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by akaive of memorandum : Cha Hyun Jee. Proudly created with Wix.com

  • SRS

한국 현대 문학의 엄살과 배부름에 대해서

한국 현대 문학의 엄살과 배부름에 대해서

;한국 현대 문학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의 유행과 위치



한국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의 유행


시인이자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1920~1994)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현대 시인이자 현대 도시인, ‘교양인’의 경계를 잘 보여주는 하층민의 대표로 유명하다. 그가 불안정한 가정 속에서 일찍부터 일용직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했고 미국 전역을 유랑하며 다양한 헤프닝을 겪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한 번 쯤은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정보이다. 그가 출간한 예순 권이 넘는 소설과 시, 평론 등은 한국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한국에서 부단히 활동하고 있는 금정연 서평가와 정지돈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서 부코스키의 작품들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절판되기 일쑤였고 당대 작가들 사이에선 부코스키를 필사하고 서로 절판된 책들을 공유하는 등 일종의 ‘부코스키 유행’이 있었다고 한다. 출판 업계에서는 그의 영향이 최근 들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출판사 민음사는 세계시인선 시리즈를 통해 2016년부터 순차적으로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창작 수업』 등 그의 시를 엮어 집중적으로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 밖의 열린 책들, 시공사, 문학 동네와 같은 출판사들도 그의 에세이나 소설을 2015년 이후 줄곧 출간하는 중이다. 그의 글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출간되고, 대중적으로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나 학계에는 부코스키에 대한 연구가 현저히 적은 편이다. 비단 부코스키의 글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 결과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최근 출간된 부코스키의 책들에 첨부되어있는 옮긴이의 말, 또는 비평에도 그의 ‘불우한’ 생애를 소개하며 그의 글 속에서도 느껴지는 ‘쿨’함을 하나같이 칭송할 뿐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한 외국 작가의 글이 미학적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채로 수입되고 있으며, 현장에서의 자본적이고 문화적인 실천이 앞서고 있다는 의혹을 제시할 수도 있으나 이는 선후관계를 분명히 단정 지을 수 없기에 단순한 개인적 의혹으로만 간직할 수 있다. 다만 부코스키의 작품들이 한국 현대 시에서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쿨’해서 좋다, 멋있다, 라는 일차원적인 ‘기분’을 넘어 새로운 감각을 배치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의 위치


부코스키의한 생사관은 불교에 경도되어서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취하게 되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예컨대 이 일기에는 그가 목격해야만 했던 두 사람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한 경우는가족 중 어느 누구도 시신을 원하지 않았고, 또 다른 경우 역시 노인이 죽을 때까지친척들이 그를 혼자 버려두었다. 이처럼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죽음은 심상한 것이 된다. 쿨한 생사관은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내면화시킨 것이면서, 부코스키와 같은 하류계층 사람들이 가진 일종의 아비투스라고 의심해 볼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장정일, 「자연스럽게 아비투스」, 장정일 칼럼, 한국일보, 2019.05.02


