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S

한밤의 게스트



94.2 메가헤르츠 에이엠, 잘 수 없거나 잠들지 못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오늘은 사회 각계각층의, 약간은 남다른 분들을 모셔보는 금요 초대석 <삶의 현장에서> 시간이죠. 혹시 여러분은 뱀파이어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몇 해 전 고등학교 킹카 뱀파이어와 늑대 소년,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십 대 소녀의 삼각 연애담이 전 세계 극장가에 흥행 돌풍을 일으킨 적 있었죠. 빛보다 빠른 데다 괴력도 갖췄는데 조각같이 잘생기기까지 한 뱀파이어 남성, 그에 대적해 순애보를 뽐내며 힘과 몸매 또한 뱀파이어에 뒤지지 않는 늑대 소년, 둘 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소녀에게 구애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진짜 소녀들부터 소녀 취향을 벗어나지 못한 성인 여성들의 판타지가 될 만하죠?

그런데 그런 뱀파이어가 실제, 하지만 이 이야기 속 멋진 모습이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또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들 속에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실까요? 믿을 수 없다고요? 하지만 어떤 현실은 픽션보다 극적이죠.

잠시 후, 바로 이 스튜디오에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그런 뱀파이어 한 분을 제 옆에 모셔보려 합니다. 사실 디제이인 저 역시 방송 시작 전 엄청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성사되고야 말았네요. 일단 광고부터 듣고 오시겠습니다.

돌아왔습니다. 시간대 탓에 늘 평화롭고 한적한 저희 프로그램 청취자 게시판이 여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군요. 여러분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비방은 관리자의 판단 아래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는 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하루하루를 고단히 살아가시는 청취자 여러분께 사기꾼이나 정신병자의 망상 따위를 귀중한 전파에 실어 소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저는 사기꾼이나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뱀파이어인 것도 맞고요.

아, 소개해 드리기도 전에 오늘의 게스트 분이 먼저 입을 여셨네요. 뭐 이렇게 된 김에 청취자분들께 정식 인사 부탁드리죠.

저는.

잠시만요. 저희 작가들과 사전에 어떻게 협의하셨는진 모르겠는데, 신상 보호 차원에서 가명을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김윤희라고 합니다. 본명이에요.

아, 윤희님? 굳이 진짜 이름을 밝히실 필요는 없으신데. 아무튼 큰 용기 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근데 참 괜찮으실지. 저희가 윤희님 같은 존재를 스튜디오에 모신 적은 처음이라 음성 변조 장치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네요.

상관없어요.

그래도 행여 목소리를 듣고 주위 분들이 아신다면 곤란하지 않으실지?

보시다시피 저는 목소리도 이름도, 얼굴까지 모두 평범 그 자체라.

대범하시네요.

만에 하나 내일 출근해 동료나 보스께서 제게 물어온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런데 누구 님은 평소에 뱀파이어 같은 걸 믿으세요? 와, 의외인데요?”라 반문하면 될 일이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말씀처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시네요.

그쵸?

지금 귀를 뾰족이 세우고 있으실 청취자분들을 위해 제가 외양 묘사를 좀 해도 될까요? 오늘 게스트 분의 외모는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이삼십 대 직장여성의 모습입니다. 혹시나 남성인 제가 묘사를 위해 좀 훑어본다고 해도 불쾌해하진 마세요. 요즘 또 이런 문제가 워낙 민감하잖아요.

뭐 저는 어차피 살아 있는 여자라고 하기도 좀 그러니까요.

지금 제 옆에 앉아계신 오늘의 게스트는, 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평범합니다.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 좀 마른 체격, 거의 지워진 옅은 화장… 죄송하지만 눈 밑에 파란 다크서클이 눈에 띄는데요. 이건 흡혈귀의 가장 큰 특성 아닙니까?

과로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닐지요.

그런가요. 아무튼 본인이 주장하신 대로 뱀파이어가 맞으시다면 다이어트 걱정은 없으시겠네요? 하하. 이건 또 여성으로 살아갈 때 큰 장점이 아니실지.

오히려 식대가 거의 안 든다는 경제적 강점을 들고 싶네요. 저희 업계 연봉 인상률은 매년 삼 퍼센트면 잘 쳐주는 거라서요. 월세와 교통비는 날로 오르는데.

저희 청취자분들도 많이 공감하실 주제입니다. 그리고 다른 특성을 보자면…. 정말, 평범하시네요. 피곤해 보이고 좀 무표정한 인상, 허리춤이 구겨진 하얀 면 셔츠, 검은 정장 스커트, 굽 낮은 구두. 전형적인 여자 사무직원의 모습인데, 혹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낮엔 강남의 한 로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흠, 로펌에서 법률 사무원으로 일하는 뱀파이어라. 혹시 그 분야에 잠입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법조계에 집안의 원수가 있다든지.

어떤 변호사들은 일반 회사 생활도 안 해본 데다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는 족속인 줄 알아 솔직히 가끔 재수가 없긴 하지만, 죽이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군요.

잠깐의 허기 때문에 법에 바싹하고, 검찰청이며 경찰서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먹어 치우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죠. 제 보스를 비롯한 저희 로펌 변호사님들은 골초가 많아 썩 당기지도 않고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비서라면 모시는 분의 목에 치아를 댈 엄두조차 못 내지 않을까요? 솔직히 의뢰인들이 많이 오가는 공간에서 그런 장면을 연출하기도 좀….

