그리워하며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2부는 그러니까, 벤투라의 이야기를 듣는 필라가 그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타인의 과거 이야기는 결코 ‘나'의 현실이 될 수 없지요. 그래서 영화의 2부엔 사운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떠올릴 때, 상황은 기억나도 그 상황에 말했던 대화들이 모두 기억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그건 당연한 거니까요. 과거의 대사들은 과거에만 머물러있습니다. 필라가 벤투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대화 혹은 사운드가 존재하지 않는 무성영화와 같은 어떤 상황에 대한 이미지들뿐이겠죠. 그 점에서 벤투라의 과거, 그러니까 20세기의 포르투칼의 이야기는 21세기 포르투칼을 사는 필라에겐 현실이 아닌 비현실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벤투라와 아우로라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말이죠.



남자는 산토끼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가지 단상들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 적합한 얼굴>은 난해한 영화를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어떤 욕구를 일부러 이 감독이 자극하고 있다고 느꼈다. 예컨대 네이버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검색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해석'이라는 키워드가 상단에 노출된다. (남자 역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처음 본 날, 네이버에 멀홀랜드 드라이브 해석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인류는 수수께끼에 늘 매료당한다. 한 번에 풀 수 없는 퍼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풀고자 하는 도전 욕구를 자아낸다. 설령 그 퍼즐이 자신의 목을 물어뜯는 스핑크스의 거대한 입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마도 고메스는 영화 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수수께끼를 마주했고, 또 너무 많은 수수께끼에 대한 정답을 찾고자 노력한 일에 지쳐버려, 스스로 스핑크스가 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그러니까, 너무 많은 영화에 질려버렸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에 적합한 얼굴>은 사실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정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요. 하지만 영화엔 정답이 없습니다. 명확한 정답이란 예술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평론을 쓰는 행위는, 어떠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이 욕망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은 사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우주에는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인류로 하여금 우주로 나가게 만든 것이니까요. 영화에 대해 평론을 쓰는 것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정답을 찾고자 쓰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러한 욕망으로 작동하는 것임은 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알쏭달쏭한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것 자체가 어떤 문제를 마주했다는 것이니까요.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사실 지극히 소모적입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해답이 내더라도 문제입니다. 답을 아는 순간 문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흥미롭지 않습니다. 고메스는 이러한 수수께끼의 역설에 대한 영화를 만든 것 같습니다. <자신에 적합한 얼굴>의 2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되거나 연결된 이야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초처럼 보이는 것이 주어지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수수께끼를 가장 명쾌하게 푸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영화의 2부가 모두 1부에서 발진에 걸려 쓰러진 프란체스코가 꾸는 꿈에 불과하다는 설명입니다. 꿈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고, 꿈을 꾸는 동안에는 말이 되고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깨고 나면 연결된 하나의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요. 하지만 이 설명을 마주하면, 어쩐지 맥이 빠져버리죠.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수수께끼가 사라져버린 셈이니까요. 제가 이 영화를 고메스 감독이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며 수수께끼를 풀어왔던 자신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입니다. 푸는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수수께끼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왔던 자신의 삶에 지쳐, 이를 뒤로하고자 수수께끼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른이 되었다는 것은, 20대의 삶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20대의 나와의 완전한 작별을 뜻하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 평론과 완전한 작별을 고하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죠.

남자의 말을 듣던 산토끼는 자신은 반대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수수께끼에 질린 것이 아니라, 매료되었기 때문에 수수께끼 그 자체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수수께끼로 대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붓다는 상대와 토론을 진행할 때 네 가지의 방법으로 대답했다. 질문이 이치에 맞고 도리에 맞는 경우엔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일부는 이치나 도리에 맞지만, 일부는 바르지 못할 때 이를 구별해가며 조건적으로 답변을 하는 방법이 있지만 동시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도 대답법에 포함되어 있다. 미구엘 고메스가 자신이 그동안 보아온 수수께끼에 수수께끼로 대답을 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침묵하는 것 또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마치 <타부>의 2부가 ‘침묵'을 택한 것처럼. 때론 침묵이 가장 적확한 진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다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다르는 “말로 이야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자는 의아했다. 그런 것 치고는 고다르는 너무 말이 많지 않은가? 고메스와 마찬가지로, 영화 평론가로 일을 시작했던 시절 평론에 적힌 말과 코멘트, 이후 영화를 만들며 했던 말과 써내려갔던 대사들, 스크린에 적힌 너무 많은 단어와 대사들은 대체 무엇인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남자는 “말로 이야기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건 고다르의 수수께끼다. 말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재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무엇이다. 영화는 과연 무엇을 재현하는가, 혹은 영화는 과연 무엇을 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수수께끼에 고다르가 답변한 수수께끼일까.

