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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할 수 없는not reconciled (7)




도망가지 못한 자들의 진실


어떤 말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다. 거짓만이 나를 감동시킨다. 내가 원하는 건 감동이 아니었기에 그런 감동은 정신을 마비시킨다. 감정은 언제나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다. 몰이해를 거쳐 가는 진실들. 오해가 없으면 진실도 없다. 오한기는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에 관심을 잃었다고 했는데 최근엔 읽고 쓰는 것에도 흥미를 잃었음을 고백했다. 그렇다면 그에겐 뭐가 남는가. 몰이해와 대출이자, 불면증. 인간에 대한 경멸 혹은 자기 환멸. 오한기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헛구역질을 했다. 오한기의 소설은 초판 1쇄도 다 소진되기 어려웠으며 생계를 위해선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사실 이것은 오한기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문학사에 이보다 슬픈 일은 얼마든지 있기에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혹시나 당신의 지인 중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다면 절대 판매부수 같은 걸 질문해서는 안 된다. 울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들이 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소설가와 시인이 당신 주변에 있는가? 문학이 자꾸만 당신에게 말을 거는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길 바란다. 절대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도망치지 못한 쪽이다. 그래서 지금도 하루에도 세 군데의 카페를 돌며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며 점점 활자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오한기는 더 이상 문장을 쓰지 않는다. 글의 중간에 부비트랩을 심거나 페이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뿐이다. 종종 청계천에서 뒤로 걷는 오한기를 보았다. 그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 위해 뒤로 걷는다고 했다. 환멸이 없던 곳으로. 즐거움만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아무도 기쁘지 않은 곳으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으로. 걷다보면 좋은 생각이 많이 나는데 이상하게도 멈춰서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걸으며 소설을 쓴다고 했다. 나도 요즘 많이 걷는다. 어제는 시청역에서부터 광화문, 종로를 지나 명동까지 걸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다. 소설은 맛이 간 인간들이나 쓰는 것이다. 오한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렇다고 오한기가 맛이 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단지 인류라는 문맥에서 약간 빗겨나 있을 뿐이다. 나는 요즘 스스로가 인간이라기보다는 활자에 가깝다고 느끼는데 아무에게도 이런 얘길 하진 않는다. 이럴 때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떠 있을 때만 잠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지.

오한기는 말했다.

나는 그따위 것이 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죽고 싶어졌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세상에게 버림받은 느낌이야.

그렇다면 정상이군.

오한기가 말했다.


왜 울고 있나요.

뎀셀브즈에서 만난 한국문학이 질문했다. 난 울고 있지 않았고 책을 읽고 있었으며 내 생각에 울고 있는 건 한국문학이었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한국문학은 서서 나를 내려 보고 있었지만 사실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고 내 안에 가라앉아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보면 그런 걸 알 수 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지만 기대하는 것은 기대 없이 사는 것. 나는 미완성에 작동한다.


​거짓된 희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느 정도까지는.

마음이 쇠약해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동반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병든 마음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완전히 부서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나는 보던 책을 한국문학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한국문학은 표지를 보더니 나대신 책을 덮었다. 베케트가 잘못이 많네요.


뎀셀브즈를 나와 한국문학과 을지로를 걸었다. 배가 고팠는데 한국문학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기씨. 어디가고 싶어요.

대답하면 오한기가 될 거 같아서 하지 않았다.

유령이랑 가까워졌나요. 죽은 거 아니죠? 한기씨.

그런가. 벌써 죽은 건지도 몰라.

자꾸 한기씨라고 불러서 미안해요. 가끔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어떤 것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나요?

낭독과 정신분열.

음.

문학과 사지절단.

완전 다르게 느껴지는데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큰 차이가 있는 거 같은데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난 말하지 않았고 대신 잘못된 용어 선택의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명쾌하지가 않네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해지고 있네요.

너무 많이 써서 그래요 한기씨.

안 썼는데요.

아무것도 안 써서 그런 거예요 한기씨.

제길.

한기씨 어디가고 있어요.

최악으로.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요.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까.


죽은 사람들을 너무 따라다니지 마세요. 헤어지기 전에 한국문학이 말했다. 우리는 충무로역에서 헤어졌다.



믿음은 그루지야로 가는 길목


정지돈이 프랑스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난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우는 독일에 갔으며 금정연도 영국에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에서 만났다. 오한기는 종종 눈을 감고 그루지야에 갔고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아침엔 아무도 없던 카페가 오후만 되면 사람으로 가득 찬다. 사람이 왔기 때문이 아니야. 시간이 그렇게 만든 거야. 다음으로 시간이 할 일은?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가능성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그런 말을 들어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가능성을 빼앗겼다기보다 슬픔을 빼앗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을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에 더는 아무렇지도 않다. 살 수 없다면 느낄 수 없나. 살 수 있나.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사치로 느껴진다면 사는 건가. 생각해봤자 잊혀질 질문들. 예술에 재능 따윈 필요 없다. 상황이 재능을 만든다. 재능이 없을수록 오래 할 수 있다. 믿음만 없다면. 예술가라고 말하는 인간들만 조심하면 된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일수록 주로 자신을 예술가라고 한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나 보지?


​전 그쪽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햇볕이 좋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말들.

그래서 얼마나 있나 나에게 있는 시간. 시간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나.


​어떤 교도소든 3명의 사형수는 있는 법이지.

사무실에 놀러 갔더니 다짜고짜 오한기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뭐냐고 묻자 오한기는 들고 있던 책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기예르모 로살레스. 쿠바의 카프카.

제기랄 무슨 놈의 카프카가 이렇게 많아?

쿠바의 카프카 기예르모 로살레스

일본의 카프카 아베 고보

포르투갈의 카프카 공살루 타바리스

이탈리아의 카프카. 중국의 카프카. 베네수엘라의 카프카. 핀란드의 카프카. 폴란드의 카프카. 해변의 카프카.

카프카가 무슨 죄야. 카프카도 카프카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나는 현대적이지 않다. 나는 추상적이다.

언어를 통해 모두가 감염되고 있어.

감염자들. 가능성.

나는 바이러스다.


​나는 지금 그루지야에 있어.

눈을 감고 오한기가 말했다.

제길 충전기를 챙기지 않았군. 괜찮아 여긴 그루지야니까. 그런데 전 어떻게 살아야하죠 선생님? 대답해주세요 선생님! 가지 마세요.

나는 오한기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방금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랑 대화했어.

뭐래?

야간경비 자리 하나 있다던데?

제기랄.

나는 오타르 이오셀리아니가 아직 살아있는지 생각했다.

내 생각 속에는 모두가 살아있다.


죽고 싶다.

근데 꾸준히 죽고 싶다는 건 살고 싶다는 거 아닌가.

오한기도 가끔 맞는 얘기를 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것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꿈 꿨어. 근데 버스를 타려는 건 아니었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너무 뻔한 일이니까.

클리셰. 너무 많은 것들이 클리셰로 이루어져 있어. 그래서 내가 있을 곳이 없는 거야.

나는 그루지야를 생각했다.

오한기가 거긴 지금 아침 8시라고 했다.​








필자소개


한상경.

오한기의 60%는 사실 오한기고 나머지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 가능성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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