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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마도 악마가




1.


문을 열고 나서니 죽은 새가 놓여있다.

정반대로 뒤틀린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새의 모습에선 그 어떤 죽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일어나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목을 비틀어 죽였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혈흔이 묻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가 죄책감 혹은 미숙함에 목을 여러 번 뒤틀어야만 했다면 흔적이 반드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의 목은 여러 번 비틀어 구부정한 부분 하나 없이 곧게 돌아가 있다. 날개 부위에 깃털이 과도하게 빠진 흔적도 없다. 발톱에도 살점이나 핏자국이 맺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새는 괴로움에 푸드덕거리거나 자신을 해하려는 자를 향해 공격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새의 사체가 놓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과 바닥은 평소와 다름없다. 새가 머리를 부딪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새를 죽인 자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의 목을 한 번에 비틀어 죽였다. 어린아이가 찰흙을 두 덩이로 나누는 것처럼, 그 행위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으리라. 그 과정에서 새는 피를 짧게 토해냈을 것이다. 여러 영화 속 잔혹한 묘사와 달리,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건강한 생명체가 갑작스레 찾아온 최후의 순간에 내뱉는 피는 그다지 검붉거나 양이 많지 않다. 범인은 새를 비틀어 죽인 후, 짧게 흐른 피를 물티슈로 닦고 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그것도 문을 여는 순간 볼 수 있는 곳에. 아무리 주위를 살피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곳에, 그리고 하루의 시작을 망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위치에.

처음엔 당연히 비둘기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전혀 다른 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비둘기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작다. 부리가 뭉툭하고 머리 부분이 짙은 회색빛을 띠는 비둘기와는 달리, 죽은 새는 부리가 훨씬 더 길고 날카롭다. 머리에 난 털의 모양도 다르다. 둥그스름하게 납작한 비둘기의 두상과 달리 이 새는 잔뜩 겁을 먹고 움츠린 고슴도치처럼 털이 솟아있다. 아는 새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검색창에 찾아본다. 구관조, 참새, 직박구리... 직박구리?

스마트폰을 꺼내 직박구리를 검색하자 직박구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직박구리는 참새목 직박구리과의 한 종으로,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이다. 몸길이는 28cm 정도이다. 몸은 대체로 갈색을 띠며 약간 회색이 섞여 있다. 뺨에 갈색 반점이 있고, 배에 무늬가 있다.” 검색 결과를 읽다가 사체를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그제야 회색빛 얼굴 사이에 볼 부위만 갈색으로 물든 것이 눈에 띈다. 마치 다른 갈색 새의 뺨을 도려내 이어 붙인 것 같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다. 위키백과의 설명에서 말하는 배의 무늬가 어떤 무늬를 말하는 것인지 몰라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창으로 넘긴다. 화면을 가득 메운 직박구리의 모습과 비교해보았을 때에는 앞에 놓인 사체가 더 커 보이지만, 외형은 동일하다. 갈색 뺨, 날카롭게 난 머리털, 길게 뻗은 부리와 배에 난 흰 점박이 무늬.

스크롤을 내리며 여러 이미지를 보다가 집단 폐사한 직박구리 사체들이 찍힌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을 누르자 기사 하나가 뜬다. 경남 창원시 성산구의 한 농원 인근에서 직박구리 119마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2018년의 한 기사다. 해당 사체들을 조사해보니 위와 간에서 나온 볍씨에서 치사량이 넘는 포스파미돈이라는 농약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농약으로 범벅이 된 볍씨를 뿌리고, 직박구리 떼가 이를 먹고 죽은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는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공포로 인해 누군가가 멀쩡한 새들까지 죽인 것으로 추측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하필 죽은 직박구리가 안전신고번호인 119와 동일한 119마리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죽음으로 낸 것일까. 사진 속 열을 맞춰 찍혀진 직박구리 사체 중 하나를 확대하니 고개만 돌아가지 않았을 뿐, 눈앞에 놓인 사체와 가장 흡사해 보인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위생장갑을 찾아 손에 끼곤 새의 사체를 움켜쥔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커 보였는데 막상 들어보니 한 손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는 크기다. 뻣뻣하게 굳은 사체에선 일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새를 보다 자세히 살펴본다. 얼굴과 가깝게 들었음에도 새에게선 그 어떤 부패하는 냄새도 나지 않는다. 돌아간 머리를 다시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다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일반 쓰레기봉투를 꺼내려다 문득 이것이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든다. 내가 알고 있는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개가 먹을 수 있다면 음식물 쓰레기, 먹을 수 없다면 일반 쓰레기. 자두는 음식물 쓰레기, 하지만 단단한 씨는 개가 씹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한다. 그럼 과연 개는 이 직박구리 사체를 먹을 수 있을까. 깃털도 뽑지 않은 사체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개의 모습이 머릿속으로는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만 같았다. 깃털이나 딱딱한 부리와 다리, 내장 같은 부위는 먹지 못해도 적어도 고깃덩이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어떤 부위는 음식물 쓰레기로 가야하고, 어떤 부위는 일반 쓰레기로 나눠 버려야 할 것이다. 새의 고기, 내장, 눈알은 음식물 쓰레기로. 깃털, 부리, 발톱은 일반 쓰레기로. 하지만 나는 사체를 분리할 수 없이 통으로 버려야한다. 먹을 수 있는 부위가 먹을 수 없는 부위보다 많다면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꺼내 사체를 넣자 죽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봉투 입구를 번갈아 묶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한 남자가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한 채로 서 있다. 인기척이 느껴진 탓인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물끄러미 나를 힐끗 쳐다본다. 얼굴을 보니 며칠 전 보았던 2004호, 바로 옆집에 사는 그 남자다.