산토끼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영화는 그럼, 말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 이상일 수 있으며, 이상이어야 한다는 어떤 믿음이 낳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고다르의 영화는 영화의 역사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의 역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말하는 ‘역사'는 사실 특정 사건들을 거칠게 말이 되게 엮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영화의 역사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ㅡ 그러니까 그는 영화의 역사는 말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쓰지 않고,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영화는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사(들)> 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스크린에 두 개 이상의 영화들이 함께 놓이는 장면들이 많아요. 예컨대 영화는 히치콕의 영화 장면과 포르노의 장면을 함께 동시에 겹쳐서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히치콕의 영화사를, 그리고 하나는 포르노 영화사를 함께 보여주는 셈이죠. 하지만 글로 표현될 때에는 그것은 결코 동시에 포개질 수 없습니다. 하나는 히치콕에 대한 책이 될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포르노 영화사에 대한 책이 될 것이죠. 그것은 구분된 두 개의 책이 됩니다. 두 개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가능한 일이 되는 거죠. 영화 속에서 두 역사는 포개질 수 있습니다. 영화엔 물성이 없기 때문이죠. 저는 영화가 그 점에서 흥미로운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에게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착각과 환영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말이 달릴 때 그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본적으로 말의 정지된 사진의 연속에 불과하다. 말은 멈춰 있다. 너무나 빠르게 사진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영화 속 모든 장면은 모두 환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비전들은 사실로서의 비전이 아니다.

정지된 이미지들을 지속시키는 것은 테크놀로지와 시간이다. 이 중 테크놀로지가 영화감독이 통제할 수 없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영역이라면, 감독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일 것이다. 영화에는 물성이 없지만, 시간만이 존재한다. “말이 움직이는 모습은 사실”이라는 거짓을 진실처럼 이야기하는 스펙타클의 영화들에 반기를 드는 것. 아방가르드, 언더그라운드 등으로 불리는 실험 영화의 정신은, 그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시간의 경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ㅡ 내러티브와 드라마, 그리고 시각 요소에 집중하는 영화는 사실 고전적인 연극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영웅의 연대기와 비극적 이야기들. 그러나 영화는 연극과 다릅니다. 연극 위의 인물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영화 속 인물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정지된 사진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영화만의 문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마야 데렌의 영화에서부터 상탈 애커만의 영화까지 새로운 영화 문법을 시도한 많은 작가가 주목한 것은 영화 속 이미지가 아닌 시간과 듀레이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전 시네아티스들의 시도는 많은 대중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로만 받아들여졌습니다. 흑인 남성을 트럭 뒤에 묶어 끌고 다닌 사건을 담기 위해, 실제로 피해자가 끌려다녔던 길을 몇 십 분 동안 촬영해 보여주는 장면은 섬뜩하기 그지없지만 그 맥락에 관심 없는 관객에게는 그것은 그저 지루한 장면일 뿐입니다. 혹은 <잔느 딜망>에서 한없이 20여 분 동안 감자만 깎는 장면만 봐도요.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지루한 시간-이미지의 지속에 열광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노르웨이의 공영방송 NRK에서는 기차 앞머리에 카메라를 고정한 채 어떠한 편집도 거치지 않고,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 약 520km를 달리는 모습을 7시간 동안 내보낸 방송이 시청률 20%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방송 외에도 해당 방송국에서는 8시간 동안 뜨개질을 하거나, 12시간 동안 장작을 태우고, 18시간 동안 연어의 산란여행을 추적하고 피오르 해안을 6일 동안 항해하는 모습을 ‘방영'했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서 두 시간동안 고정된 카메라를 두고 맛을 설명하고 먹기만 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먹방과 같은 컨텐츠가 인기를 끄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인 것 같습니다.



