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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의 『불온한 정신』에서의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는 어떻게 드러나고 죽는가?



1. 발터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와 김춘식의 ‘한국 현대 시’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를 통해서 경험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를 쓰는 방법으로 경험 대신 ‘체험’을 내세운 보들레르를 언급하며 해당 시대의 정황과 『악의 꽃』의 모티프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출현하게 된 계기를 말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체험은 경험과 다르게 순간적인 몸의 기억이다. 『악의 꽃』이 출현할 당시의 파리는 ‘대개조’를 통해 과거의 모습과 단절되어 파편화된 체험만 가능하게 되었고, 경험을 통해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서정시를 쓸 수 없는 환경이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분절된 체험이 유효함을 가지는 지점들에 주목하여, ‘상징’을 통해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면밀히 말하자면, 근대적 종교의식에 종속되어있던 의미들은 더 이상 메트로폴리스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었고 용기와도 같았던 경험의 운반체들, 의례 또는 의식은 사라졌지만 경험의 잔해들이 남아있었다. 즉, 경험은 온전하진 않지만 분절되거나 조각나거나 파편화된 형태, 경험의 잔해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보들레르가 증언하고자 하는 경험은 바로 그 경험의 잔해이며, 특히 보들레르의 「만물조응」이라는 시에서 그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시 「만물조응」에서의 시간성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운동으로써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 이전의 시간, 에덴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두며 분절되고 있다. 시간을 모르는 시간이 있는, 반어법적인 이러한 발상은 변화와 쇠퇴라는 개념이 개입하기 전의 시간, 즉 시간이 시작하기 직전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으로 보자면 에덴과 포스트에덴의 단절, 그리고 그 단절에 있는 간격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태고에 있으며 일상 속의 경험으로는 불가능한 사고의 영역에 있다. 즉, 보들레르의 체험은 지속의 개념으로써, 역사의 전사의 질서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활동이라는 것도 실천적 인간의 건전한 이성, 지성의 영역에 있으며 무의지적인 ‘경험’과 다르게 의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춘식은 이러한 발상으로부터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통해 말하고 있는 ‘체험’의 개념을 빌려와 한국 현대 시에서의 ‘지금, 여기’의 중요성과 필요를 말한다. 빌터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의 서술로부터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가져와 ‘감각적인 향락’. ‘관심이나 수용 능력을 말살하는 우울(spleen)’에 대해서 말하며, 이를 서정시가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는 시대 속에서도 『악의 꽃』의 명성이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보고 있는데, 평론집 『불온한 정신』에서의 김춘식은 낙관주의적 편향, 미래주의 또는 그로부터 기인하는 우울과 불안이 보편적인 현대 시에서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재생산하기만 하는 메타는 더 이상 그러한 시들이 성공할 수 없는 시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체험’의 개념적인 측면에서 현대 시의 방향성을 제고해보고 있다.



2. 경험의 잔해와 습관적인 문학성, 그리고 체험과 ‘지금, 여기’


한국 현대시의 ‘망(望)방향성’, ‘미래 없음’에 대한 논의 중 하나로 김춘식은 『불온한 정신』에서 90년대 문학의 특징과 문학 담론들을 통해 ‘지금, 여기’의 부재가 해당 논의의 중요한 지점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벤야민이 ‘공허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정의한 근대적 ‘동질성’의 시간 안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인 ‘지금, 여기’에 압축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보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은 벤야민이 그의 ‘역사철학테제’에서 암시한 것처럼, ‘진보의 폭풍으로 역사의 천사를 끊임없이 뒤로 밀어낸다.’ 미래는 지속적으로 유보되고 오직 현재만이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미래를 가상적으로 상정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의 폭풍은 “잔해 위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1)”, 즉 시간의 폭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간의 폭력이 극단화되면서 ‘역사의 천사’ 앞에는 온갖 문명의 쓰레기와 산산이 부서진 것들, 죽은 자, 인위적으로 조각난 시간들이 폭풍에 휘날린다. 진보의 가속도는 ‘모든 단단한 것들을 대기 속에 녹여버리’고 오직 잡다한 시간, 잡다한 쓰레기와 폐허만을 우리 앞에 남겨 놓을 뿐이다.

90년대 시인이 바라본 ‘역사의 풍경’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벤야민이 말한 그러한 ‘진보의 폭풍’이 아니고 무엇일까. ‘폐허에 관한 애착이나 명상’, ‘소멸과 죽음의 충동’은 근원적으로는 진보의 폭풍과 현기증 나는 질주를 멈추고자 하는 ‘충만한 시간’, 즉 ‘구원’으로서의 ‘휴식’에 대한 갈망을 포함한다. 천사가 머물러 있고 싶어하듯이 그들 또한 피로한 자신의 몸을 어딘가에 안주하고 구겨 넣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주의 대상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들은 늘 어딘가에 구겨 넣어지거나 쑤셔 박힐 뿐이다. 시간의 흐름과 진보의 패러다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 ‘비극’은 시작된다.2)