내 얼굴을 힐끔 확인한 남자는 금방 시선을 내리더니, 내 손에 들린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혹시 냄새가 나는 것일까. 어딘가 집요한 남자의 시선이 느껴지자 갑작스럽게 역겨운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 같다. 그럴 리 없다. 아깐 맡지 못했던 냄새가 인제야 날 리 없다. 사체를 집어 들었을 때 깃털의 촉감이 아직 매끈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새는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경고 혹은 증오. 어떤 의미로든 직박구리 사체를 문 앞에 두었다면 오래전에 죽인 것을 인제야 가져다 둘리가 없다. 아무리 오래 되어봤자 일주일은 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냄새는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현재 새는 잘 밀봉된 상태다.

하지만 그제야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은 새의 사체가 비춰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어떤 냄새가 나서 쳐다본 것이 아니었다. 봉투에 담긴 새의 사체를 본 것이다.

당혹감에 봉투를 얼른 뒤로 감추자 그제야 남자는 시선을 거둔다. 손을 감추며 발생한 비닐 표면의 파생음이 잦아들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문득 기시감이 들어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등을 바라본다. 엘리베이터는 32층에 멈춰 있고 버튼마저 눌려 있지 않다. 그 순간, 그가 이 죽은 새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를 의식하며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자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 언제부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사체를 처음 발견하고 복도를 걸어올 때까지 옆집의 문이 열리거나, 누군가가 나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자는 내가 새를 발견하기 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사체를 발견하고 이곳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마도 오분에서 십 분. 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남자는 버튼을 누르지도 않은 채, 오지도 않은 엘리베이터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다시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순간 어떤 의도한 실험 환경에 갇힌 흰 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 지도, 실험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투명한 유리 감옥에 갇혀 붉은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알비노 래트.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를 지켜보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오른쪽 구석에 자리 잡은 그를 피해 버튼 패드가 있는 왼편 구석으로 들어간다. 1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그는 가만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왜 죽은 새가 봉투에 담겨 있는지 묻기 위해 말을 걸려고 하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봉투 안에 새의 사체가 담긴 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혹시 사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남자는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남자는 봉투에 담긴 죽음의 형체를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남자가 먼저 길을 나선다. 그가 오피스텔 출입구로 향하는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나는 반대 방향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향한다. 분리수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벽면 표지판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분리수거를 하지 않으면 벌금이 있다는 경고가 쓰여 있지만, 이곳에 이사 온 이래로 한 번도 쓰레기장이 분리수거가 되어 깔끔해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먹다 남은 치킨이 상자와 함께 버려져 있거나, 음식물이 가득 찬 플라스틱 통이 대충 비닐로 포장되어 일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걸 보는 건 예삿일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통에 봉투를 던진다. 툭. 죽은 새는 이제 버려진 음식물 사이에 섞여 서서히 썩을 것이다.


2.


분리수거장을 나서면서도 남자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그간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를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때도 그는 어딘가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적대적이었다.

의도를 알아야 한다. 알아내야 한다.

남자는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서둘러 정문으로 나서자 저 먼발치 횡단보도 앞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곧 신호등이 바뀌고 남자가 길을 건넌다. 빠르지 않지만 경쾌한 발걸음이다. 남자의 키는 작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입을 모아 크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176에서 178 사이. 살집이 있진 않지만, 어깨가 좁지 않고 옷 위로 드러난 뼈대가 굵어 특별히 마르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운동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니라 타고난 체형이 좋을 것이다. 오랜 운동으로 몸을 키운 사람 특유의 둔탁해 보이는 느낌은 없다. 나이는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그가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한껏 광을 낸 구두가 아닌, 여러 번 신어 길이 잘든 구두다. 구두를 신은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학생이나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은 아닐 것이다. 서른에서 서른다섯.

남자는 걸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보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만 바라보고 걸을 뿐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연스럽게 팔을 거닐며. 걸음에서 느껴지는 경쾌함은 어쩌면 앞만 바라보고 걷는 그의 명확한 시선이 자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명확한 시선. 그것은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도 가장 두드러졌던 특징이다.

정말 무딘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타인의 시선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우린 타인을 그다지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긴 시간 동안 지켜본다면 본능적으로 기시감이 들기 마련이다. 작업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걸어오던 그때가 그랬다. 주변을 살피니 주차장 입구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를 쳐다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담배를 피는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가 모르는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의 눈빛이 그랬다. 그 눈빛엔 내가 아는 얼굴이 맞는지 긴가민가 해하는 의아함과 그렇다면 곧바로 반가운 척을 할 수 있게 준비된 서글서글함 따윈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냉정했고, 어떤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적대적이었다.

물론 이는 모두 순전히 논리가 결여된 감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적대적인 타인을 감지할 수 있는 ‘감’이란 그의 기세, 눈빛, 표정이나 제스처를 읽고 종의 생존 본능이 내리는 무척이나 논리적인 판단이다. 수천 년의 경험이 압축된 인류의 DNA가 내린 논리적인 판단은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을 보인다. 그 순간의 내 생존 본능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저 남자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그가 담배를 다 태우는 순간 나를 붙잡아 세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빠르게 지나쳐 오피스텔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담배를 다 피운 것인지 그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담배 잔향이 코를 타고 넘어왔다.