남자의 말에 산토끼는 영화를 보는 행위란 이미지의 감옥에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르웨이의 방송이 성공했던 이유는 그 방송을 켜고 끌 수 있는 리모컨이라는 존재가 관객에게 들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는 방송을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영화관의 관객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특정한 규율이 존재하는 감옥에 들어서는 것이다. 상탈 애커만의 경우엔 그 이미지의 감옥에 갇힌 시간에 주목했지만 어떤 시네아티스트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이미지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ㅡ 영화가 이미지의 감옥이라면, 이 점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아마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라는 영화일 것입니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는 그 영화를 통해 말 그대로 이미지의 감옥을 구현하려 했습니다. 영화의 내러티브마저도 착각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죠.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해변가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마르셀은 오데트를 신부로 맞이합니다. 마르셀은 부를 가진 부르주아지만 젊음과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죠. 반면 오데트는 젊고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마르셀과 오데트의 결혼식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지녔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으레 오래된 외국 영화의 결혼식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죠. 결혼식은 꼭 성당이나 교회에서 올려야 합니다. 신부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고, 다소 엄숙한 분위기에서 목사는 그들에게 서로를 부부로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것에 대한 확인을 위해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을 신랑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와 같은 말을요. 그 질문은 먼저 신랑에게 던져지고, 그 이후에 신부에게 건네지죠. 신부는 신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종소리나 하객들의 박수 소리, 환호성이 들리고 때에 따라선 흰 비둘기가 날아가는 인서트 장면이 존재하거나 합니다. <지옥>의 오프닝 결혼식 장면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당, 흰 웨딩드레스, 목사가 질문을 하고, 신부가 신랑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기이합니다. 목사와 두 주인공의 대사 외에는 무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과 하객들의 리액션을 볼 수 있는 인서트 숏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하객들은 이 둘의 결혼식을 숨죽여 지켜봅니다. 마치 영화를 조용히 관람하고 있는 관객처럼 말이죠. 목사가 신랑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신부에게 질문합니다. 신부가 고개를 돌려 신랑을 쳐다보는 순간 신부의 표정이 스크린 가득 찹니다. 곧이어 그러한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 그러니까 마르셀의 얼굴이 스크린에 가득 찹니다. 마르셀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에 가득합니다. 마치 오데트가 ‘네'라고 말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죠. 마르셀의 얼굴에서 화면은 다시 오데트의 얼굴로 바뀌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숏은 길이감이 무척 깁니다. 오데트가 ‘네’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 침묵을 찢는 높은 피치의 바이올린 소리로 시작하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올라갑니다. 음악은, 여기까지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느낌의 음악이신지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 <죠스>나 <싸이코>에 나올법한 음악, 아시겠죠?

남자는 산토끼의 이야기를 들으며 히치콕과 긴 시간 동안 작업했던 버나드 허먼의 인터뷰가 문득 떠올랐다. 무성영화 시절에 영화를 시작한 히치콕은 빡빡한 예산과 불가능에 가까운 스케줄 사이에서 가까스로 자신의 첫 영화를 완성한다. 올리버 샌디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쾌락의 정원>을 찍기 위해 히치콕은 해외 로케이션 촬영 과정 중 예산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밀반입하는 일을 강행하고, 카메라는 무사히 통과되지만, 세관에 신고되지 않은 필름은 결국 압수당한다. 그는 영화를 찍을 필름을 사기 위해 지출을 해야만 했고, 설상가상으로 계산 이후 지갑을 도둑맞아 결국 모든 예산을 잃는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짐을 올리다 유리창을 깨게 되어, 이를 변상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쾌락의 정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곳곳에 돋보인다. 첫 작품에 대한 호평과 함께 그는 그렇게 영화감독으로 입문하여 추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쏟아내게 된다.

버나드 허먼 역시 히치콕과 마찬가지로 그 시작부터 화려한 이력으로 영화 음악가로서의 이력을 써내려간다. 뉴욕대와 줄리아드를 졸업한 버나드 허먼은 이미 그 눈부신 재능을 인정받아 22살이라는 젊은 나이부터 오케스트라를 직접 꾸려 지휘로 활동하였다. 이후 CBS 방송국의 눈에 띈 그는 그곳에서 라디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음악을 담당하게 되며, 오손 웰즈를 만나게 된다. 전설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여전히 회자되는 웰즈의 <우주 전쟁>을 통해 그와 협업하게 된 버나드 허먼은 이후, 영화사에서도 여전히 회자하는 웰즈의 <시민케인>을 통해 영화 음악가로 데뷔한다. 히치콕이 그 눈부신 재능을 지니고도 데뷔하기까지 굉장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면, 허먼의 커리어는 그 시작부터 순조로웠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허먼과 히치콕은 <해리의 소동>을 통해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해리의 소동>의 스코어를 맡았던 이는 본래 린 머레이였는데, 그는 또 다른 히치콕의 영화인 <나는 결백하다>의 스코어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해리의 소동>까지 작업할 여유가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히치콕에게 허먼을 소개한다. 진지하고 웅장한 음악을 주로 작업했던 허먼에게 히치콕의 가장 밝은 영화 중 한 편이라고 으레 표현되는 <해리의 소동>의 코믹한 분위기에 맞춰 작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서스펜스와 기이한 유머가 공존하는 히치콕의 세계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섬뜩한 음들로 완벽히 표현한다. 이후에도 허먼과 히치콕은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오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현기증>, <사이코>와 <새>까지 작업을 함께 한다.