장정일은 위 칼럼을 통해 부코스키의 미학적 가치를 재검토했다. 해당 칼럼은 한국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의 위치를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이자 이전의 부코스키에 대한 평가들, 그의 마초적이고 ‘하층민’적인 문체는 불교적 가치관을 흡수하고, 도시인과 히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그의 성장 과정으로 왔다는, 일원론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류계층은 ①아이들의 양육(교육)과 ②질병(건강) 일반에 대해 중산층과 전혀 다른 아비투스를 배양한다. 먼저 하류계층은 아이들의 양육에 대해아이들은 저절로 자란다는 태도를 갖는다. 즉 아이들의자연적 성장을 믿으며 친구들과 골목에서 마구 뛰어놀도록 내버려둔다. 반면 중산층은 아이의 재능과 소질을집중 양육한다. 중산층 부모는 아이들의 미래를 기획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아네트 라루가 미국 중산층 가정과 노동자 및 빈곤층 가정의 9~10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양육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를 연구한불평등한 어린 시절’(에코리브르, 2012)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하류계층은 질병 문제에 관해병원은 병에 걸리러 가는 곳이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의 태도를 갖는다. 이들은 자신의 몸을 자연에 내맡겨진자연적 신체로 규정하는데, 이는 돈이 없기 때문에 미리부터 병원과 의사를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중산층은 자신의 몸을 의사의 돌봄이 필요한의학적 신체로 간주하며내 몸과 병은 의사와 병원에 맡긴다는 아비투스를 기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코리 M. 에이브럼슨의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코리브르, 2015)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직 하류계층과 중산층의 생사관을 비교한 연구는 보지 못했지만, 부코스키의 쿨한 생사관은 ①과 ②에서 하류계층이 자연을 따르는 태도와 같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만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중산층은 하류계층이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죽음을 부적절한(교양적이지 못한) 화제라고 회피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현재의 삶을 지옥으로 여기며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하류계층과,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보다 확실성에 찬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운 중산층의 아비투스에서 온다.

장정일, 「자연스럽게 아비투스」, 장정일 칼럼, 한국일보, 2019.05.02


장정일이 부코스키로부터 발견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라는 하류계층의 아비투스이다. 그의 논리를 비약해서 해석하자면 부코스키를 ‘쿨’하게 보는 시선은 중산층이 하류계층을 바라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만일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한국 작가들을 비롯한 대중들 사이에서 부코스키가 유행했던 이유가 현대 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 ‘쿨’함 때문이라면 그것은 한국 현대 문학이 작가와 독자를 아울러 다분히 중산층 출신이거나 다른, 새로운 문학 스타일을 수용할 때 중산층 중심의 시선을 아무 비판 없이 작동시켰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기정사실화 했을 때 현 한국 문학의 현장에 대해, 일종의 인텔리 루트를 다들 너무 쉽게 밟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아카데미즘 비판이 또 한 번 가능해진다. 한국 문단이 결국 대학, 문창과, 학원 위주의 인맥과 비열한 연대로 유지되는 측면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이 독자, 수용자, 또는 소비자로 삼고 있는 대상들이 독해 가능한 중산층 계급에만 국한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targeting이 주류 문학이라는 점도 고려하자면 거시적인 담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논의는 동시대 한국에서의 ‘부코스키’라는 감각이며 근대 문학 이후 문학을 전공하고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가’를 양성하게 된 현대 문학의 배경을 표층적으로만 비판할 수는 없으므로 그의 작품과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한국 문학의 기생하는 주체성


3-1) ‘시인이라는 기표를 빼면 시체가 되는 사람’


부코스키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것들 중 하나는 능동적인 주체이다. 부코스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전적인, 포즈로만 존재하지 않는 소재들과 가치관과 언어들은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가능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은 늘 나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겨왔다. 그러나 내 눈엔 타인을 짓밟으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당신들이 더 불편하다.”라는 그의 일갈은 그가 언론으로부터 ‘미국이 불편해 한 이단아’라는 별명을 부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며,(Alessandra Bonanomi, 「Charles Bukowski, the Outsider Genius of the American Literature」, 아시아엔, 2018. 01. 31) 이러한 사건은 작품 안팎으로 능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 주류 시인들의 태도를 꺼내 비교하자면, 한국에서의 ‘이단아’란 단순한 포즈이자 구조적인 문제로 귀결시키기 위한 수동성에 불과하다. 부코스키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일종의 퍼포먼스나 새로운 캐릭터로 치하해버리는 주류 문화에 대하여 나는 정상인이며 오히려 독자를 포함한 모든 타인들이야 말로 이단이라고 말하는 등, 시도를 묵살하는 논리와 태도를 보였다. 반면 한국 현대 시들의 화자 또는 작가들의 논리는 지나치게 수동적이다. 일례로 2000년대 한국 현대문학에 등장했던 미래파는 난해함과 읽을 수 없음을 통해서 더 이상 서정을 발견할 수 없고 읽고 쓰기 쉬운 방식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 세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보여주었으나 문단과 출판사가 부여하는 ‘이단아’라는 별명을 ‘감사히’ 수용하고 문학이 가지고 있는 상징 권력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특히 미래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경주의 경우, 최근 대필 사건이 사실로 드러남과 동시에 해당 문제점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가 대필에 대한 공론화 사건 이후 스스로 작성해 공개한 사과문의 내용은 더욱 문제적이다. 다음은 김경주가 올린 사과문의 일부이다.