그가 내게 말을 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나를 지나쳐 먼저 들어서 구석에 자리를 잡을 뿐이었다. 그를 따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들어서선 층수를 눌렀다. 20층. 그가 몇 층으로 향하는지 궁금해 버튼 패드를 계속해서 쳐다보았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남자는 버튼을 누르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20층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20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먼저 나선건 그가 아닌 나였다.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2001호에서 2008호가, 오른편에는 2009호부터 2016호가 있다. 내심 그가 오른편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몸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그런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남자는 나를 뒤따라 복도를 걸었다. 걸음의 속도를 올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더 빠르게 복도의 끝까지 걸었지만, 그는 그때까지 내 뒤를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내가 사는 2005호는 복도 끝 오른편에 2004호를 마주하고 있다. 2004호는 내가 사는 2005호와 옆집이면서도 앞집인 셈이다. 그가 2004호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복도 끝까지 걸어 들어가 내가 2005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를 때였다. 비밀번호를 다 누르고 문을 열자 곧이어 등 뒤에서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득 내가 그를 괜히 오해한 것이 아닐까 싶어 뒤를 돌아봐 그를 확인해보았다. 그때 열린 문손잡이를 잡고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동자가 작아 사방으로 흰자가 많이 보인, 옆으로 길게 쭉 뻗은 눈. 그는 얼굴을 돌리지도,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나였다. 나는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벽면에 달아둔 시계에서 뻐꾸기가 튀어나오며 밤 9시를 알렸다.

남자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버스를 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버스를 함께 탄다면 그의 시선 안에 내가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남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일은 다음으로 기약해야 했을 것이다.

출근 시간을 넘었기 때문일까. 지하철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혹여나 모습을 보일까 바로 내려가지 않고 계단에 잠깐 멈추어 선다. 여기서 지하철이 오기 직전까지 기다리다 바로 타면 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전광판을 확인하니 바로 전역에서 출발했다는 문구가 뜬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자 뒤에서 한 무리가 소란스럽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화려한 원색의 등산복을 입고 거대한 배낭을 멘 중년 남성 무리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있다. 그중 마지막으로 달려오던 푸른 옷을 입고 등산 스틱을 양손에 쥔 한 남성이 나와 어깨를 부딪친다. 남자는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잠깐 휘청이는 듯하더니 바로 균형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든 등산 스틱의 끝이 내 눈앞을 스친다. 다행히 어깨를 부딪치며 벽 쪽으로 붙어 눈이 찔리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와 함께 방금 도착한 지하철을 탄다.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그 모습에 불쾌감이 치밀어 솟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소란을 벌일 수 없기에 나 역시 지하철로 들어간다.

중년 남성 등산객 무리가 껄껄 웃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그들을 피해 칸과 칸 사이에 위치한 열차의 유리문 쪽으로 들어가 옆집 남자를 찾는다. 먼발치에서 그가 서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빈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가 굳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멀리 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엄지를 계속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 같지는 않다. 기사를 읽거나 SNS 피드에 올라오는 글을 확인하는 것에 더 가깝다.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칠 동안 남자는 한참이나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다. 내가 그의 동선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그렇다.

짧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넓게 드러난 그의 이마가 눈에 띈다. 어쩌면 그가 인생의 어느 순간 동안에는 그런 자신의 넓은 이마를 콤플렉스로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그건 지금처럼 두발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청소년기의 일 것이다. 특히 규율이 엄격한 학교를 다녔다면 머리를 짧게 잘라야만 한다는 선생의 폭력적인 요구로 인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을 매일 잃었을 것이다. 애써 짧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이마가 좁은 친구들을 남몰래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어쩔 땐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자신의 이마로 향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교에 들어서는 긴 앞머리를 고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가 어찌 되었든 현재 그는 자신의 이마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의 자신감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여 체득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에 빠져있던 남자가 안내 방송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를 피해 순간적으로 몸을 숨긴다. 수상한 내 행동에 등산객 무리 중 한 명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지하철이 멈추고 남자가 내린다. 그가 내가 있는 곳과 반대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문이 닫히기 직전 그를 따라 내린다.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걷는다. 그를 향해 전방을 주시한 채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남자는 역사를 나오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인도 중심에 비둘기 떼가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총 여섯 마리의 비둘기가 길가의 무언가를 정신없이 쪼고 있다. 누군가의 토사물이거나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의 일부인 것 같다. 무리 중 까마귀라고 착각할 정도로 온몸이 새까만 녀석이 눈에 띈다. 유난히 덩치가 큰 그 녀석은 다른 비둘기가 쪼는 것을 의도적으로 뺏어 먹고 방해하는 것 같다.

길의 한 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은 비둘기 무리 탓에 앞서 걷던 몇 사람들은 잠시 망설이다 차도 쪽으로 살짝 벗어나 피해간다. 비둘기 무리는 그런 사람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바닥을 쪼고 있다. 녀석들은 길에서 벗어날 생각이 아예 없는듯하다.

남자가 비둘기 무리와 점차 가까워진다. 녀석들은 여전히 날아갈 미동조차 하지 않고 바닥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때 남자가 발을 크게 구르며 무리에 위협을 가한다. 서너 마리의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자리를 만든다. 그 틈을 타 남자가 무리 한 가운데로 걸어가자, 그제야 녀석들이 날아간다. 새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실로 대범한 행동이다. 비둘기 무리는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옆 분식집 가게 간판에 단체로 쪼르르 자리를 잡는다. 남자가 지나가자 간판 위에서 눈치를 보던 무리 중 새까만 녀석이 먼저 도보 한 가운데로 내려온다. 그러자 뒤이어 다들 우르르 몰려 내려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을 쪼기 시작한다.

남자는 조금 더 걸어가더니 한 고층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훤히 보인다. 건물의 입구는 회전문으로 되어있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게이트 앞에는 건물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데스크에 있다. 꽤 널찍한 건물 로비에 몇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있다.

지하철을 들어가듯 남자가 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을 가져다 대니 게이트가 열린다.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매일 하는 것처럼 익숙한 모습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남자가 들어선다.