특히 <사이코> 하면 떠오르는 찢어질 듯한 바이올린 소리의 음악은 온전히 허먼의 아이디어였다. 정작 히치콕은 그 유명한 샤워실 살인 장면이 완전한 무음이길 바랬다. 하지만 허먼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성의 비명에서 착안하여 마치 화면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높은 피치의 바이올린 소리를 삽입하였다. 히치콕은 허먼의 음악이 삽입된 최종본을 보게 되고, 그의 안목을 인정하며 해당 음악을 삽입한다.

하지만 이후 <찢겨진 커튼>을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허먼과 히치콕은 충돌하게 된다. 완벽주의자에 예술가로서의 깐깐한 고집이 있었던 허먼과 작가로서의 자아를 표출하기보다는 대중을 엔터테인하는 매체로서의 영화를 보다 중요시했던 히치콕의 성향이 부딪힌 것이다. <찢겨진 커튼>을 작업할 무렵의 헐리우드에게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돈벌이 수단에 가까웠고, 흥행을 위해 영화사는 돈이 많이 드는 오케스트라보다는 팝적인 음악을 영화에 삽입하기를 바랐고, 이에 동의한 히치콕 역시 허먼에게 팝적인 곡을 작곡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허먼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둘은 결국 서로를 다시 보지 않게 된다.

비평가였던 로얄 S. 브라운이 1975년 8월에 진행했던 허먼과의 인터뷰에는 그 당시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실려있다. 당시 허먼은 런던에서 거주하며 음악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튜디오가 팝적인 음악을 원했기 때문에 그와 작업을 하지 않게 된 것인지 묻는 말에 허먼은 팝적인 것을 원했던 것은 스튜디오가 아닌 히치콕이었다고 대답한다. 팝적인 음악을 부탁받은 허먼은 히치콕에게 “나에겐 커리어라는 게 있고, 이후에도 있을 것이네"라는 말로 거절한다. 히치콕은 그에게 “배가 고파지면 다시 나를 찾아오게나"라는 말로 응수했고, 허먼은 “나는 배가 고파지면 챈슨즈 레스토랑을 찾아가네"라고 대답한다. 허먼은 그가 부와 유명세를 얻게 되면서 감독으로서의 자아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이 둘은 그 이후로 영원히 함께 일하지 않았다. 허먼은 그 인터뷰에서 그가 지옥으로 떨어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지옥.