그런 장면요?

반듯한 저의 이미지상 말하긴 그렇지만, 젊은 여비서와 중년 남성 보스 간의 그렇고 그런…. 선을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말해놓고 죄송하다는 건 좀. 사회자님처럼 보스와 비서 간의 관계에 야릇한 환상 같은 걸 품는 분들도 가끔 계시긴 해요. 일반 회사 비서로는 일해본 적 없어 모르겠지만, 자기가 모시는 변호사한테 연모를 품는 여비서는 영점 영영 일 퍼센트쯤 될 것 같네요.

왜죠?

궁금하시면 사회자님도 일해보셔요.

남자도 가능합니까?

하지만 남자분들은 저임금을 견디지 못하죠. 가끔 수행비서는 남자를 뽑지만요.

그렇군요. 다른 직업이 아닌 로펌 비서로 일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칼퇴근이 거의 보장되거든요. 전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는 늙지 않는 여자 노동자라, 비서라는 직무에 잘 맞는 것도 같고요. 여자가 자기 입 하나 풀칠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특정 나이대 이하여야만 하잖아요. 변호사 비서가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외국계 회사에서 외국인 상사를 모시는 비서들과는 좀 다르죠.

제가 사전 조사를 해보니 로펌 여직원들은 월에서 금까지 나인 투 식스, 법원 업무시간과 똑같이 일한다고 하더군요.

네, 간혹 사람을 나물처럼 들들 볶는 변호사를 만나지 않는 이상 변호사 비서에게 초과 수당은 없죠. 초과 근무를 안 하니까.

말씀만으로는 좋은 직장 같네요. 그런데 밤에 다른 일도 하신다고.

정확히 여섯 시 십오 분에 로펌 문을 나서요. 귀에 이어폰을 단단히 꽂고 최신 댄스곡들을 플레이하죠. 노동요가 필요하잖아요. 구호선 신논현역으로 힘차게 걸어가 급행열차를 타요. 여의도역 근처의 지하 바에서 새벽까지 서빙을 합니다.

바 서빙이라고요.

토킹 바라고 하죠. 말 그대로 바텐더가 손님의 말을 들어주는 게 주가 되는 바. 제가 일하는 바에는 다섯 개의 테이블이 있고 바텐더는 모두 여자예요. 주 업무는 손님의 옆자리에 앉아 유쾌하고도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요.

음, 잠시만요.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저희 방송 청취 연령가는 십오 세입니다. 윤희님, 이 점을 염두에 둬 주세요.

저는 법률 사무원이에요. 음주운전 한 번으로도 이 분야에서는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없죠. 또 모던 바는 식품위생법상 일반음식점이라 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랬나요. 그런데 굳이 바에서 일하시는 이유가? 강남에서 여의도까지 가시면서.

전 당당해도 회사 근처라면 구설수에 오를 소지가 있고, 법률업계가 좀 엄격해서요. 왜 굳이 바냐고 하신다면, 저는 여자의 일은 낮에 사건 봉투를 드나 밤에 술잔이 놓인 트레이를 드나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냉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요.

글쎄요, 하하. 일하기는 어떠세요. 합법이라시니 점잖은 분들이 많겠죠?

할 만해요. 제가 하는 일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남자분들의 말을 듣고, 조금만 변형하여 그대로 되돌려 말해주는 거니까요. 그분들은 함께 말한다, 그러니까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메아리가 될 때 손님들은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바에서 퇴근은 몇 시쯤 하시나요?

새벽 세 시요. 두 직종의 드레스코드가 얼추 비슷한 게 다행이에요. 왜 회사원 남자들은 낮에도 신물 나게 보는 투피스 치마 정장을 프라이빗 한 장소에서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 구두만 갈아 신어요, 로퍼에서 스틸레토 힐로. 마지막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만 더 끄를 때마다, 여자 사무직원과 바 여종업원으로서 하는 업무 차이는 셔츠 단추 한두 개 차이 같다고 생각하죠.

글쎄, 전 보수적인 중년 남자라 오늘 우리 게스트 분이 하는 말씀을 다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뭐, 참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이신 건 잘 알겠습니다.

다 열심히 살죠.



우리 화제를 바꿔볼까요? 일단 가장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식사는 어떻게 하시는지.

일일 일식해요, 저. 새벽에 딱 한 번 먹는 게 끝이에요. 짐작하시겠지만 낮에는 전혀 먹을 수 없죠. 예쁜 텀블러에 물을 담아 사무실 책상 위에 놓고 홀짝대는 시늉을 하고, 비서 동료들이 나눠주는 과자는 호들갑 떨며 잘 받아 놓았다가 몰래 화장실 휴지통에 버리는 것도 가끔은 귀찮네요. 여직원 간 결속을 위해 정작 저는 먹지도 못하는 초콜릿까지 가끔 돌린다니까요.

그럼 점심시간에는 어떻게 하세요?