사과드립니다.

최근 저는 대필사건으로 인해 독자분들께 너무 큰 실망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불명예스러운 대필로 인해 동료 문인분들의 명예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와 이런 논란 속에 함께 있는 차현지 소설가에게도 사과드립니다.

협의 하에 이루어지고 고료도 지급 된 일이었지만 원고를 펑크내는 한이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리숙한 판단으로 차현지 작가에게도 상처를 남겼고, 제 인생에도 뼈아픈 후회를 남겼습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제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참담한 마음입니다. 매년 세월호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괴롭고 두려웠습니다. 제 스스로 대필사실을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겁쟁이 시인에 불과합니다……

또한 당시에 차현지 소설가의 마음을 좀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착취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배려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듭니다. 친구처럼 지냈더라도 선배로서 올바른 선택으로 이끌었어야했는데, 차현지 소설가에게 미안합니다. 앞으로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감수성을 기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어리석은 제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큰 실망을 끼쳐드린 독자분들과 문우분들을 포함한 모든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살면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뼛속깊이 반성하겠습니다.

김경주, 2019. 6. 3.


김경주라는 작가가 이번 사과문을 통해 의도치 않게 보여준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불명예스러운 대필로 인해 동료 문인 분들의 명예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그의 문장이 전제하고 있는 ‘문인 분들의 명예’와 같은 문인으로써의 책임감은 예술가들 중에서도 한국 문인 특유의 연대책임의식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겁쟁이 시인’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상징권력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한국 문단 전반이 가지고 있는 비열함의 반증이기도 하다. 겁쟁이 시인이라는 수동성이야말로 개인의 책임을 시인이 응당 지녀야 했을 용기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감수성을 기르도록 하겠다는 말은 즉 문학 권력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범주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성의 태도로써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제도권 내에서 내면화된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다. 무엇보다도 ‘사과문’을 내고 ‘뼛속깊이 반성’하며 ‘큰 실망을 끼쳐드린 독자분들과 문우분들을 포함한 모든 분들’께 머리를 조아린 이 사건은 내용의 비열함뿐만 아니라 이후 아무런 대책이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예측과 해결되지 않았음을 ‘모든 분들’께 대면하게 만든다. 향후 활동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과문 또한 차현지 작가가 공론화를 시작하자마자 김경주 시인이 차현지 작가에게 “인스타에 올린 글을 내리고 사실관계에 오해가 있었다는 사과글을 내게 개인적으로 보내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 하고 다닐 것이다. 그 파급력은 너의 주변 사람들과는 다를 것임을 약속할 수 있다”고 경고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직후에 쓰였다는 점은 옳고 그름을 떠나 김경주 작가가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고 지키기 위한 행동을 줄곧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과문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은 모두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한국 작가의 일면만이 남는다. 이는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권위적이지 않은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목표한다고 거창하게 말할 수 없으며 지질맞은 한 인간이 문학 권력에 기생하는 면모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는 기생하지 않으며, 주류 한국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의 성질은 한층 더 명징해지고 있다. 주체가 된다는 것, 즉 능동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의미의 질서로부터 스스로 탈피하여 부적응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여태껏 나의 삶을 지지해준, 손쉬운 의미의 지지대를 무효화하고 파괴함으로써 가능하나 한국 현대 작가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인물은커녕 작품마저 전무하다. 장정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이라는 기표를 빼면 시체가 되는 사람이 허다’하며 ‘이들이야 말로 의미라는 지지대가 없으면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 기표에 현혹되어 자신과 멀어진 사람들’(장정일, 「‘희생의 희생’에 대하여」, 장정일 칼럼, 한국일보, 2018.12.27)이며 이러한 지점에 미학적인 가치를 아무리 덧칠해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착함’에 대한 집착이자 욕망이다. 이는 ‘시인이라는 기표를 빼면 시체가 되는 사람’의 욕망과 일맥상통한다.