ㅡ ‘지옥’이라고 적힌 타이틀과 함께 몇 가지 오프닝의 섬뜩한 음악이 지나고 나면 암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면이 나옵니다. 결혼식을 마친 오데트와 마르셀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버스에서 내립니다. 오데트는 웨딩드레스에 달린 레이스 부분의 일부를 떼어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마르셀은 그런 오데트를 들어 안아 사진관으로 향해 바로 결혼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마르셀은 오데트에게 여전히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계획되어 있던 호텔의 리노베이션 사업을 미루고, 당장이라도 함께 떠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런 마르셀에게 오데트는 당신이 운영하는 호텔은 어차피 바다 근처에 있으니, 다른 곳에 가도 호텔의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고 힘들기만 할 뿐이라며 신혼 여행을 가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마르셀은 석연찮지만, 오데트의 말에 수긍하고 호텔 리노베이션 사업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어머니의 유산으로 진행되는 호텔 리노베이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데트가 어느 순간부터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하기 전까진 말이죠. 마르셀이 오데트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작은 계기들에서 시작됩니다. 마르셀의 눈에 젊고 아름다운 오데트는 어딜 가든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데트는 그런 관심을 굳이 쳐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모습을 보며 마르셀은 오데트가 그런 관심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리노베이션 때문에 호텔에 머물며 작업하는 기계공 마티노는 지나치게 오데트와 친밀한 사이로 발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즐겨야 하는 신혼 생활에 어쩔 수 없이 마르셀 때문에 호텔에 발이 묶인 오데트를 배려하고자 마티노는 쉬는 시간이면 마르셀을 대신해 그녀를 이곳저곳 에스코트합니다. 그런 모습에 마르셀은 오데트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마르셀의 의심은 호텔 리노베이션 사업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증폭하게 됩니다. 예정되었던 일정에서 벗어나면서 돈이 더 필요해진 마르셀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됩니다. 리노베이션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투숙객을, 그것도 이전에 받은 투숙객보다 더 많은 투숙객을 받을 것을 예상하면 빚은 약 6개월 안에 금방 갚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지만 마르셀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 불안감은 오데트를 향합니다. 마르셀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상상합니다. 예컨대 마티노와 오데트가 호텔 근처의 호수에서 격정적인 정사를 나누는 일을 상상합니다. 흑백으로 찍힌 이 영화 속에서 마르셀의 상상은 모두 컬러로 표현됩니다. 다만 이 ‘컬러 장면'들 속 색감은 모두 어딘가 이상합니다. 푸른색이어야 할 호수의 물은 붉은 색으로 보이고, 남자들을 유혹하는 오데트의 모습은 과거 40~50년대의 아방가르드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실험적인 특수효과가 난무합니다. 예측이지만, 클루조는 아마 ‘누벨바그'로 대표되는 그 당시의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을 의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클루조의 영화에는 즉흥이 만들어내는 자유의 마법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클루조는 모든 것이 자신의 컨트롤 아래에 놓여야 직성이 풀리는 감독이었고, 이는 당시 프랑스 영화 업계에서는 유명했습니다. 클루조와 영화를 찍는 것은, 그의 ‘성격'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죠. 예컨대 1960년 작품인 <진실>을 촬영할 당시에 브리짓 바르도가 잠에 드는 장면을 찍기 위해 클루조는 그녀에게 진통제라고 속이며 수면제를 주는 바람에, 브리짓 바르도가 수면제를 과도복용하여 위세척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배우들에게 손찌검하는 것은 물론이고, 몇 시간이고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배우와 스태프를 괴롭히는 일이 클루조의 촬영 현장에서는 빈번했던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죠. 촬영장의 독재자.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감독. 하지만 젊은 프랑스의 영화감독들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고다르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길다는 지적에, 크게 불필요한 장면을 뚝뚝 잘라내 버리기도 했고, <네 멋대로 해라>의 대부분의 장면은 사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쓰여졌다고 하죠. ‘즉흥'. 그것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클루조는 그들의 비판에 자신의 즉흥은 종이 위에서 펼쳐진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누벨바그의 ‘즉흥적인 문법'은 세계에 충격을 주고, 그들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클루조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방법이 더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요.

산토끼는 말을 이어나갔다.