구내식당 밥, 한 시간 있다 화장실에서 게워내야죠. 동료들 앞에서 열심히 음식을 씹고 위장이라는 주머니에 일단 담아둬요. 이제 배에 어디를 눌러야 전혀 안 녹은 음식이 양변기에 골인할지 통달했다니까요. 죄송해요 적나라해서, 뭐 지금 이 시간에 음식 드시는 분은 많이 없겠죠. 물어보시기에. 아, 가끔은 다이어트 핑계를 대고 나와 검은 양산을 쓰고 법원이나 로펌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를 걷죠. 그 동네는 사람이 늘 피톨처럼 많은데, 실핏줄처럼 뻗은 작은 골목들로 슥 들어가 체구가 작고, 눈에 띄지 않으며, 비흡연자로 보이는 혼자 다니는 여자들을 조용히 뒤쫓아요.

그분들이 설마 간식…?

윈도우 쇼핑이죠. 제게도 휴머니즘은 있는걸요.

가슴을 쓸었네요.

대개 그분들은, 근태가 좋으면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채용 공고 한 줄에 기대를 걸고 열심히 일하지만, 곧 사무 비품처럼 대체되는 이십 대 초중반의 계약직 여자들이죠. 제가 처음 사회에 발 디뎠을 때를 떠올리게 해요. 저도 갓 학교를 나왔을 때는 그런 허무한 희망을 품었었죠. 아무튼 그런 친구들을 인적 뜸한 뒷골목에서 파리 끓는 변사체로 발견되게 하는 것보다는, 잠깐의 허기를 참는 것이 제 나름의 도덕적 마지노선이랄까 그래요.

네에. 그럼 새벽에, 과연 식사를 어떤 식으로 하시죠?

사회자님, 혹시 골뱅이라는 은어를 아시나요?

음, 뉴스를 진행하던 시절에 접한 적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술에 약을 타거나 과한 술을 먹여 의식 잃은 여자를 강간하는 걸 뜻하죠.

혹시, 그렇게 술 때문에 저항 의사를 표하지 못하는 분들의 피를 몰래 마셔 배를 채운다?

정확해요.

아니, 그건 범죄잖아요!

강간보다는 좀도둑질에 훨씬 가까운 건데요. 제게는 생존의 문제라 어쩔 수가.

아, 이건 좀 너무 자의적인 발언이신데요.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기도 하고요.

잠깐 들어보세요. 술이나 몰래 탄 약에 정신을 잃은 여자를 추행하거나, 동영상까지 찍어 인터넷에 퍼뜨리는 건 공공연히 무용담으로 떠들어지고 범죄 취급되지도 않는 일이잖아요. 반면 이백 밀리 우유팩 하나 정도의 피만 잃고 모범택시에 태워져 자택까지 안전하고 편안히 도착되는 건요? 전자보다는 후자가, 성폭행보다는 비동의 헌혈이 낫지 않나요?

하지만 윤희님의 행위 또한 다른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저도 시민이에요. 성실히 납세하고 투잡까지 뛰는 경제인구에요. 심지어 받는 돈에 비해 많은 일을 군말 없이 해내 모범사원이란 칭찬까지 듣는걸요. 한국 사회가 원하는 인간군상 아닌가요?

전 타인에게 윤희님이 피해를 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시민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의 생활을 영위하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네요. 정기적인 헌혈은 건강에 좋다지만, 아무튼 동의 없이 남의 목에 구멍을 내는 건 늘 죄송하게 생각은 해요.

윤희님을 비난하거나 단죄하려고 어렵게 모신 건 아닙니다. 말씀 계속해 주세요.

그냥 긍휼한 마음으로 좀 이해해 주셨음 해요. 마취 주사를 찌르고 피를 빨 수도 없으니, 저로서도 탁한 피를 마시는 걸 감수하고 취객을 고르는 거예요. 또 술집을 들르는 사람들의 목적은 대개 정욕이잖아요. 타깃이 동행한 여자건 옆자리에 앉는 여종업원이건요. 하지만 제게 바는 휘발되는 욕망의 놀이터를 넘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좌우하는 삶의 터전이에요. 성욕과 식욕 중 더 절박한 게 어느 쪽인가요?

윤희님을 옹호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 특수한 사정에 처해 있으시니 방법이 없긴 하겠죠. 아무튼 매일매일 참으로 열심히 살고 계세요. 밤낮으로 돈을 벌고, 하루하루 긴장에 차서.

모든 직장인이 그렇죠. 직장인이 된 순간 사람들은 돈 그 자체를 위해 사니까.

생활을 위해 돈을 모으는 거죠.

돈을 모으는 게 곧 삶 자체가 되지 않았나요? 모든 삶이 이제 돈 쓰는 것과 연결이 되니.

하지만 윤희님도 그렇게 투잡을 뛰어 돈 모으는 목적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목적요? 어떤?

꿈, 같은?

제 꿈이요? 제 꿈이라면, 살아남는 것 자체에요.

네?

주말 저녁 속성 반으로 요가강사 자격증을 땄어요. 새벽에 꽃시장 가는 걸 빼면 실내에서만 움직이고, 역한 음식 냄새를 안 맡아도 되는 플로리스트도 괜찮을 것 같았죠. 하지만 운동 강사나 꽃꽂이 선생이 되는 것 자체가 꿈은 아니었어요. 그건 살기 위한 수단일 뿐. 다른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죠. 꽤 오래전부터, 돈을 모으는 것만이 시민들의 궁극적인 꿈이 되지 않았나요?

관점 차이라 해 두죠. 하지만 어째 유한한 삶을 사는 제가 주제넘게 자아실현이라는 걸 거창하게도 생각할 때, 영원히 죽지 않을 윤희님은 시야가 더 좁으신 듯 합니다.