3-2) 반복되는 진정성과 희생의 포즈


이 글에서 수동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방식은 소시민성에 대해 맥락 없이 비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9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꼽히는 소시민성은 거대담론과 대비되는 미시담론, 일상성, 미시성, 가족주의로 호명하는 민족의 연대성과 같이 거대담론을 말하는 90년대 이전의 문학과 다르게 90년대 시는 일상에 대한 체험, 사소한 것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우리 안의 권력, 일상적이고 사물에 대한 관찰을 가능케 하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당대 활동했던 시인들은 자기에 대한 정체성 탐구가 자신들에게 제시된 신세대론을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대 담론을 끊임없이 학습해온 세대이자 순식간에 반체제를 경험했던 세대로써, 저항담론 자체도 억압적이고 지배담론 자체도 억압적이라는 양면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90년대에 와서 이들이 개척하게 되는 것은 탐구의 태도이며 그 대상은 실생활이었고 실존적 조건으로써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므로 단순히 사회에 무관심한, 체제를 재생산하는 ‘소시민’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 없다. 비단 한국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베케트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요소, 유아성과 거세된 능동성은 베케트 세대가 겪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와 전후 환경으로부터 인간의 능동성을 거부하는 것이 유효했기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배경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한국 현대 시인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수동성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 가능하고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중산층의 시선과 문학 권력에 기생함은 수동성을 무효화하는 지점들 중 하나이다. 더불어 최근 데뷔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우후죽순인 수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굳이 특정한 작품들을 모두 분석할 필요 없이 서평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시로 옮기는 시선에서는 진솔함과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는 문보영 『책기둥』, ‘문장은 정련되었고 이미지는 선명하며 구성은 빈틈이 없다’는 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충분한 어둠"과 "충분한 밝기"를 응시’하여 ‘충분한 조도의 아름다움을 획득’했다는 심지아의 『로라와 로라』,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독, 전염하고 선동하는 고독이 아닌 차분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는 고독’을 담은 김소형의 『ㅅㅜㅍ』, ‘"당신도 나도 살아가는 동안 참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정영의 『화류』, ‘일상적 삶의 풍경들을 간결한 터치로 낯설게 녹여’낸 임지은의 『무구함과 소보로』, 그밖에도 박준, 기혁, 황인찬, 이이체 등이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글쓰기는 한국 현대시의 중산층 중심적 시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시인이라는 기표에 언제든 휘말릴 위치에 위태롭게 서있는 지에 대해 경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신인, 신작의 출간 경향은 수동성을 견고하게 만들 뿐이며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수동성은 무료해지고, 무효해지는 성질만 될 뿐이다. 같은 맥락으로 현대 시에 자주 등장하는 희생, 희생하는 태도, 희생하는 자의 시선은 동어 반복적이며 앞으로의 희생은 희생을 희생할 때에만 희생으로써 기능할 수 있다. 신작들의 화자들을 살펴보면 대개 일상 속에서, 구조를 내면화한 개인이 자신의 몸을 해체하고 일상을 해체하는 등 희생적인 태도를 고수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의 대중과의 소통, 독해할 수 있음, 일상으로의 재접속은 이전의 난해한 현대시가 보였던 엘리트주의와 새로운 권력 형성에 대항하기 위한 세대적이고 새로운 시도로써의 성질이라 굳이 부를 수 있으나 수동성이라는 고질적인 주체 없음은 예술가로써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논의에 발 담그기도 전에 공장형 상품이자 행사 goods에 불과하여 탈락이다. 한국에서의 현대 시인의 전망은 과거 정치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 추락하여 이젠 예술가의 후방주자, 또는 후방에도 끼지 못하는 장삼이사다. 물론 이러한 예언이 들어맞을 경우 의도가 아니므로 전략이 되지 못하고 자체적으로 퇴행하는 길을 걸어가는 비평적 검토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만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물론 전망과 미학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충분히 부여할 수는 있다. ‘자신의 시적 개성과 그 완성에 더 주력하고 있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적 완성도에 상당한 공을 기울이는 점은 일시적인 ‘스타일’이나 ‘시적 변혁’에 주력하는 최근의 시적 경향과는 일정하게 차별화되는 점이다. 신인으로서의 새로움은 그들의 개성을 ‘진정성’으로 펼쳐내는 ‘힘’에서 충분히 확인되지만, 그 축적된 ‘내공’이나 ‘노련함’만은 이미 기성 시인들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꾸준한 성장을 보여주리라 기대되는 ‘탄탄한 형식’과 ‘시적 정서’가 지닌 개성은 이들이 시인으로서 오래 동안 한 길을 가며 새로운 시적 전망을 창출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를 품게 하는 이유’.(김춘식, 「'미래파'의 지워진 기원, 그리고 소음 밖의 시인들」, 『월간문학』, 2016년 3월호) 또는 ‘관성’, 김춘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망치의 속성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날 때, 남는 것은 오직 관성이며 무엇이든 두드려서 다른 것으로 만드는 무작정의 생산성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시단이고, 우리의 문단이라면 망치의 운명은 내리치는 것이고 시인의 숙명은 무언가를 쓰는 것, 무언가를 쓴다는 그 맹목성이라는 점에서 소음 밖의 시인들이라고도 명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성’은 여느 상징들과 다름없이 새롭고 맹목적인 미학적 요소이다. 찰스 부코스키가 일종의 태도로써, 이단아로써 수입될 위험이 큰 현장으로부터 한국 문학은 작가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재고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중산층 중심적이며 아카데믹한 편향이 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현대시에서의 언어적 일탈이라는, 이제는 손 쉬워진 창작 방법으로부터 탈출해야한다. ‘진정성’ 담론이 실질적으로 역할하고 있는 보호도 철회해야한다.