ㅡ <지옥>에서 등장하는 컬러 장면들은 압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흑백 영화에 컬러 장면이 중간중간 들어가는 영화는 드물지만, 유일한 케이스는 아닙니다. 대표적으로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문을 열고 동화의 세계로 나가는 순간 영화가 풀컬러로 전환되죠. <지옥>과 가장 흡사한 영화를 골라보자면 사무엘 풀러의 <충격의 복도>가 있습니다. 풀러의 <충격의 복도>의 후반부에서 컬러로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주인공의 환상, 혹은 잊힌,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점은, <오즈의 마법사>도, <충격의 복도>도, <지옥>도. 모두 ‘컬러'가 오히려 진실과 먼 판타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흑백인 세상과 색이 가득한 세상 중 어떤 것이 진짜 우리가 보는 현실과 가깝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흑백인 쪽이 진실과 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말이죠. 왜일까요? 앞선 두 영화가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들이 많지만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경우에 국한해서만 보다 말해보죠. 이 영화 속 마르셀의 환상 장면들은, 비록 그 색감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현실성을 획득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장면들이 컬러로 찍혔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당시 헐리우드의 영화들은 모두 컬러로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스펙타클한 눈요기거리기도 했지만, 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헐리우드의 영화들은 그와 동시에 현실과 동떨어져있습니다. 마치 마르셀의 환상 장면들처럼요. 헐리우드 영화가 현실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비현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세계에는 일종의 ‘전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셀의 컬러풀한 환상 장면에서 오데트는 일종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남자를 꾀는 ‘요부' 혹은 ‘악녀'라는 전형을 말이죠. 반대로 흑백 세계에서의 오데트는 남편의 사업을 위해 신혼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즐길 수밖에 없는 ‘가정적인 여성'의 전형을 표방합니다. ‘요부'와 ‘정숙한 여자'라는 두 가지의 고정된 도상 사이에서 마르셀은 혼란스러워하며, 스스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죠. 대부분의 상업 영화, 혹은 ‘영화' 그 자체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두 가지의 고정된 전형으로 표현됩니다. ‘요부' 혹은 ‘정숙한 여자'로요. 남성 캐릭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남성의 경우엔 그래도 보다 다양한 전형들이 등장하죠. ‘영웅'과 ‘악한', 혹은 ‘영웅의 조력자'와 ‘악인의 조력자', 혹은 ‘소시민'과 같이 평범한 사람을 나타내는 전형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엔 대부분 저 두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헐리우드의 문법에 따르자면 ‘요부'와 ‘정숙한 여성'이라는 두 전형은 서로 다른 두 캐릭터이자, 서로 다른 두 배우에 의해서 연기되어야 합니다. 이 세계 속에서 요부이면서 가정적인 여자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옥>에서는 ‘요부'이면서 ‘정숙한 여자'라는 상반되어야 하는 두 캐릭터가 오데트라는 단 한 명의 캐릭터로 존재하며, 이를 연기하는 로미 슈나이더 역시 단 한 명입니다. 마르셀의 모든 고뇌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의 세계에서 ‘요부'이자 ‘정숙한 여성'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오데트는 ‘요부'일까요, 혹은 ‘정숙한 여성’일까요. 영화는 명확히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마르셀은 결국 모든 사람이 보는 호텔 로비 앞에서 오데트를 향해 손찌검하게 되고, 오데트는 그런 그를 떠납니다. 영화는 이 모든 파멸을 자초한 사람은 마르셀인 것처럼 보여줍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것은 그만의 정신병 때문이 아닌, 여성은 요부 혹은 정숙한 여자여야 한다는, 혹은 ‘요부'는 ‘정숙한 여자’가 될 수 없다는 어떤 이미지의 감옥은 아닐까요. <지옥>은 컬러는 영화에게 현실감을 부여하는 요소이며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기 위해선 여성 캐릭터는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좋다는 헐리우드의 두 가지 문법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조롱하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헐리우드를 놀라게 하려면, 그 시스템을 부수는 것이 정답입니다. 누벨바그의 젊은 감독들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로 헐리우드의 시스템을 부수었다면, 앙리 조르주 클루조는 한 편의 이야기로 헐리우드의 문법을 부숩니다. 이 방식이 즉흥적인 촬영이라는 젊은 감독들의 방식을 따라하지 않으면서 헐리우드를 놀라게 할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는 것이죠. 즉흥, 나의 즉흥은 종이 위에서 펼쳐진다.



남자는 산토끼의 말을 들으며 크나큰 흥미를 느껴 스마트폰으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를 검색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범인은 21번에 산다>로 데뷔하였으며 <밀고>, <범죄강변> 등의 작품으로 추리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치밀한 디테일 묘사에 의한 연출이 특징이다. <정부 마농>, <공포의 보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적힌 글을 읽으며 그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클릭했다. 클루조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는 “인페르노"라고 적힌 타이틀의 영화를 클릭한다. 그곳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감독 : 앙리 조르주 클루조라는 점 외에는 배우가 누구인지도 적혀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블로그 탭에서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라는 제목의 글을 찾아냈다. 그 포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4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는 새 프로젝트 <지옥>의 촬영에 착수한다. 한 남자의 질투와 광기를 그려낸 이 환상적인 치정극은 막대한 예산과 촉망받는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큰 화제가 된다. 그러나 촬영 3주 후 클루조가 심근경색을 일으키면서 결국 <지옥>은 저주받은 미완의 영화가 되었고, 최근 13시간 분량의 방대한 필름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남자는 남은 포스트를 빠르게 읽었지만, 해당 블로거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라는 영화는 완성되지 않은 영화이며, 몇 가지의 푸티지만 남아있고 이 영화가 완성되었으면 굉장한 걸작이 나왔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다. 산토끼님은 분명히 이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아니, 적어도 이 영화를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ㅡ 산토끼님, 혹시 지금 말씀해주신 <지옥>은 어떻게 보셨나요?

남자의 말에 산토끼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가방에서 팜플렛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팜플렛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 특별전이라고 적혀있다.

ㅡ 앙리 조르주 클루조 특별전에서 봤어요. 오래전 아트선재 시네마테크에서 열렸었죠. 그때 사실 전 <공포의 보수>를 보러 간것이었는데, 시간을 착각했던 모양이예요. 영화가 시작하고 타이틀이 뜨고 나서야 이 영화가 <공포의 보수>가 아닌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산토끼의 말을 들으며 남자는 팜플렛을 살펴보았다. 해당 특별전은 2월 한 달 동안 열렸고, <지옥>은 2월 29일 딱 하루 상영을 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방금 남자가 읽은 정보에 의하면, <지옥>은 세상에 없는 영화다. 그런데 대체 이 팜플렛은 무엇인가?