그럴지도요. 하지만 오래, 평탄히 사는 동시에 자신을 넘어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건 절대다수의 사람들과는 상관없죠. 자아실현보다는 죽지도 않는 내 몸뚱이를 어떻게 먹여 살리느냐가 지상과제인 건 저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전 뱀파이어가 되기 전부터 오래 사시고 싶어 하시는 노인 분들이 늘 신기했어요.

오프스프링offspring, 자손이 있잖아요. 죽지 않는 나.

저랑은 이전에도, 지금은 더더욱 상관없는 이야기네요. 번식.



네… 여기에도 개인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만 청취 연령 제한 상 넘어가겠습니다. 여성분에겐 민감한 질문이겠지만, 출산은 못 하시겠죠?

솔직히 정확히는 몰라요. 저 같은 존재는 아직 책, 영화, 인터넷에서밖에 본 적 없어서. 하지만 찾아본 책들에서는 네, 다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고요. 이론적으로 죽은 자궁이니 착상부터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방송 처음 제가 언급하기도 했던 세계적인 히트작에서는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종 아기가 태어나던데?

속편을 만들려면 후손이 있어야 이야기가 되니.

그러네요. 혹시 좀 슬프시진 않습니까?

뭐가요? 낮에 밥을 못 먹는 게요?

아뇨, 평범한 여자분들처럼 아기를 갖지 못하시니….

슬퍼해야 하나요?

꼭 그러실 필요는 없죠. 아무튼 식비가 거의 안 든다는 게 신통합니다. 전 맛집 탐방 취미가 있어 파산할 지경인데요, 하하.

제게도 미식이 있어요. 담배를 피지 않고, 수도권보다는 근교나 시골에 살면서 항산화에 좋은 비타민 씨와 이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이왕이면 운동도 좀 하는 젊은 독신 여성.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제겐 유기농이죠.

비서분들 중 이런 여자분들이 많지 않나요? 아무쪼록 회식 때 동료를 노리지는 않으시길.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분들만, 윤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만 헌혈하게 한 뒤 안전 귀가시켜주시죠.

그럼요. 미혼 여자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직업 시장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약자잖아요. 저도 그 중 하나인데 돕고 살아야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진짜 그 점에 대해 가끔 생각해요. 아이를 낳지 않고 젊은 여직원으로 영원히 살면서, 아이를 낳고 쫓겨나는 여직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있으면 무엇일지. 지금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빠 답을 못 찾았지만요.

네, 윤희님이 같은 여성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공헌할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라 믿습니다. 피로도 우 리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덜 타실 테니.

흠, 제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세요.

혹시 언급하셨던 다크서클처럼, 뱀파이어의 특성이 아니라 노동자의 피로라 하실 겁니까?

빙고. 우리 모두 아침저녁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보는, 바로 그거죠.

듣고 보니 또 그냥 피로가 쌓인 직장여성처럼 보이네요.

실은 고민이에요. 변호사 비서 일과 바 서빙 모두 평생직장은 아니라. 전혀 늙지 않는 얼굴과 신체나이와는 별개로, 십 년이 지나 사십대가 되면 두 일 모두 하기 힘들 것 같거든요. 이력서에 주민번호 넣잖아요.

아, 그렇겠네요.

또 이 두 일은 저임금에 임금 상승 폭이 적고 이직이 잦다는 공통점이 있어, 다람쥐가 밤톨을 그러모으듯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 해요. 요즘은 저금리에 주식으로도 큰 재미를 볼 수 없고 부동산 폭락도 예상되고 있잖아요. 저뿐 아니라 모두 개미지옥 앞에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주민번호를 조회하지 않는 곳들에서만 일해야 하는 제가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끼는지, 얼마나 밤낮 열심히 살아야 할지 아시겠죠?

자, 지금 청취자 게시판에 의견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잠시 뒤 돌아오겠습니다.

중간 광고가 나가는 사이 청취자 한 분에게 질문이 들어왔네요. “뱀파이어는 불사신이라니까 사고가 나거나 자연재해가 나도 윤희님은 숨지지 않겠죠?”

저 지난달에 차에 치었었어요. 붕 떠서 십 미터는 날아갔죠.

아이고 저런. 하지만 역시, 멀쩡하시네요.

서초 고등법원에 준비서면을 제출하고 오는 길이었어요. 차종은 검은 선팅으로 무장한 마이바흐 벤츠라 검은 비닐봉지처럼 날아가는 와중에도 내심 기대했죠. 드디어.

그 말은….

쉴 수 있구나. 행복했어요, 진심으로. 이제 투잡 안 뛰어도 되고, 조마조마하며 애먼 사람들 목 물어뜯지 않아도 되고. 푹 자고 싶다, 오래오래. 근데 기면증 환자처럼 잠시 기절만 했던 거죠. 정신 차려보니 약한 타박상마저 그새 나아 있더군요. 물론 산재 처리도 안 됐죠, 젠장. 아, 죄송합니다.

중상을 입고 입원하기를 바라셨던 거예요?