남자가 떠난 것을 보고 한참을 있다가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한다. 로비 한쪽 벽면에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정원을 그린듯한 그림이 걸려있다. 연분홍색의 장미와 푸른 국화, 붉은 양귀비꽃이 짙은 녹색의 풀들 사이에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다. 멀리서 보니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세 개의 캔버스에 그려진 각각의 그림이 일정 간격을 두고 비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그림을 기점으로 양옆 캔버스의 그림들은 언뜻 보면 동일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꽃이나 풀의 위치가 조금씩 밀려있다. 삼면화 옆에 작은 캡션이 붙어있어 어떤 작품인지 확인해본다. <무제 Untitled> (2018), 루돌프 스팅겔 Rudolf Stingel. 처음 보는 작가의 작품이다. 루돌프 스팅겔을 검색해본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추상 회화부터 설치 예술까지 여러 스타일의 작업을 병행하는 주목받는 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업 중 흰 눈밭에 여러 발자국이 찍힌 풍경을 높은 곳에서 아래로 촬영한 것 같은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새 한 마리가 총총거리며 눈 위를 걸어 다닌 것 같다. 설명에는 눈밭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거대한 흰색 스티로폼 덩어리를 캔버스처럼 세로로 세워 걸어둔 것이라 쓰여있다. 발자국은 그가 락카 칠을 한 신발을 신고 올라가 그 위를 걸어 다니며 화학작용에 의해 스티로폼 표면이 녹아 생긴 흔적이다.

그의 작품을 더 찾아보다가, 나무 속에서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검은 새가 그려진 작품을 발견한다. 자세히 읽어보니 검은 새가 찍힌 오래된 흑백 사진을 확대한 후, 이를 세밀하게 옮겨 그려낸 것이라고 한다. 거칠고 주름진 나무의 표면과 새의 털 표현 방식이 너무나 정밀한 탓에 아무리 보아도 그림이 아니라 사진처럼 보인다. 그림 속 길쭉한 흰 부리를 내민 새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어떤 새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스팅겔의 그림 옆에 층수별로 위치한 회사명이 기재된 안내판이 걸려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건물은 지하 5층부터 지상 17층까지 있다. 지하 5층부터 2층까지는 주차 시설이, 지하 1층에는 식당가로 이루어져 있다. 입주한 상가와 회사의 이름이 쓰인 것을 본다. 금호석유화학, 코리아 세븐, 이스트소프트, 현대해상, 미래에셋, 동양 주식회사, 우리원헬스케어… 이 중에 그가 근무하는 회사가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몇 층으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이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해당 안내문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로비에 놓인 소파에 앉는다.

로비는 붐비지 않지만, 나름 꽤 사람이 끊기지 않고 찾아와 활기차다. 입주민이 출입증을 목에 걸고 왔다 갔다 하거나, 미팅 등의 이유로 찾아온 방문객은 데스크에 무언가를 적고 경비원이 열어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이름과 연락처를 적을 것이다. 혹여나 남자가 금방 내려오지 않을까 기다려본다. 30분가량을 추가로 더 기다렸지만, 그는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보다 기다릴까 싶었지만, 경비원이 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건물을 나와 다시 지하철역 쪽으로 걷는다. 그 사이에 유난히 몸이 까맣고 큰 녀석을 제외하고 다른 비둘기는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아까처럼 길 한 가운데서 더 쪼아 먹을 것을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다. 점차 거리를 좁히자 녀석이 나를 가만히 노려본다. 유난히 햇빛을 받은 녀석의 눈이 붉게 물든 것 같다. 그때 녀석이 날개를 펼치고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온다. 마치 나를 공격이라도 하듯 내 눈높이로 빠르게 날아오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팔로 얼굴을 막고 주저앉는다. 머리 위로 녀석이 퍼덕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일어선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벌써 저만치 날아가 다른 건물 간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의 목을 잡고 비틀어 버리는 상상을 한다. 목이 돌아간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3.


인터넷에서 찾은 설명에 따르면 직박구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텃새이자 매우 흔한 새로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부산까지 넓게 분포하는 새라고 한다. 비둘기나 참새, 까치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직박구리의 생김새를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고 한다. 직박구리를 본 적 있는 사람이 적다기보다는, 자세히 보지 않는 한 다른 새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없다는 점이 직박구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다른 새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외형적 특징이 없다곤 하지만, 직박구리가 얌전히 다른 조류 사회 속에 섞여 평화롭게 지내는 조류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직박구리는 벌레는 물론 이파리나 꽃, 과일 등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먹는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습성 때문에, 직박구리 떼가 과수원이나 텃밭을 황폐화해놓는 것은 부지기수라고 한다. 심지어 무척이나 호전적인 성격을 지녀, 다른 새 무리를 쫓아내는 것은 물론 직박구리 무리 사이에서도 서로를 향해 공격하며 자리다툼을 벌이는 일이 잦다고 한다.

사실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몸집보다 큰 새를 향해서도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길 서슴지 않는 직박구리가 눈에 띄는 외향적 특징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 그다지 각인되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본래 실제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악행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직박구리의 목을 거침없이 비틀어 죽인 자의 난폭한 악마성 역시 외향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일이다.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하철역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묵지근하게 내려앉아 있다. 습기로 인해 옷이 무겁거나 눅진하게 달라붙지는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비가 올 것 같진 않지만 세찬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서둘러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20층으로 올라가 집으로 향한다. 2001호에서 2008호까지는 왼쪽 복도로, 2009호부터 2016호까지는 오른쪽 복도로. 문 앞에서 2004호 남자가 나를 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기쁨이나 슬픔, 혹은 두려움이나 놀람과 같은 그 어떤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은 무표정으로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던 남자의 얼굴. 손잡이를 쥔 채로 가만히 서서 나를 감시하던 그 눈. 그를 더욱 정확히 알기 위해선 그의 실제 생활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굳게 닫힌 2004호 문손잡이 옆 키패드가 눈에 띈다. 내 집과 같은 모양새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피스텔에서 제공하는 기본 잠금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밀번호는 네 자리 숫자일 것이다.