ㅡ 제가 방금 검색을 해보았는데,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클루조 감독은 이 영화를 촬영하다가 심근경색을 일으키며 죽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20%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촬영을 시작한 약 3주간의 시간 동안, 실질적으로 영화에 쓰일법한 장면은 몇 장면 없다고 해요. 나머지는 모두 이후 환상 장면을 위한 테스트 촬영 분량뿐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산토끼는 그의 말에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ㅡ 그렇지만 저는 그 영화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극장에는 저 외에도 몇 명의 관객이 있었지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은 있습니다. 아마도 잘못 알려진 정보는 아닐까요. 그런 일들은 꽤 비일비재하죠. 예컨대 정성일 평론가가 출간하던 <키노>는 그 당시 세계 각지에서 상영되는, 하지만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잡지였습니다. 그 잡지에는 <손바닥>이라는 영화에 대한 칼럼이 기고되어 있었죠. 저는 그 영화가 무척 보고 싶었지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 15년 후에, 우연한 경로로 그 영화를 보게 되었죠. 그런데 <키노>에 실렸던 당시의 칼럼과 실제 영화의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있다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는 생각보다 부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본 것마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가짜 뉴스를 넘어선 가짜 영상이 돌아다닙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이라고 욕하는 영상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무척 진실과 흡사해 보였지만, 사실은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가짜 영상이라는 점이 밝혀졌죠. 우리가 듣는 정보, 보는 정보, 읽는 정보는 과연 얼마나 정직할까요. 저는 그 영화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팜플렛은 그에 대한 증거고요.

ㅡ 하지만...

남자는 그에게 검색 결과를 보여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ㅡ 하지만 보세요. 한 명의 블로거라면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검색 결과가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은 완성된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글을 검색해도 말입니다.

ㅡ 하지만 전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 외에도 몇 명의 관객이 함께 있었고요.

남자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산토끼의 말에 더 무어라 하지 못하고 가만히 팜플렛만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결과들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였지만, 그 증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정보, 그것도 부정확할 수 있는 확률이 존재하는 증거였다. 하지만 팜플렛은. 팜플렛은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남자가 가만히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산토끼는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ㅡ 혹시 이후 영화도 보시나요?

산토끼의 말에 남자는 다음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신의 코미디>였다. ‘주앙'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몬테이로 감독의 연작 중 하나였다. 남자는 이전 <신의 결혼식>이라는 영화를 보고 몬테이로 감독에 큰 호기심이 생겼기에 이번 기획전에서 꼭 보고자 했던 영화였다.

ㅡ <신의 코미디> 말이죠. 네, 저는 보고 싶었던 영화라.

ㅡ 부디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못 보게 되어서. 몬테이로 감독의 영화를 알기는 아는데 직접 보진 못했던터라 저도 궁금했었는데 이후 약속이 있어서. 그래도 이번 특별전은 자주 올 듯하니 몇 편 정도는 볼 수 있겠죠. 그럼 재밌게 보시길.

산토끼는 자신의 가방을 챙겨 아트시네마 로비를 벗어났다. 남자는 팜플렛을 쥐고 그를 불러 돌려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부르지 않았다.



남자는 그날 <신의 코미디>를 보았다. <신의 코미디>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이한 영화였다. 감독인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가 연기하는 ‘주앙’이라는 캐릭터는 나이가 많고, 왜소한 남성이다. 그는 ‘천국'이라고 이름이 붙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을 하며, 놀라운 맛들을 창조한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결벽에 집착하며 가게에서 일하는 다른 젊은 여성 직원들을 귀찮게 굴기도 한다. 그의 은밀한 취미는 자신이 지금껏 만난 여인들로부터 채취한 음모를 모아둔 ‘생명의 책'이라고 불리는 책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일하는 젊은 여성 직원들과 플러팅을 즐기고, 동네 정육점 주인의 열다섯살 딸인 조니나와도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정육점 주인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찾아오는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불쾌하면서도 동시에 기이할 정도로 이상한 평온을 안기는 몬테이로의 영화를 보면서도 남자의 온 정신은 산토끼님과의 대화와 그가 그에게 준 팜플렛에 쏠려있었다. 두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남자는 트위터를 열어 산토끼님의 계정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의 계정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산토끼님과 함께 나눈 대화를 검색하여 그의 아이디를 찾아내는데까지 성공했지만, 그 아이디를 누르면 정보를 불러올 수 없다는 화면만 뜰 뿐이었다. 계정이 폭파된 것이다.