어떤 직장인들은 가끔 러시아워 때 지하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고 멍하니 서, 출근길 교통사고가 나 한 달만 입원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죠. 실제 회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보니 사측과 보험회사는 예상보다 깐깐하게 나오고, 갑자기 구멍 난 생활비에 골머리 썩는 스트레스가 더 커 보였지만요. 요는, 차라리 전 이 생활을 아예 끝내고도 싶었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회사로 돌아와야만 하는 길과 아예 회사로 돌아오지 않는 길이 있다면 직장인들은 어떤 길을 택할까요? 게다가 저는, 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길을 원했을 것 같으세요?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죠. 윤희님과 이 시대 모든 과로에 시달리는 직장인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아무튼 외부 충격에 그렇게 내구성이 강하고, 일반인보다 피로도 덜 타는 신체적 강점으로 투잡을 뛰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건 나쁜 점만은 아니네요.

흠. 사회자님, 죽고 싶지 않으세요?

네? 갑자기 조금 긴장되네요. 아뇨, 전혀.

죽지 않고 싶으세요?

그럼요. 전 죽고 싶지 않습니다. 금수강산과 또 여성분들의 아름다움을, 가능하다면 미술 작품처럼 오직 눈으로만 만끽하며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이게 제 솔직한 욕망이네요.

패리스 힐튼이 ‘나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했던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부자여야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평범한 인간이라면 오래 살고 싶고, 죽지 않고 싶죠.

끝나지 않는 책은, 그럴 수도 없겠지만 미문이나 명문만으로 이루어졌대도 끔찍하지 않을까요?

흠.

매일 잠자는 딱 네 시간을 제외하면 밤낮으로 일하고, 새벽까지 담배 연기와 흰소리를 한껏 들이마시다 모두 깊이 잠든 시간 귀가해, 샤워기 아래에서 힐 때문에 변형된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인생. 이것이 끝나지 않는 하루처럼, 영원히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떤 기분이 드실 것 같으세요?

대체 지금 몇 년째 뱀파이어로 살고 계신 건가요?

고등학교 나와 첫 취업한 직후니 십 년쯤?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는데 저의 사회적 계급은 점점 떨어지고 있죠.

왜죠?

일본에서는 서른 넘은 미혼 여자를 ‘마케이누’, 싸움에서 패배한 개라 부른대요. 전 영원한 독신녀로 살 수밖에 없으니 이 사회에서도 언터처블이 되고 있죠.

동안으로 유혹해 남편 되실 분을 확 물어버리는 건. 농담입니다.

고통은 분담하는 게 아니잖아요.

네네. 사회에서 통용되는 나이는 소위 결혼 적령기시니 회사에서 좀 뭐라고들 하나요?

그러려니 하죠. 제가 인본주의적이라 했잖아요. 어느 남자가 식탁에 앉아 음식을 쳐다보고만 있고, 어둠 속에 함께 누우면 자기 턱 밑에서 충동을 이기려고 몸을 떨면서 이를 딱딱 부딪치는 여자랑 살고 싶겠어요? 저라도 같이 못 살죠.

혹시 생일을 기억하세요? 생일 파티 같은 건 안 하시죠?

그럴 이유가 없죠. 직장에서 종종 서로 물어들 보니 이력서에 적힌 나이만 외우고 있죠.

약간 쓸쓸하긴 하네요.

생일이 왜 그리 이벤트인지 이렇게 되기 전부터 몰랐어요, 전.

삶이란 자신의 나이대에 따라 이뤄낸 인생의 과제들로 결정되니까요. 대학 나와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시집 장가 보내는 계단들을 차곡차곡 밟으며, 아 내가 어느새 이리 나이를 먹었지만 참 많은 일을 했구나, 뿌듯해 하는 걸로 생을 마치는 거죠.

그렇겠죠. 그래도 전 삶이 끝날 때까지 그냥 싱글 노동자, 그러네요.

아까부터 윤희님은 자신의 가장 큰 정체성을 ‘노동자’로 정의하시는 것 같네요?

‘뱀파이어’여야만 하나요?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글쎄요. 밥 대신 피를 먹고, 잠을 거의 안 자고, 미래를 기약하는 연애를 할 수 없는 건 모두 제게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중요하지도, 결정적이지도 않은 문제라고요?

고기만 먹거나 반대로 풀만 먹거나, 혼전순결을 지키거나, 결혼하고도 어플로 혼외 파트너를 찾는 사람들은 많고 많아요. 이것들은 모두 삶의 방식의 일부죠. 제 말은 그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누구랑 자는지가, 삶에서 결정적인 문제나 정체성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정말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 사회가, 세상이 궁금해하는 건, 그 사람의 직업과 버는 돈이 얼마인지잖아요. 그리고 제게 그 모든 것들보다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건, 내 몸 하나를 내 힘만으로 끌고 가는 거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지만.

좀 속상했던 건 있어요. 불쑥, 저도 디저트 카페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동료들처럼 에스엔에스에 한번은 올리고 싶더라고요. 눈물 생산도 안 되는데 훌쩍대는 척해보다 머쓱해졌어요. 전 사람이었을 때 깨 뿌린 음식을 참 싫어했는데요, 그날 제가 한 행동은 마치 겉절이나 낙지볶음 위에 인심 좋은 척 뿌린 깨 같은 짓이었어요.

쓸모없는, 어떤 잉여적인 것이었다는 말씀이죠? 참 현실 인식이 빠르고 냉철하신 여성분이십니다. 많이 배우네요, 오늘.