어떤 비밀번호를 사용할까. 생일? 이 집에 이사 온 날의 날짜? 혹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비밀번호일지도 모른다. 0000이나 1234처럼 연속된 숫자이거나, 1478이나 2580처럼 기억하기 쉬운 직선의 형태를 띠고 있는 숫자 네 자리. 하지만 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정보를 현재는 알고 있지 않다. 그저 0000이나 2580과 같이 생각나는 몇 개의 번호 중에 맞는 번호가 있기를 바라야 할 뿐이다. 이 문을 열기 위해 몇 번의 비밀번호를 시도해야만 할까. 0부터 9까지 총 10개의 숫자와 중복 등을 허용한다면 총 1만 개. 이론상 만 번의 시도를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터이다. 아쉬운 마음에 2004호의 문손잡이를 내려본다. 철컥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들린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2004호 남자는 생각보다 부주의한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부주의함은 남성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니까. 내 집과 같은 잠금장치라면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잡이를 위로 들어야 잠기게 되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때문에 문 잠그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외출이 끝나고 돌아와서야 알게 된 적이 있다. 2004호 남자에겐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고 나온 날. 한 번쯤은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벌어진 날.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이 모든 것이 남자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속에서 문을 열어둔 것이라면. 내가 자신의 집 문을 열어보리라 예측하고 잠그지 않은 것이라면. 문을 열고 들어선 내가 무언가를 보게끔 원한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자 2004호 문손잡이를 잡고 나를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들어와, 들어와. 말을 걸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내게 신호를 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허무하게 열린 2004호의 문을 내부의 인기척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열어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소리를 들어본다. 적막만이 자욱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안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하며 문을 보다 열어 안을 확인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블라인드를 치지 않아 바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이다. 한쪽 벽면이 모조리 창문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2004호 역시 2005호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더 넓은 방도 있었지만, 내가 굳이 복도 끝에 위치한 2005호를 고른 것은 창이 넓게 나 있어 채광이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전상의 문제로 창을 활짝 열 수는 없지만, 그간 반지하에 오래 있던 나로서는 밖이 시원하게 보이는 광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탁 트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쏟아지는 햇빛으로 인해 불을 켜지 않아도 집 안 구석구석이 밝게 보인다. 아무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선다. 운동화 두 켤레와 슬리퍼 한 켤레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 옆에 신발을 벗어두고 집안을 천천히 살핀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바로 오른편에 또 다른 문이 있다. 문 앞에 누르스름하게 변한 규조토가 놓인 것으로 보아 화장실이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샤워 부스가 있다. 세면대 위에는 칫솔 하나가 꽂혀있는 컵과 핸드워시가 놓여있다. 거울로 된 서랍장은 오랫동안 닦지 않은 것 같다. 물 자국이 기포처럼 선명하게 있고 구석 모서리에는 검은 곰팡이가 피어있다. 미닫이 형태로 된 서랍장을 열자 위 칸에는 수건이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칫솔과 치약, 면도날, 휴지와 담뱃갑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화장실의 맞은편은 주방이다. 설거지 거리가 있거나 프라이팬이 나와 있진 않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과 맥주, 홍삼과 같은 영양제만 가득한 것으로 보아 음식을 해 먹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전자레인지 위로 책상 달력과 LED 시계가 놓여있다. 12시 46분. 아마도 남자는 지금쯤 점심을 먹고 있으리라.

주방 옆에는 큰 전신 거울 하나와 길쭉한 서랍장이 있다. 서랍장 맨 위 칸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있다. 길쭉하게 위로 솟은 스투키의 잎끝이 조금씩 누렇게 변색한 것이 눈에 띈다. 물을 오래 주지 않아 마른 것일까. 고민하다 주방 위 서랍에서 물컵을 꺼내 물을 담아 준다. 컵은 휴지로 물기를 닦아 있던 곳에 똑같이 뒤집어 둔다. 두 번째 칸에는 물티슈와 함께 스킨, 로션, 선크림 등이 놓인 보관 상자가 있다. 쓰다 만 라이터 여러 개도 함께 들어가 있다.

방 한가운데 놓인 흰 테이블 위에도 별다른 물건이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집이 어질러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이는 그가 깔끔한 성격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물건 자체가 많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충전기가 길게 연결된 노트북 하나가 테이블의 맨 오른편에, 그리고 먹고 나서 곱게 접어둔 과자 봉지, 영수증 뭉치, 거의 다 비워진 페트병 물통, 손톱 깎기, 갑 티슈와 책 몇 권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맨 위에 쌓인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보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테이블 뒤에는 창문을 등지고 소파가 놓여있다. 소파 위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둔 체크무늬 잠옷이 올려져 있다. 갈색빛이 섞인 진회색의 소파가 직박구리와 흡사하단 생각이 든다. 앉아보니 소파가 지나치게 푹신하게 내려앉아 테이블이 조금 높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테이블 맞은편에 별도의 의자가 있다. 흰 의자는 집어넣다 말아 한쪽 어깨가 바깥으로 빠져있다.

부엌을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는 책장과 TV 그리고 큰 스탠드가 놓여있다. 총 4단으로 되어있는 책장에는 맨 위를 제외한 나머지 칸은 모두 책으로 가득 차 있다. 맨 위 단에는 여러 향수가 놓여있고 모자 몇 개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짙은 갈색 병에 든 향수를 꺼내 손목에 뿌려본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풀을 돌 위에 잔뜩 짓이긴 것 같은 향이 진하게 코에 밴다. 내려놓고 그 옆에 있던 다른 향수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다. 바닐라 향에 가까운 가죽 냄새가 강하게 난다. 뿌려보진 않고 그대로 내려놓는다.