장정일의 『고도를 기다리며』 리뷰는 비록 문학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학의 현 사태를 지적하기에 적절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고 찾아갈 줄 모르는 두 주인공의 수동성은 불가사의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시 고도라는 광휘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빛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빛을 꺼버린다.

이 연극의 진정한 절망은 고도가 오지 않는 것에 있지 않다.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유아성과 자기기만은 설사 고도가 오더라도 고도를 알아 볼 능력이 그들에게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작중 어느 대목에서 에스트라공은 자신을 예수라고 선언하고 있으나, 그와 50년을 동고동락했던 블라디미르는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러 넘긴다. 에스트라공은 재림했다고 뻥을 치는 숱한가짜 예수가운데 또 한 명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이런 질문은 지금까지 이 작품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몰랐던 상투적인 독해를 모두 기각한다.

고도는 누구인가’, ‘고도는 왜 오지 않는가’, ‘언제까지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이제 그만두자. 대신 고도가 왔을 때우리에게 고도를 알아 볼 능력이 있는가’, ‘우리에게 진짜와 가짜 고도를 구별할 능력이 있는가라고 고쳐 묻자. 그럴 때, 이 연극의 진정하지만 숨겨진 절망이 나타난다. 인간의 근원적 절망은 고도가 오지 않는 따위에 있지 않고, 고도가 우리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다. 인간은 이미 항상 와 있는 메시아에게언제 와라고 묻는 어리석은 아이면서, 지금 이 순간도 무수한 메시아를 죽이고 있는 모순된 아이다.