즉, 앞서 말한 한국 현대 시의 ‘습관적인 문학성’이 가지고 있는 진보의 신념이나 미래주의적 낙관은 모더니티의 가장 낡은 속성에 불과하며, ‘지금, 여기’를 통해 벤야민이 지적한 미래의 허상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춘식에 따르면 ‘지금, 여기’란 서정과 반서정, 신(新) 서정과 구(舊) 서정, 미래파와 회고주의 등 이항 대립적인 미학 구도를 세우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전제인 ‘상황’의 맥락과 징후를 파악하여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메타적 시선이 필요함을 시사할 수 있는 용어이다. 예컨대, 현대시의 키워드 중 하나인 ‘감각의 공동체’를 그리고 꿈꾸는 태도는 어떤 감각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종의 시도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 여기’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 시에서의 미래는 어쨌거나 일종의 태도이고 포즈다. 이에 김춘식은 예술 일반의 기능에 안일한 희망을 거는 문학론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문학이나 예술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낡고 안일하다고 말한다. 최근 현대 시와 비평에서 두드러지는 특징들, 예를 들면 ‘문학은 죽었다’, ‘시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의 반증일 뿐이며 간편한 방식의 재생산에 불과하다고 밝힌다.

그의 논의의 전후를 추가적으로 더하자면, 90년대부터의 문학 패러다임과 담론은 한국 현대 시의 성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90년대 문학의 키워드들, 구원과 유토피아, 일상성, 미시적 관점, 여성, 환경 등은 동시대 문학에서도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 지점들일 뿐만 아니라, 세대론적 관점에서도 80년대 시들과 대립적인 구도를 보였던 90년대 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저항, 또는 새로움은 현대 문학의 장(場)에서 보수의 위치를 점유한 채 진보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실속 없는 습관적인 ‘문학성’만 유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문학의 종사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임과 동시에 동시대 문학의 직전인 90년대 문학의 시작과 끝을 반추함으로써 현대 시의 정체성을 확인해볼 수 있는 지점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김춘식의 ‘벤야민’과 ‘보들레르’


김춘식은 특히 『월간 현대문학』에서의 시 계간평 「“아직”과 “간신히”의 현재, 그리고 ‘묵은 것’」을 통해 이러한 논의를 가능케 한 문제의식과 벤야민을 인용하는 목적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망이나 새로운 이슈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현 시단에서 '새로움'이라는 미학적 기대치나 평가기준은 이 점에서 제 기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징후'와 '맥락'으로부터 일탈하여, 그 자체로 '신화화'되거나, 타성화된 반복미학, 역설적으로 낡은 감성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런 '새로움'이라는 구호의 역설적 '낡음'은 모더니티의 기본적인 생리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진보'의 신념이나 '미래주의적 낙관'이 모더니티의 가장 전통적이고 낡은 속성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이 지적한 '미래주의', '진보'의 허상에 대한 지적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화두이다.3)


김춘식에 따르면 세기말 시인들은 문학의 새로운 정체성과 방향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을 통해, 과거의 어떤 문학사적 시기보다도 본질적인 문제,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맞게 되었고 방법론적인 회의를 거듭하여 역설적이게도 당대 문학의 정체성과 미학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의 과정은 90년대 시단에 한때, 세기말과 시의 죽음은 유행적 전언(傳言)을 전면화 시키는 ‘위기의식’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과 불안은, 90년대 후반의 시적 성과를 한층 창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죽음에 대한 탐구는 소멸과 소진에 관한 미학적 재창조를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인 생명력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딜레마는 이러한 출구 모색이야말로 가장 꾸밈없이 시의 운명을 직시하게 만든 장애였기 때문에 구원과 승화를 먹고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무엇으로 승화되든지 이런 절대적인 벽 앞에서의 자기 확인 없이는 한국의 시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춘식, 「불온한 정신, 순교의 언어」 중에서)

즉, 김춘식은 벤야민이 보들레르로부터 발견했던 ‘체험’의 문학과 같이 징후와 맥락을 선지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김춘식은 90년대 문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의 전후 시기와 그 관계를 밝힘으로써 21세기의 ‘보들레르’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글 「동어반복의 현실과 시적 모색」에서 뚜렷하게 보여지는데, 다음 제시되는 인용문은 보들레르의 문학적 가치를 언급한 후 뒤따라나오는 결론의 일부이다.


최근 시의 무방향성이나, 많은 시인들의 시적 고투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미적 성취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어쩌면 많은 시인들이 이견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시들의 팽창적 증가 속에서 오히려 서정의 무덤이 ‘시의 구덩이’가 되고 있다는 반성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마다의 생각과 자기의 시적 세계 속에서 고투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세계와 맞부딪치는 시적 접점에 대한 탐구 또한 분명 모험이고, 또 경계 위에 놓인 시인의 책무이기 때문이다.4)