열린 안방으로 들어서자 짙은 회색 시트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있다. 정리하지 않아 이불이 아무렇게 말려 올라가 있다. 침대 옆에 위치한 협탁 위에는 독서 스탠드와 갑 티슈가 놓여있다. 탁자 아래에는 검은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열어보니 휴지 뭉치 외에는 별다른 쓰레기는 없었다. 침대 아래 수납장엔 양말과 속옷이 가득하다.

안방의 붙박이장을 열어본다. 첫 번째 장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가 빼곡하게 걸려있다. 그중 갈색 떡볶이 코트를 꺼내 입어보자 어깨 부분이 꽉 끼는 것이 느껴진다. 옆에 장을 열자 긴 팔과 티셔츠, 바지 종류가 걸려있다. 그 옆 칸에는 셔츠와 청바지와 청소기, 두꺼운 이불과 거대한 캐리어가 들어가 있다. 캐리어를 꺼내 열어보았지만, 그 안에는 티셔츠 몇 개만 있을 뿐이었다.

문밖을 나서자 스탠드 맞은편에도 붙박이장이 있다. 여러 옷과 가방, 모자 등이 걸려있다. 검은 배낭 하나를 열자 영수증 쓰레기와 빈 담뱃갑과 라이터, 그리고 여권이 나왔다.

김 현. 외자의 이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88년 9월 20일생. 예상했던 나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찍은 것인지, 사진 속의 모습이 조금 더 젊어 보인다. 지금처럼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긴 머리는 아니지만, 짧은 길이로 인해 넓은 이마가 드러난 것은 여전하다. 미소 머금어 길게 올라간 입꼬리 때문인지 인상이 온화한 것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득 그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오래 쳐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얼굴 사진이 잘 보이도록 여권을 잘 펴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둔다.

여권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다. 옷장을 닫고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앉아 켜본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KIM HYUN이라 적힌 빨간 꽃 아이콘을 클릭하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뜬다. 880920이나 kimhyun, rlagus88 등의 비밀번호를 몇 개 쳐보았지만 맞는 것이 없어 그대로 포기한다. 기회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직박구리를 죽여 내 집 문 앞에 두었다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낼 리 없다. 반드시 그는 다음 행동을 진행할 것이다. 또다시 직박구리 혹은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이든, 내게 직접적인 가해를 가하는 것이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질 것이고, 그 사건에는 전조가 되는 행동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조는 그의 집 안에서 벌어질 확률이 높다.

2004호 문을 말발굽으로 고정해 열어두고 잠시 내 집으로 들어간다. 마침 작업에 사용하던 카메라가 전부 있을 것이다. 침대 아래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 어떤 카메라가 괜찮을지를 생각한다. 들키지 않고 카메라를 설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맹점을 찾는 것이다. 타깃이 신경 쓰지 않는 위치. 그러면서도 그의 동선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곳. 타깃의 거취 공간에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은 쉬워진다. 잡다한 물건이 많다는 것은 카메라를 숨겨줄 수 있는 눈속임 요소가 많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주요 행동반경에서 벗어난 위치의 물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엔 정말 보조배터리나 텀블러처럼 생긴 카메라를 두더라도 며칠 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물건이 많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된 2004호 같은 공간에 그런 카메라를 사용했다간 금방 들통이 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04호 남자는 난이도가 높은 타깃이다.

그의 주요 활동 반경이 어떨지를 상상한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서, 옷을 갈아입고 씻는 모습을 생각한다. 씻고 난 후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냉장고를 열어볼 것이다. 텅 빈 냉장고를 보고 괜한 마음에 물을 마실 것이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릴 것이다. 조금 높은 테이블 때문에 구부정하게 노트북을 보다 딱딱한 의자로 자리를 옮기거나 쿠션을 테이블 삼아 노트북을 위에 올려두고 할 것이다. 아니면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들어갈 수도 있고,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어보려 노력할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씻고 거울을 보고 나갈 준비를 할 것이다. 옷을 여러 벌 입어 보고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계속해서 확인할 것이다. 전자레인지 위의 시계를 바라보며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시간이 되면 집을 나설 것이다. 신발을 신고, 뒤돌아 방안을 다시 한번 살피고 문을 열 것이다.

고민하다 냉장고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한다. 안이 비어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음식을 자주 해 먹지 않을 것이다. 시켜 먹거나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생활에 익숙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그가 냉장고 쪽을 신경 써서 볼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설치할 곳을 찾으면 그 다음에 결정할 것은 카메라의 종류다. 냉장고 위에는 별다른 물건이 놓여있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의 외형을 최대한 눈에 띄지 않은 모델로 사용해야 한다. 더불어 높은 곳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카메라는 한 가지 모델밖에 없다.

JW-5400 모델은 카메라라고 의심하게 어려울 정도로 화재경보기와 흡사하다. 평소 냉장고 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다면, 원래부터 저 위치에 화재경보기가 있었다고 착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모델은 천정에서 45도 아래를, 화각 90도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범위가 보통의 초소형카메라보다 훨씬 넓다. 더불어 JW-5400에는 움직임이 감지 될 때에만 영상 촬영을 시작하는 동작 감지 모드가 탑재되어 있어, 불필요한 영상이 저장되는 것을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메모리를 사용할 수 있다. 그가 방 안에 없을 때, 잠을 잘 때 등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장면은 내가 해당 구간을 넘기기도 전에 찍지 않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최대 9시간가량만 촬영이 가능하지만, 동작 감지 모드를 사용하면 경험상 이틀에 한 번씩만 배터리와 메모리를 갈아줘도 충분하다.