장정일, 「고도를 기다리지 말자」, 장정일 칼럼, 한국일보, 2019.05.30


90년대 말, 즉 세기말 문학이 걱정하던 문학의 종말은 이미 왔고 이후의 세대는 종말 이후의 죽은 문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적이지 못하게도 각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과거 문학의 영광을 버리지 못한 꼴과 다름없는 형국이다. 이에 대한 혐의는 다음으로부터 유효하다.




3-3) 엘리트와 도덕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 문학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을 조정할 때 엘리트와 도덕에 대한 지점은 간과될 수 없다. 한국 문단에서는 그 둘의 관계가 당연시되며 문학 권력을 이전의 모습 그대로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다. 김경주의 대필 사과문을 비롯하여 문학 예술인들이 일종의 공인으로써,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고 처신이 똑발라야 하며 정치적인 견해, 지식도 누구보다 앞서야한다는, 여태껏 한국 사회에 존재했던 문인에 대한 역할 기대는 현재까지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80년대 거대담론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문단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지만 엘리트와 도덕에 대한 지점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중산층 중심주의는 여기서 한 번 더 언급할 수 있다. 현 출판 경향은 노동시를 쓰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밀어 넣고 있으며 문단 또한 이를 딱히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문인들은 지식인이자 교양인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시하게 만든다. 사회의 경계 밖에서 언어의 일탈을 실험해보아야 할 이들이 다분히 사회 속에서 안전하게 자기 자신과 작품의 ‘완성도’를 지키는, 또한 도덕적인 존재에 대한 욕망을 의식과 무의식 모든 방면에서 표출해내고 있는 현 상황은 문학적으로, 전혀 성실하지 않다. 찰스 부코스키의 경우, 남들이 말하지 않았던 불편한, 당대에 금기시됐던 주제들을 다룬 작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차대전 이후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려온 ‘아름다운 미국’이 드러내놓고 싶지 않았던 섹스, 알코올 중독, 폭력 등을 과감히 묘사했으며 대중은 그를 불편해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불편함에 자기 자신을 바꾸거나 작품을 고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일관될 수 있다는 것은, 주체성의 확립이자 수동성의 시대 이후 새로운, 각자의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르고 남들과 구별될 수 있다고만 해서 수동성이 능동성으로 쉽게 전환될 순 없다. 이 지점은 김춘식이 백무산의 시를 인용하며 한국 현대 시의 동시대성을 날카롭게 발견한 글의 맥락과 겹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비판의 눈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일한 타협 속에 살았다는 자책은 백무산 시인의 최근 시를 보면, 좀더 명확해 진다. 시가 너무 안일하게 현실 속에 안주했기 때문에 결국 시가 길들여 진 게 아니라 시인이 길들여지고 있었던 건 아닌가. ‘비무장 지대를 바라보며, 한반도 전체를 무장지대로 선언하는백무산뒤집기는 이 점에서 놀랍다.

이 안일한 일상이 사실은무장지대’, ‘힘이 지배하는’, 길들여진식민지라는 사실을 이 시는 아주 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땅이 아닌영토(territory)’, 영토는 곧 점령지이고 우리는 모두 한편으로는점령지의 시민인 것이다. 그래서, 잘 길들여져 왔고, 매일 뇌관이 없는 폭탄을 들고불온하다스스로를 자위해 온 것은 아닌가.

백무산이 80년대를 넘어 2014년 현재의 시점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에는, 이 점에서 길고 평온한 일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해 온 긴 여정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이미 길들여진 사정권 안쪽의 국토/출구를 알 수 없다/나의 상상력이/이로써/무장지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라는 말 속에서 시인의 상상력이 진정으로싸워야 할 대상’, ‘이 무엇인지가 오히려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무장지대’, ‘이 길들임의 영토위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일상과 불화(不和)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 시가 만들어 가야할 새로운 전략의 출발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춘식, ‘불화’와 ‘긴장’을 잊은 문학, 월간 현대문학 2014년 11월호