트위터의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사라진 산토끼님을 아무도 찾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그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트위터 계정도 삭제된 현재, 산토끼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은 그날 그가 건넨 팜플렛뿐이었다. 그는 팜플렛을 토대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 특별전에 대해 검색했지만, 오래전 폐업한 아트선재 시네마테크의 지난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나와 있지 않았다. 블로그나 SNS 등을 검색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때 당시 <지옥>을 자신과 함께 보았다는 다른 관객을 찾는 글을 올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남자는 두려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무엇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인지는 그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남은 특별전 기간 동안, 남자는 단 한 번도 산토끼님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남자는 산토끼님을 보지 못했다.




작가노트


산토끼님의 주장과 달리,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은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가 맞다. 대신 이 영화와 관련된 두 편의 영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영화의 리메이크작(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이고 하나는 다큐멘터리이다. 리메이크는 클루조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히치콕이라고 불리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도 프랑스의 히치콕으로 불리는데!)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94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 <지옥>이 그것이고, 다큐멘터리는 세르지 브롬버그와 루산드라 메드리아 감독이 연출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가 그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모임을 만들자고 할 때,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을 선정한 이유는 마침 내가 두 영화를 모두 인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에 대해 남아있는 것은 클루조가 진행했던 테스트 촬영과 몇 장면의 촬영이다. 영화의 소유권은 클루조가 아닌 제작사와 보험사에게 있지만,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의 상영권은 여전히 클루조에게 있다. 세르지 브롬버그는 다큐멘터리에 클루조가 남긴 ‘장면들’ (테스트 촬영을 위한 장면들과 몇 씬에 쓰였어야 했던 촬영본)을 삽입하기 위한 사용 허락을 받기 위해 클루조와 당시 결혼했던 이네스 드 곤잘레스를 찾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그에게 “당신은 아마도 그렇게 나를 찾아온 300번째 사람일 것이다"라는 말을 건네며,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영화를 넘겨주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세르지 브롬버그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리서치한 모든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여 그 의미를 설명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지금껏 나를 찾아온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영화를 넘겨주진 못하겠지만, 당신을 바래다줄 순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세르지 브롬버그 감독을 1층까지 배웅해주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녀가 이야기하던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이네스 드 곤잘레스는 세르지 브롬버그와 함께 3시간 동안이나 엘리베이터에 갇혀있게 된 것이다.

세르지 브롬버그는 그녀로부터 클루조의 촬영 필름을 건네받아,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좋은 다큐멘터리에는 언제나 의도해선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적이 일어났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고, 당연히 나는 이 다큐멘터리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큐멘터리는 클루조의 <지옥>의 촬영과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따라가고, 왜 이 영화가 멈춰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 영화에서 클루조가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어렵게나마 따라간다. 완성되지 않은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세르지 브롬버그는 직접 그녀를 찾아가 빌기도 하고, 그 정성에 죽은 클루조의 영혼이 감복해 ‘엘리베이터 사고'를 일으켰는지 어쨌는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기 대한민국에 있는 나는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물질적 여유도 없었고,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다른 영화를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감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 관해서 쓰고자 했던 건... 그래, 난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라는 영화가 궁금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대체 왜 많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궁금해할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고, 이건 더 나아가서 왜 그 많은 씨네필들은 자신이 보지 못했으나 남들이 명작이라고 말하는 영화를 그렇게나 ‘궁금해하고', 또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아쉬워하는걸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영화가, 뭐라고. 그래서 두 명의 씨네필이 등장해서, 각자 서로가 본 영화에 대해서 엄청나게 젠체하며 이야기하는 소설을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 나오는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와 정보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에서 따온 것들이 많은데, 한 개만 명확히 밝히자면 첫 문단은 윤지양 시인이 <시시각각>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 한 인터뷰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왔다. (이건 검색해도 안 나올 것 같아 밝힌다) 몇 가지 정보는 해당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는 글을 정확하게 인용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어찌 되었든 나도 인터넷에서 본 정보들이기 때문에 이 글에 적힌 이야기와 정보들이 모두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 중에는 본 것도 있고, 보다가 잔 것도 있고, 알기는 아는데 보지는 않은 영화들도 있다. 이 글의 제목은 라야 마틴의 영화에서 따왔다. 이 역시 알기는 알지만 보지는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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