카메라 설치 방법은 간단하다. 천장용 브라켓을 설치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함께 주어지는 나사로 이용하여 간편하게 설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브라켓이 없더라도 구성품에 3M 양면테이프 역시 함께 들어가 있기 때문에 탈부착을 자주 하거나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볼 것이 아니라면 굳이 브라켓을 설치할 필요 없이 테이프로 고정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

USB와 배터리를 넣고 카메라의 전원을 켠다. 잘 작동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된 영상을 PC와 연결하여 확인한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내 얼굴이 화면 가득 메워진다. 여러번 작업을 하면서도 카메라에 찍힌 내 얼굴을 보는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확인이 완료되면 이제는 설치할 차례다. 천장에서 찍어 다른 카메라보다 화각이 넓어서 남자의 웬만한 행동은 전부 녹음될 것이다. 카메라 뒷부분에 테이프를 길게 붙인 후, 의자 위로 올라가 냉장고 위쪽에 설치한다.

설치가 완료된 후에는 그저 그가 발견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배터리와 저장 용량을 하루에 한 번씩 들러 확인하는 일만 잘 숙지하면 된다. 이를 위해선 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한다. 내가 들어왔다는 흔적이 남진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도어락에 그의 생일인 0920을 눌러본다.


4.


남자는 늦은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먹는다. 현재 실제 시간은 오후 4시 46분이지만, 화면 속은 한쪽에 찍힌 타임 스탬프를 보니 남자는 여덟 시가 조금 지난 밤을 살고 있다. 얼핏 보이는 모양으로 보았을 때는 오피스텔에서 조금 걸어가면 있는 푸드트럭에서 파는 샌드위치다.

젊은 남자가 하는 그 트럭에서 파는 샌드위치는 특이하게도 길쭉한 바게트의 속을 파고, 그 안을 다른 토핑으로 채워 넣어 만든다. 맛도 맛이지만 푸짐한 양과 독특한 비주얼로 이 동네에서는 꽤 소문난 트럭이다. 다만 겉에 쓰이는 바게트가 일반적으로 샌드위치에 쓰이는 식빵이나 호밀빵 등에 비해 딱딱하다 보니, 입 안 천장이 까지는 경험을 한 이후로는 자주 사 먹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잠시 화면을 멈추고 집을 나서서 샌드위치를 사 먹기로 한다. 다섯 시가 다가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아직 쨍한 바깥을 걸으며, 요즘 들어 점점 해가 길어지는 것을 느낀다. 샌드위치를 하나 포장하고 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러 우유도 함께 산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남자가 샌드위치 먹는 모습을 보며, 함께 음식을 먹는다. 까슬한 바게트의 표면이 입안에 거칠게 닿는 것이 느껴진다. 입천장이 긁히지 않게 베어먹는 양을 조절하며 먹는다.

샌드위치를 하나 다 먹은 남자는 바로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남자의 패턴은 거의 일정하다. 8시쯤 귀가하여 늦은 저녁을 먹는다. 저녁은 무겁게 먹지 않는다. 식탐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가끔 위장약을 사 먹는 것을 보면 소화력에 문제가 있어 일부러 먹는 것을 조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주로 어제처럼 샌드위치를 먹거나, 사과나 바나나 등의 과일을 먹거나, 때로는 아예 죽을 사 먹기도 한다.

남자는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다. 소파에 누운 그가 스마트폰을 만지기 시작하면 최소 한 시간 정도는 꼼짝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가끔 화면에 그가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보는지 잡힐 때가 있는데, 그는 대개 인터넷을 하고 있거나 전자책을 읽고 있다.

그가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로 느껴질 때가 있다. 지난 3주 동안 모은 그의 인적사항을 통해 추가로 알게 된 그에 대한 정보가 많다. 그의 직업에 대한 것은 그중 하나이다.

남자는 턴제 방식의 RPG 게임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로 게임 기획자는 게임이 구동되는 시스템을 책임지거나 시나리오, 운영, 캐릭터 및 몬스터 사이의 밸런스, 혹은 유료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게임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을 담당한다고 한다. 보통은 퀘스트, 시나리오, 이벤트 등 게임 내 즐길 거리를 중심으로 기획하고 제작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저의 만족도를 얼마나 정밀하게 측정하고 해당 데이터를 해석하여 만족도를 높일 방안을 구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만족도라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지표를 숫자를 통해 읽어내는 것. 그 숫자는 게임에 유저가 쓰는 돈과 시간이 될 것이다. 유저를 게임 내에 더 오래 머물게끔 하고, 더 많은 돈을 쓰게끔 만드는 사람.

그런 그의 모습 속에서 나와 닮은 구석이 없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하는 일 자체는 나와 무척 다르지만 유저의 수요에 따라 퀘스트, 이벤트, 아이템과 같은 다양한 흥밋거리를 제공한다는 본질은 나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가 평소 집에서 게임을 즐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바로 그 공급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욕망을 분석하고 이용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라면, 그 일과 자신을 분리해 순수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작업물은 물론 타인이 촬영한 영상 또한 즐기지 않게 된 지 꽤 되었으니까.

직업뿐만이 아니라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는 평소 행동에서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주 어깨를 돌리는 버릇이 있는데, 나 역시 어깨를 자주 움직이며 푸는 버릇이 있다. 어깨가 잘 뭉치는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어깨를 계속해서 앞, 뒤로 움직이는 것은 단순한 버릇에 가깝다. 남자가 의자나 소파에 앉을 때, 한쪽 다리를 반대편 다리 아래에 집어넣는 모습에서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해당 자세가 허리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자세로 작업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잦다.