아이고. 유명 앵커를 거쳐 방송국 보도국장도 모자라, 정계 진출도 노리고 계신다는 사회자님께 칭찬을 들으니 제가 부끄럽습니다.

정치 얘기는 소문일 뿐입니다, 하하. 광고 듣고 오시죠.



“국장님. 고생하셨어요. 얼른 아이스 아메리카노 가져와.”

“유독 힘드네 오늘, 휴. 저 인간, 아니 저 물건은 누가, 어떤 연유로 섭외한 거야?”

“직접 고르셨잖아요.”

“내가?”

“지난달 회의 끝나고 이차 때 호프집서 말씀하신 껀이잖아요. 혼자 동여의도 쪽에서 술 드시다 깜 하나 건지셨다고요. 사실 저희끼리는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워낙 국장님이 강력하게 추진하셔서….”

“…전혀 기억에 없어. 아무튼, 그래 뭐 이미 생방 사분의 삼이 흘러간 걸 어쩌겠어. 청취자들 반응은?”

“솔직히 항의가 더 많죠. 명색이 전영민 앵커의 방송에 무슨 맛이 간 여자를 앉혀놨냐고.”

“쟤가 피를 빠는 걸 시연해 보일 수도 없고. 근데 나 안전한 건 맞지? 무슨 일 터지면 밖에서 방음문 붙잡고 안 열어주는 거 아니겠지?”

“오늘은 밤일 못 하니 일찍 ‘식사’ 마치고 왔대요. 사전 인터뷰했을 때는 옆에서 보신 모습보다도 차분하고 참하던걸요.”

“원래 또라이들이 더 젠틀한 거 몰라? 대체 왜 저 친구를 들이밀었는진 기억 안 나지만 자충수를 뒀군. 실은 난감한데, 이야기 튀면 알아서 스케치북에 써서 들어줘.”

“넵. 중간뉴스 십초 뒤에 끝나요. 스탠바이 하세요.”




자, 이제 가장 중요한 걸 여쭤볼게요. 이 코너의 모든 초대 손님께 여쭤보는 질문이죠. 윤희님, 당신의 꿈은 뭔가요?

꿈이요?

아까 꿈은 그냥 살아남는 거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그럼 미래, 라고 할까요?

저에게 미래는 없는 단어와 같아요.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라도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었던 과거는 꿈처럼 진짜였는지 믿을 수 없고, 현재는 아무 변화도, 노화도 없으니 몇 개의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는 느낌이라.

그렇다 해도 남들보다 긴 인생이니 이뤄 보고픈 것이 있지 않을까요? 체력과 내구성을 활용해 세계 일주를 하거나 운동선수가 될 수도 있고요, 하하.

음, 완벽한 노동자요. 그건 미래도, 꿈도 될 수 있겠네요.

흠?

지치지 않고, 노화하지 않고, 밥 챙겨 먹는다고 자리도 비우지 않고… 어쩌면 저 자신을 로봇보다 친근하면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그런 완벽한 노동자로 셀링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네. 자, 어느덧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겼네요. 자화자찬은 그렇지만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는 전직 앵커인 저로서도 오늘처럼 이끌어가기 힘들었던 방송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오늘 방송은 납량특집이 되길 바라셨겠죠?

솔직히 전 기억이 안 납니다만 밖에 있는 작가들이 사실 우리가 구면이라는데, 맞나요?

사적인 공간에서 뵌 적이 있죠. 제가 일하는 바 말이에요.

요즘 이래저래 술 마실 일이 많아 소위 필름이 끊기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무슨 말로 윤희님을 방송에 출연해 달라고 설득했나요, 제가?

설득하지 않았고, 다만 저를 이곳으로 이끄셨어요.

음?

정오에 몸 앞면과 얼굴에 가장 밝은 빛이 쏟아질 때, 몸 뒤쪽은 진한 그림자에 잠기잖아요. 저는 사회자님, 우리 전영민 앵커님 같은 분의 그림자 같은 존재에요. 그래서 제가 여기에 왔어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아무튼 남은 시간 동안 기억이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많은 청취자분이 궁금해하셨고 개인적으로도 가장 묻고 싶던 질문, 윤희님이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셨는지 화룡점정으로 이제야 여쭤봅니다. 위험한 답이 나올 수 있어 고민했지만, 그냥 던져보죠.

오수란 디제이, 아시죠?

네?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물론 압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몇 해 전 한 방송대상 라디오 디제이 부문에 나란히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죠. 다들 아시다시피 골든 마스크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기 디제이였는데, 돌연 방송을 펑크 낸 후 이제껏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죠. 근데 왜 갑자기 그분 얘기를?

광우병 파동. 그때 광우병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건, 소에게 소를 먹여 소의 뇌에 생긴 프리온이란 변성 단백질이었죠.

오수란씨와 광우병이 무슨 상관인가요?

광우병 파동은 이 나라에서 일어나 온 대부분의 정치, 사회적 움직임이 그렇듯이 곧 잠잠해졌잖아요.

처음부터 근거 희박하고, 사회적 분열을 도모하는 무리의 일방적 주장이었으니까요.

그 위험을 처음 보도한 시사 프로그램에는 철퇴가 가해졌고, 미국산 소고기는 값싼 고기 뷔페를 시작으로 무리 없이 수입됐으며, 이제 전국의 직장인용 백반집 들은 미국산 소고기를 식탁에 올리고요.