여기서 앞서 주목해야한다고 밝혔던 ‘착함’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짚어보자면, 최근 시적 알레고리의 한 형식에는 부조리나 삶의 불가능성, 가치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 등 어떤 믿음과 이념에 대해 재구성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불편함, 의심 등의 정서를 통해 현실의 균열을 파악하고 시를 통해 윤리에 대한 도달, 그 가능성을 시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장이라는, 미적 근대성이 초기적인 의미*로 가졌던 자기 갱신적 주체의 생산 시스템의 기획과 영역확보를 위한 장소의 가치는 거대자본을 통해 기반을 마련되어있다. 하지만 각자의 개체들이 자기 갱신에 필요한 사유의 시간은 근대적 시간의 광폭한 가속도 속에서 소멸되고 있으며 충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완성되지 않았다. ‘자연스러움’의 아비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편함’의 미학이자 경향이 대척점으로써 그를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의 취향과 실천이 함께 발현될 수 있는 영역인 ‘미적 영역’과 ‘공적인 가치율’ 사이에 현재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설정된 통일성, 현대 문화를 압도적으로 지배하여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는 그 어떤 것, 그 중에서도 ‘착함’에 대한 강한 불만이 필요해 보인다. 과연 윤리적 주체의 한 패턴인, 저지르고 반성하는 일반적인 행위가 시에서도, 숙명처럼, 폭력과 부조리 앞에서 폭로하거나 울부짖음을 통해(또는 그를 하지 않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더 이상 폭로하지 않음, 울부짖지 않음) 윤리적 가능성을 지니기에 그러한 경향에 함부로 반발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엔 그 ‘착함’, 또는 윤리적 가능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아널드가 제시한 교양, 무질서의 대척점으로의 고급문화에 대한 개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방식과 존재를 부정하여 삭제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미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로 반자본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예술과 문화의 목적(진정성)이 되어왔지만 물질적 가치와 상징적인 가치가 동등한 위치에서 충돌할 수 있던 당대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고 현재의 진정성은 바로 윤리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당대 부르주아 계급에 해당하는 현재의 중간 계급, 중산층은 하방 구조로 편입되고 있으며 하향평준화를 통해 구조는 더욱 양극화되고 있다. 상류층의 대중문화 향유는 공유가 아니라 일일 체험에 가깝다는 것은 대표적인 현상이다. 한국 사회는 상류층의 문화와 중산층의 문화, 하류층의 문화가 각자의 양적 팽창과 대척만을 이루고 있는 문화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재 문화, 예술의 장 안에서 서로 관계하지 않고 존립해나가고 있음은 결국 내부 모순을 해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도 없을 것임을 유추하게 한다. 앞서 발견한 지점들을 요컨대 윤리적 가능성이 진정성이 되었다는 것은 중산층 문화의 분리와 존립 속에서 각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권력자로 불릴 만큼의 많은 자본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권력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적당히 엘리트적 교육을 받았고, 사회를 넘어 세계의 윤리적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자, 즉 정체성 확립을 위한 ‘착한 시민’에 대한 집착과 반성 없는 발악임을 의심하게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공식적인 사과와 처신,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이 현재 문학 현장에서의 진정성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난국과 구상력