남자는 주말에도 회사를 나가곤 했는데, 그 일정에 정해진 규칙은 없다. 어떨 땐 토요일에 나가기도 하고, 일요일에 나가기도 한다. 똑같이 오전에 나가 저녁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오전에 나가 점심시간에 돌아오기도 한다. 비록 그의 근무 일정이 규칙적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의 일상 자체는 정해진 몇 가지 규칙 안에서 돌아간다. 음식은 해 먹기 보다는 밖에서 사 오거나 배달 주문을 통해 해결한다. 소화 기관이 약한 탓인지 기름지거나 매운 음식을 피해 메뉴를 선정한다. 평일 저녁에는 샌드위치를 먹거나, 사과나 바나나 등의 과일을 먹거나, 때로는 아예 죽을 사 먹는다. 회사를 가지 않는 주말 낮에는 이보다는 조금 더 메뉴 선택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덮밥이나 초밥처럼 쓰레기가 최대한 나오지 않는 음식을 사 먹는다. 밥을 먹은 후에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전자책을 읽는다. 평일에는 그러다 씻고 바로 잠을 자기 부지기수지만 시간이 넉넉하게 남는 주말에는 플랭크나 팔굽혀펴기 같은 간단한 동작으로 짧게 운동을 한다. 가끔은 자위를 하기도 한다. 남성이 자위하는 모습을 찍고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처음엔 이상한 기분에 화면을 쳐다보기 민망했지만 금방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놀라울 정도로 특별한 일 없는 지루함. 그의 일상은 직박구리의 목을 잡고 비트는 잔혹한 의외성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지루함으로 꽉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직박구리 살해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은 점차 하나의 놀이로 발전했다. 그의 일상 속에 나의 흔적을 조금씩 남기는 놀이. 그가 출근해 집을 비운 동안 나는 그의 집을 들어선다. 창의 블라인드를 모두 걷어내 햇살이 집 안에 가득하게 만든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다. 거울 모서리에 피어있던 검은 곰팡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제 그 자리는 깨끗하게 반들거린다. 거울에 비누칠 한 다음 그가 사용하는 칫솔로 조금씩 닦아냈던 탓이다.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깨끗해진 거울을 보며 이를 닦는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남자의 냉장고 속의 영양제를 물과 함께 입에 털어 넣는다. 꾸준히 복용하고 있지만 별다른 효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덜 피곤하다던가 눈이 좋아지거나 하는 현상이 일어나진 않는다. 리모컨을 이용해 TV를 튼다. 흥미로운 것이 없나 채널을 돌려보다 그냥 뉴스 채널에 고정해둔다. 남자는 TV를 거의 잘 보지 않는다. 가끔 밥을 먹으며 TV를 틀어두곤 했는데, 그마저도 TV 화면에 집중하기보다는 단순히 백색소음이 필요해 틀어두는 것처럼 보였다.

TV 옆 4단으로 이루어진 책장에 놓인 책이 배열된 순서를 바꾼다. 책의 순서는 사흘에 한 번씩 바꾸고 있다. 두 번째 칸과 네 번째 칸을 통째로 바꿔두거나, 책을 크기별로 정리해두거나 하는 식이다. 책의 배열이 계속해서 바뀐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배열을 바꿔둔 이후에는 맨 위 단에 놓인 향수를 쓴다. 옷에 뿌릴 때도 있고, 그가 하는 것처럼 한쪽 손목에 뿌린 후 귀 뒤에 묻히기도 한다.

가끔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는다. 대체로 사이즈가 작아 맞지 않지만, 맞는 옷은 아예 가져가서 입기도 한다. 큰 부피를 차지해 한 벌이라도 없어지면 바로 티가 나는 외투는 그럴 수 없지만, 티셔츠 같은 옷은 한두 벌 가져다 집에 두기도 한다. 한 번은 그가 출근할 때 옷장을 한참을 뒤적이던 모습이 찍힌 적이 있었는데, 그의 옷장 한쪽에 걸려있던 검은 무지 티셔츠를 가져온 다음 날이었다. 그가 찾던 검은 티셔츠는 여전히 내 집에 있다.

내가 아직 풀지 못한 남자의 유일한 비밀은 노트북이다. 그의 노트북 암호를 알아내기 위해 매일 전날 생각해둔 비밀번호를 하나씩 쳐본다. 하루에 하나씩. 김현이라는 그의 이름과 88년 9월 20일생이라는 그의 인적 사항을 기반으로 한 암호 중 그럴싸한 것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 또한 어떤 놀이가 된 것 같다.

3주라는 시간 동안 그가 노트북을 사용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었는데, 하필 그가 노트북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는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증거가 그 노트북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죽인 동물의 사체를 찍은 사진을 모아둔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있을 수 있고, 그 폴더를 클릭하면 머리가 돌아간 직박구리의 사진이 잔뜩 나올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트북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는 이상 나는 영원히 그 안의 내용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남자의 영상을 아예 그의 집에서 볼 때도 있다. 그의 일상을, 그의 일상이 펼쳐졌던 공간에서 보는 것은 이상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때는 화면 속 그가 하는 행동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화면 속 그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함께 걷는다. 혹은 오늘처럼 그가 먹는 음식을 똑같이 사서 먹거나, 그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곤 한다. 그가 매트를 깔고 플랭크를 시작하면, 나 역시 매트를 깔고 플랭크를 시작한다.

그가 집 안에서 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체 살이 찌는 체질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배가 조금씩 나오던 것이 이제는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도, 나 역시 플랭크는 오래 하지 않는다. 30초에서 1분 사이. 시작하기 전에는 오늘은 1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15초가 지나면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20초… 24초, 25초… 28초… 29초…….




작가 소개



김민규.

메모장에 적어둔 말이 너무 많아서 글을 쓰는 사람, 활자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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