그렇죠. 저도 미국 소고기 거리낌 없이 먹습니다.

광우병이란 말이 서서히 잊혀질 때쯤, 앵커님과 경쟁 구도에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 디제이 오수란 씨는 클로징 멘트로 이런 말을 했어요.

<재미있는 사연을 하나 받았는데요. 미친 소를 먹어 뇌가 프리온에 먹히면, 다른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괴물이 될 확률도 있다? 에헤이, 여기 대한민국이에요. 뱀파이어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가 밥 먹고 하품 한 번만 하면 질식사할걸요? 자자, 요즘 대한민국의 기강을 흔들려도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어떤 국가에 위해를 가하려는 정치적 음모가 아닐지, 조국을 사랑하는 전 참 심려가 깊어요. 특히 젊은 분들! 밥 먹고 할 짓 없이 인터넷에 이상한 음모론들이나 퍼뜨리지 말고, 뱀파이어 퇴치용으로 오늘 점심은 김치찌개 먹읍시다, 으아! 김치찌개 너- 무 좋아!>

다음날 십삼 년간 지각 한번 하지 않은 오수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방송에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연락두절 됐지요.

정확히 일주일 뒤, 남산공원 구석에서 얼굴 피부와 열 손가락 끝마디가 뜯겨나가고, 체내에 피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바람 빠져 쪼글대는 물풍선 같은 변사체가 발견됐어요. 그리고 오수란 씨는 그가 그렇게 방송을 펑크 낸 날부터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죠.

…윤희님, 지금 이건 생방송임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임질 수 있는 말씀을 하세요.

그냥 오다가다 들은 풍문이에요. 앵커님의 정계 진출설 같은 소문이죠, 뭐. 남산공원의 그 시체는 신원을 알 수 있는 표지도, 몸속 피 한 방울도 없어 무연고 노숙자들의 시신과 같은 절차를 거쳐 처리됐다고 해요. 오수란 디제이님도 앵커님 못지않게 훌륭한 방송인이셨는데, 언젠가는 돌아오시면 좋겠네요.

…윤희님은 본인이 광우병 때문에 뱀파이어가 되셨다, 뭐 그런 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저는 주장하지 않아요. 적응할 뿐이에요. 진실보다는 현실과 대처가 중요하잖아요.

광우병과 뱀파이어로의 변신을 연결 짓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제까지 많은 회사들을 거쳤어요. 첫 회사 사장님은 회식 때 본인만 한우 먹으면서 직원들은 미국산 소고기 시켜주고, 회삿돈으로 먹는 음식은 한 숟갈도 남기지 말라고 협박하던 분이었죠. 갓 스물이었던 전 배가 빵빵히 부풀어 오를 정도로 미국산 소고기를 끌어다 넣었어요. 회식 다음 날 회사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눈알이 노래질 때까지 토한 뒤 응급실에 실려 갔죠. 모르겠어요, 그 일을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다반사로 받아들여야 했을까요? 며칠 뒤 제가 출근했을 때 사장님은 책상에 엎드려 계셨죠. 믹스커피를 타가서 “사장님.”하고 어깨를 살짝 흔들었더니, 글쎄 사장님이 의자 밑으로 쿠당탕 굴러떨어지시는 거에요. 깊이 잠들어 계시던 사장님의 두툼하고 반질반질한 목덜미에는 이상한 구멍 같은 게 뚫려 있어서, 처음에는 타살로 보도됐지만 결국 의문사로 남았습니다.

…그 사장님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처음 알게 해준 분?

아뇨. 사장님의 피를 요구르트병에 빨대 꽂아 먹듯 정수리 끝까지 쪽, 빨아 마신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걸요. 그분은 좀 무섭긴 했지만, 회사 경비를 절감하고 세금을 최대한 적게 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영세 기업인이기도 했어요. 그건 존경스러운 거예요.오십 대인 남자 영업부장님의 뺨과 고등학교 갓 졸업한 경리 여직원의 엉덩이를 수시로 두드려대고, 월급은 두 달씩 미루면서 골프 회원권은 매번 갱신하고, 맥심 믹스커피와 복음자리 대추차를 한 번 먹을 때마다 탕비실에 놓아둔 장부에 적으라고는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비닐봉지에 넣어서 파는 칵테일처럼 누군가에게 피를 쪽쪽 빨려 죽을 이유는 못 되잖아요.

…….

그리고 살아생전 사장님은 삼십 분에 한 번꼴로 “콱 죽어버려야지!”와 “확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답니다. 죽거나 죽이기를 바라 마지않던 분이라, 어찌보면 소망을 이루신 거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주말엔 오랜만에 납골당 가서 꽃이라도 놓아드려야겠어요.

본인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좋습니까?

어떨 것 같으세요?

처음엔 불로장생을 누린다는 점이 근사해 보였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비극인 것 같군요.

왜일까요?

가족도 못 만드는, 영원히 돈 벌며 혼자 살아야 하는 독신, 일반인처럼 출출하면 눈에 띄는 음식점 들어가 간단히 한 끼 해결할 수도 없어, 또 이제껏 대화를 나눠본 인상으로는 우리 모두가 합의한 생명과 삶의 가치를 경시하는 것 같으니까.

응… 근데 전 뭐 그렁저렁 만족해요.