현대 문학이 설정하고 있는 자아의 촉발은 한정적이며 앞서 밝힌 현장에서의 문제점으로 인해 실재성을 잃어가는 ‘수동성’은 촉발시킬 수 있는 비아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피히테는 '자아'와 '비아'의 완전한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속에서 이는 상호모순 된 것을 통합하는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아는 그 자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자아의 산물이며, 결코 자아밖에 정립된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자아 또는 주체는 객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아의 규정, 규정된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의 반성은 오직 자아가 대립된 것에 의해 자기 자신을 경계 지운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김재호, 피히테 『전체 지식학의 기초』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한국 현대 문학에서의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감각의 유행과 위치를 통해 확인한 한국 현대 문학의 엄살과 배부름은 이러한 구상력의 필요와도 연결시킬 수 있다. 한국말에서의 구상력(Einbildungskraft)은 상상력과 동일한 의미로 취급받기 쉬우나 구상은 상상력에 포착된 내용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배열할 것인가를 그려보는 과정이며 상상력 이후의 단계이다. 문학에 대한 희망을 가진 채로 이야기 해보자면, 진정한 감각, 정서, 감정은 ‘습관’이나 ‘관성’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현대 한국 문학에서 이전의 습관과 관성으로부터 무관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타협하고 만족하고 소통하기 바쁘다. 최근 현대문학에서 출간해내고 있는 단행본 시리즈,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특히나 아이러니하다. 핀이라는 도구의 역할 그대로,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하여 개별 작품인과 동시에 전시(curation)하겠다는 출간 목적과 동시에 출판사와, 기성 시인들의 심사와 선별을 통해 시를 써내는 현실은 현대문학 핀 시리즈들의 서평과 달리 단순히 ‘섬세한 경쾌함’만을 보여주진 않는다. 출판 시장을 중심으로 문화 기획의 일부만 되어버린 시인들과 창작하는 것만으로는 예술가, 창작자라는 역할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한국 문인들의 위치, 그 문제점들이 분명해지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윤리적 가능성에 대해 말하며 부조리와 폭력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으나, 그들이 몸담고 있는 현장은 자본주의적인 문화 기획의 일부로만, 미학적 반성과 고민 없이 출판사의 부름에 응하고 창작하는 자들의 친목 모임에 불과하다.

구상과 새로운 주체의 대두를 위해 바라보자면 총체적 난국이기만 한 한국 문학의 현장을 직시할 필요를 느끼며 이 글이 그 시작이기를 바란다. 작가를 비롯한 독자들과 비평가, 또는 문학과 관련 없는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나쁜 사람은 왜 존재할 수 없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무해하지만 않으면 용인되는 사회적 경향을 반성해야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수동성, 도덕 발달 단계에 있어서 미성숙함을 자세히 다뤄야겠지만 문학 현장 비판의 목적으로 말하자면 앞 문장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한국의 현대 시가 지향하고 있는 무한반복적인 자기 탐색과 파괴, 반성은 엄살과 배부른 소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 보들레르의 미적 근대성은 …고립성과 폐쇄성, 위험과 난항을 감수해야만 부르주아적인 세속성과 모더니티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차별화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보들레르의 미적 근대성은 압도적인 부르주아적 근대성으로부터 예술의 자율성을 고수하기 위한 장치이다. 상상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서 미(美)는 독자적인 것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춘식, 「동인지 문단과 미적 근대성」, 『1920년대 동인 문단의 미적 근대성』,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P.10


** '자아'의 정립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비아'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아'가 '비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서는 '자아'가 자신을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객체가 없이는 주체도 없다는 것이 피히테의 생각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규정하는 자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비아'를 제한하는 것이 바로 '자아' 자신이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피히테는 '주체'가 없이는 '객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피히테의 『전체 지식학의 기초』에 의하면 '자아'는 규정하는 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자이다. 규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에 있어서 '실재성', 달리 말해 '활동성'은 '자아' 자신 속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자아' 속에는 이 '활동성'이 지양되고 이에 대립하는 것이 정립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대립자를 피히테는 '수동성'(Leide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수동성'은 단순한 상대적 부정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적 부정성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이제 이러한 자아의 활동성과 수동성을 통해 앞서의 모순은 해결될 수 있다. '비아'가 '비아' 자체로만 볼 때에는 어떠한 실재성도 갖지 않는 '부정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아'도 '자아'가 수동적인 한 상호규정의 법칙에 따라 '실재성'을 갖게 된다. 자아의 수동성을 피히테가 '촉발'(Affektion)로 이해하는 한 피히테는 이제 '비아는 자아가 촉발되는 한에서만 자아에 대해 실재성을 가지며, 자아의 촉발이라는 조건 밖에서는 어떠한 실재성도 가지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김재호, 피히테 『전체 지식학의 기초』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필자 소개


한계

안녕하세요. 작가 한계입니다.



조회 54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