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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은의 기억 외 1편



은의 기억

불 꺼진 공방과 공방을 지나쳐

은 공예점까지 걸어왔지만 혼곤한 정신은 아니었다.

11:00 open, 9:00 close

불 꺼진 상자 같은 공예점 앞에 서서 기다렸다.

쇼윈도 앞에 붙어서 생각했다. 저기 있는 작은 은상자가 필요하다.

나는 상자가 생기면 그 상자를 그보다 큰 상자에 가두고,

그 큰 상자를 더 큰 상자에 기어코 가두어

내가 다룰 수 있는 상자가 이제는 없었다. 상자를 강변에 버렸다.

강변에 모호하게 잠겨 있는 회색 컨테이너 상자의 간신히

상자 가장 안쪽의 것이 은빛으로 회오리치는 기억이라면

고운 은반지처럼 손가락에 끼워볼 수도 있겠지만

두 손 모아 기다려도 나타나야 할 주인이 오지 않았다.

회색 컨테이너 은 공예점, 벽을 망치로 때리면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하자

가방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자 속의 상자는 생각이고 상자 밖의 상자는 문장이다.

열쇠가 짤랑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PM 9:01

상자가 칼날에 깊숙이 찔린 듯 불 켜지고 있다.









방문 선물

스프라이트 깡통이 널려 있는

해변가

작은 바다는

손님 맞을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다며 머쓱하게

포구로 둘러싸인 해안선을 긁어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다가 겸연쩍은 듯 제 모래톱을 곰지락대는 모양을 바라보았지만, 그곳도 구겨진 맥주 캔 투성이긴 매한가지였다 난감해하는 나에게 바다는 파도를 활짝 펼쳐 뒤늦은 환대의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편한 자리에 앉게, 이곳은 그래도 넓으니까 말일세, 돌연한 그의 기쁨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손에 들린 것은 과일바구니인가? 그제야 나는 바다가 과일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초대를 받았는데 염치 불고 맨손으로 올 수는 없지 않나,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참으로 기쁘네

꼭 자네를 위해서만 마련한 것은 아니네

나의 말에 바다는 구름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물고기를 높이 쏘아 올렸다 나는 뻔뻔하게 덧붙였다 원래 방문 선물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나? 내가 과일 바구니를 가져가면 집주인인 자네가 과일들을 깎아서 내오고 그러면 같이 먹는 것이지, 나는 애초부터 그 상황을 염두에 두었네 그래서 나는 방문 선물을 준비할 때 자네와 내가 동시에 좋아하는 과일들로 꾸려진 바구니를 신중하게 골랐다네

그래서 이 과일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단 세 종류만을 골라왔네, 샤프와 펜과 페이퍼네

나는 바닷가에 태연자약 앉으며 대답했다 바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과일이구먼 바다에게 나는 대꾸했다 그렇다면 더욱 의미가 깊지 않나? 이 과일들은 특별히 내가 깎을 테니 쟁반만 가지고 와주게 이윽고 나는 그것들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사각사각 소리가 과일 깎는 소리처럼 조용히 들려왔다 눈물껍질이 모래사장에 툭툭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바다에게 내밀었다

과육이 아주 달구먼

바다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뜬 뒤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로 젖은 바람이 시원히 불어왔다

파도에 떠밀리는 스프라이트 깡통과 맥주 캔

수평선 위로 갈매기들이 하늘을 종이처럼 긋고 있었다

푸른 바다에 빈 바구니가 둥둥 떠가고 있었다






작가 소개


김민서

시를 씁니다. 고양이 소설이와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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