어떤 점에서?

뱀파이어가 된 후 비로소 인간화됐어요. 제가 생각하는 인간화는 사회화에요. 훈련된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의 아이를 말과 상식이 통하는 존재로 길러내는 것이 사회화죠. ‘사람’이었을 때 난 일명 왕따였어요. 학교 성적도, 외모도 어느 하나 특출난 게 없었고, 생활보호대상자를 간신히 벗어난 정도였어요. 타고난 성정도 둔하고 주눅이 잘 들었어요. 살기 위해 모욕적인 농담들에 어색한 미소로 대응하고, 괜찮지 않았던 일들을 괜찮다고 얼버무리며 살았었어요,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는.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입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제게 비밀을 털어놓는 동료들도 꽤 있어요. 사람일 때는 사람이 싫었어요. 사람이 아닌 지금은, 사람들이 가끔 가엾고 사랑스럽기까지 해요. 성숙이고 발전이죠.

마음만 먹으면 딴 사람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은밀한 우월감 때문에?

그것보다는 그 원초적 욕망을 수시로 참으며, 돈 벌기 위해 매일 낮밤으로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사람들과 부대껴야만 하기 때문일 거예요. 욕망을 숨기고 참는 것도 사회화의 일종이잖아요. 물론 사회화 안 된 원숭이처럼 무례한 분들은 후미진 곳에 유인해 목덜미를 확, 웃자고 하는 말이에요. 그나저나 사회자님 아까보다 좀 창백해 보이세요.

아니오, 그냥 윤희님의 목에서 빛나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 방송을 이끌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죠, 하하.

전 십자가 좋아해요. 디자인이 비례와 균형이 있잖아요. 자주는 아니지만 교회도 가요. 아, 왜 파리해 보이시는지 알겠다. 앵커님 와이셔츠 단추를 너무 턱 아래까지 단단히 채우셨네요.

아까 보니 목에 뭐가 나서요. 간밤에 모기에 물렸나.

네, 모기일 거예요.

교회는 어둠침침하고, 술 담배 안 하는 분들이 많아 윤희님에게 좋은 곳일 테죠?

일요일에는 바가 문을 닫으니 식사 해결하기 힘들거든요. 성경 말씀에도 목마른 자 우물을 파라, 하지만 정말 아주 가끔이에요. 또 한 주를 살아내려는 절절한 기도로 젖은 눈동자들을 보면 제가 어찌…. 참, 다음 주가 청년부 수련회네요. 장소가 인적 드문 계곡일 때가 좋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방송 처음 앵커님이 말씀하셨듯 전 그냥 평범한 사회인이라고요.

글쎄요, 어떤 청취자분의 표현처럼 누군가는 ‘괴물’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견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심지어 말하셔도 돼요. 저는 의무를 다하며, 더 이상 타인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일터들에서 예의 발라요. 괴물일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기능하고 있어요. 낮에는 엄정한 직무를 처리하는 단정한 여직원, 밤에는 농밀한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친구. 이건 사회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여자 상과도 비슷하지 않아요?

어느덧 마칠 시간입니다. 오늘 방송 어떠셨나요?

재밌었어요.

오늘 방송 때문에 바 일급은 못 받으시게 되셨네요. 대신 출연료로 충당해 주세요, 큰돈은 아닙니다만.

참, 제 출연료는 아동보호단체, 독거노인 지원 단체, 동물보호협회 중 알아서 전액 기부해 주시기 부탁드려요. 일이 주면 완치될 정도지만, 아무튼 시민들에게 상해를 입혀 양식을 조달하는 것을 정말 전 늘 진심으로 죄송스레 여긴답니다. 이 사회가 낳았고 사회가 지탱해주는 존재인 저는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앞으로 저의 빚을 갚을 방법을 고민해 보겠어요. 섭외를 받고 많이 망설였지만, 오늘 이렇게 나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것도 그런 의지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주시기를.

그래요, 모쪼록 행운을 빕니다. 청취자 여러분께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전 오늘도 여러분 옆을 여러 번 스쳐 간, 지극히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입니다. 혹시 이상한 기분이 드신대도 피하거나 도망칠 필요 없어요. 진심으로 저 자신과 이 방송을 들으신 모든 분이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원해요. 어떤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니까요.

네, 마지막까지 좋은 말씀 해주신 오늘의 특별한 게스트 분,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는 내일 이 시간 다시…

아! 아악, 으악!

뚜.

뚜.

뚜.

뚜-

“94.2 메가헤르츠 에이엠, 잘 수 없거나 잠들지 못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 잠시 방송 상태 고르지 못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스튜디오 전체가… 정전이 됐었어요.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정신이 좀 없긴 한데요. 아무튼 내일 이 시간, 진짜로 전 다시 찾아옵니다. 이깟 마이크질 인지도 높여 공천받으려고 하는 거지 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헛소리하는 건 다 무슨 뱀파이어네 뭐네 개소리 지껄이고 간 오늘의 게스트 여자 때문이에요. 어딨어, 이거? 미친년이 진짜, 아우 시발. 방송 끊어. 끊으라고! 잠깐, 사랑하는 우리 청취자님들, 예비 유권자님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꼭 다시 봬요. 꼭이요?




저자 소개



최은



소설을 쓰는 직장 여성.

첫 소설이 올해 나온다 하지만, 출간 제안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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