김춘식은 90년대 한국시문학사가 가지고 있는 불투명성, 또는 뭉뚱그려짐에 대해 80년대 시문학사와 2000년대 이후의 맥락과 징후 사이에서의 관계뿐만 아니라 90년대 시가 80년대 시들의 방향성을 거부함으로써 가질 수 있었던 위치와 정체를 규명하여 동시대 문학의 직전을 제시하고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수명이 『공습의 시대』를 통해 책머리에서 밝힌 문제의식, “1990년대의 시들에는 1980년대의 거인과 이후 2000년대의 유령들이 동시에 어른거린다. 이들은 1980년대에서 벗어나느라고 1980년대적인 것을, 새로운 것을 추동하느라고 2000년대적인 것을 상상하며 이웃하였다. 양자가 한꺼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90년대 시의 지정학적 운명이다.”와 같이 동시대적 문제의식이 개입할 수 없는, 거칠게 말하자면 필요 없기 때문에 중간적 위치로만 조망되어온 90년대 문학은 김춘식을 통해,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위치를 정립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정립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점은 김춘식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시의 구덩이” 속으로 파묻히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시인의 책무”를 부여함으로써 성취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문학의 장(場), 미학적인 영역에서만 가능한 논의이다. 개괄적으로 보자면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인용한 데에는 결국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즉 가지고 있던 시적 언어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공간에서의 새로운 장소성을 발견하고 기록한 것이지만, 김춘식이 벤야민을 인용한 것은 문학의 ‘변화’를 목적으로 ‘시대’를 발견해달라는, 거칠게 말하자면 일종의 부탁에 가깝다.



4. ‘벤야민’과 ‘보들레르’의 죽음, 또는 사후설명


고전을 논하고 고전들이 이루고 있는 질서, 그리고 전통에 이어지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나름의 일리가 있고 강력한 힘도 가지고 있지만 현대에선 그것을 낡은 것, 엘리트적인 것이라 치부함과 동시에 동시대성(contemporary)을 향해 진화한다. 이 점에서 100년의 시문학사 내내 이어진 질문이지만 ‘시는 왜 세계 속에 전복되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그의 글 속에서도 유효하다. 문학이라는 상징권력은 잃어서는 안 될 무언가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읽기’의 문제가 아닌가에 대해 반대로 전복적인 질문도 가능하다. ‘대체로’, ‘보통’, ‘전형적으로’ 읽는 태도는 책을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며 창조적으로 읽지 못한다. 기호를 어떻게 읽는가,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가,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읽고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가-와 연결되는 읽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 미래파의 시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음’으로 보여준 난해성은 독해의 필요성을 강력히 요구했다기보다는 세계가 난해하므로 그것을 포착하는 시 또한 난해한 언어로 쓰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에 밀접하다. 프로의 영역으로도 비평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영역으로써의 비평은 의미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 비평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구현시키는 직업 체계 속 한 휴먼 폼일 뿐이지만 예컨대 직업을 수행하기 위함으로만 받아들이면 시장 시스템을 그대로 수용하고 소비주의 지지자일 뿐인 것처럼 읽는 사람, 더 나아가 읽기의 역할 수행을 다그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위기의식은 한국이라는, 문학의 자기장이 약한 공간에서는 그러나 결국 문학의 장(場) 내에서 ‘얘깃거리’ 정도로 소모될 것임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가지고 왔던 사회적 파장의 크기를 통해서도 인지할 수 있다. 『악의 꽃』이 발간되기 직전, 해당 책은 온갖 기사와 작가들의 비평과 찬사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쳤고 결국 제2제정의 ‘정의’에 의해 여섯 편의 시의 삭제 명령과 출판주와 시인에게 벌금형을 받았다. 또한 이때 내려진 유죄 판결은 근 1세기가 흐른 1949년에야 비로소 최고재판소에 의해 정식으로 파기되었다.5) 문학에서의 미학적 논의가 사회에서도 유효할 수 있음은 읽기 또한 쓰기와 마찬가지로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문학은, 언론과 대중매체를 비롯한 상식, 문학과 대중이 서로를 그렇게 볼 수 있도록 합의한 지점의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의 이름표, 즉 유명세일 뿐 미학의 흐름은커녕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학성이나 미학적 가치는 가시화되지도 않는다. 서평이나 해설에 실려 있는 해당 작품의 의미 및 가치가 실제 한국에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가치로 점유되고 있는 현장은 대표적이다.

동화 읽기나 법조문 읽기는 다른 장르에 있지만 둘 다 문학적이거나 비문학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경계가 애매하단 것을 보여준다. 문학을 말할 때 닫힌 텍스트를 상정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만화 텍스트가 문학이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수많은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문학의 경계가 더 이상 확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학적이라는 표현은 쓸 수 있으나 대문자 문학이라는 명사는 이제 더 이상 쓸 수 없다. 현대의 문학 비평은 동시에 시문학사를 전제로 쌓아올려진 문학이라는 상징 권력을 벗어나 새롭게 사유할 필요도 있다. 사후설명을 통해 가능성을 모색하는 태도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1)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p. 348.

2) 김춘식, 『불온한 정신』, 문학과지성사, 2003. 1

3) 『월간 현대문학』, 김춘식, 「“아직”과 “간신히”의 현재, 그리고 ‘묵은 것’」, 현대문학, 2014. 1.

4) 『한국문학 2015년 가을호』, 김춘식, 「동어반복의 현실과 시적 모색」, 2015. 9

5) 보들레르, 『악의 꽃』, 윤영애, 「『악의 꽃』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03, 4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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