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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출판 ;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독립 출판 ;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현 ‘젊은 작가’에게 가해지는 문단 구조의 폭력과 그 현장에 대해서



목차


- 문학이라는 상징 권력

- 1. 현대 문학의 시대성

- 2. 기존 문단 구조의 폭력과 그 현장

- 2-1. 두 가지 개념의 문학성과 단절된 문학의 장

- 2-2. 생존하는 문학에 대하여

-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행위



문학이라는 상징 권력


90년대부터 출판사와 작가의 지위가 동등해지기 시작했다. 편집자의 이름이 책 뒷면에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출판사들은 자본주의의 맥락에 따라 주식회사 수준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시에 해당하는 랜덤하우스코리아와 민음사의 출현, 성장과정으로부터 대중적인 영향력의 중요성, 언론의 힘, 기업 청탁 방식의 출판사와 작가 사이의 선(先)계약 조건, 선고위원의 권위 등 새로운 권력 소재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판은 또 하나의 상징적인 권력이 되었고 문학 출판에 대한 권력(젊은 작가들을 영입하려는 주도권 싸움)은 문학이라는 상징 권력의 위치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90년대 이전은 문학이 출판의 중심이었지만 이후 현재까지, 문학은 출판사의 브랜드 이름을 선명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만 할 뿐이며 문학이 차지할 수 있는 권위의 비중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문학 출판물은 그 자체만으로 경제적 이익을 주지 못하며 출간에 따른 자본 소모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문학이 가지고 있던 상징 권력은 출판사가 경제적 이익과 브랜드 이미지 유지의 가치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배제되어가고 있으며 출판업계는 상업논리에 따라 문학을 하나의 출판 전략 중 하나로 전락시키고 있다. 물론 문단에서 인정받았거나 잘 쓴다고 내로라하던 작가들 또한 브랜드 가치가 있는 출판사에 자신의 책을 내길 원했다. 실제로 대형 출판사의 시선이나 시리즈에 자신의 책을 얹고 있는 작가들은 이미 인정받은 작가들이다. 작가들이 출판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그 흐름에 문제적인 지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출판과 언론, 자본의 비중이 커지게 된 문학의 동향에 반하며 출현한 미래파와 함께 시작된 작가들의 적극적인 인정 투쟁이 그 것이다. 하지만 비판은 그들이 다시 출판 전략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파의 시도는 다시 하나의 판매 전략이 되어 기존 구조 속에 갇히게 되었으며 스타성을 부여받는 방식으로만 일단락이 났다. 김경주, 황병승과 같은 형식과의 불일치를 내세운 작가들이 급속도로 주목받고 나서 활동에 추진력을 받았지만 문단 내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류들만 만들어지며 초기의 목적이 배신당하게 된 경우가 그 예시다. 현재 중심적인 스타로 활동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의 기반에는 출판, 상업의 논리가 문학에 개입하게 된 것이 크다. 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스타성을 부여받은 작가들은 대거 등장하게 되었고 오히려 모두가 ‘스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일반 독자들은 미래파 이후의 시인들의 이름을 거의 알지 못할 정도로 현재 ‘젊은 작가’가 포함하고 있는 범주는 포화상태이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출판사들은 시선, 시집을 재출간, 재편집하여 상품성을 추가해 새로운 시리즈를 구성하며 상업논리를 이어나가고 있다. 대형 서점의 가판대 위에는 서정주, 백석, 기형도, 윤동주 등의 시집들이 현대식으로 디자인된 시선을 끌만한 표지를 달고 ‘리뉴얼’을 표방하며 ‘현대 시’의 얼굴을 책임지고 있다.1) 해당 출판사들은 문학 작품 복간 또는 재출간에 대하여 감수성 회복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지만, 실로 상품 시장의 복고 열풍에 따른 높은 성공률을 감지하고 출판사들도 그 열풍에 뛰어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망방향성, 무기력, 대상의 실체가 없는 박탈감이라는 현 시대 문제를 70~90년대 작품들로 메꾸고 있는 상황이며 국내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나타날 수 있는 공간 형성을 유보하여(개개인의 작가 역시 필명으로 대변되는 ‘작가’적인 상징권력을 잃어왔으며 대중에 한해 현재는 거의 소멸했다) 창작 불가능 상태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미래파 담론 속에서 찬반을 벌이며 성장하게 된 작가들이라는 점과, 위와 같은 과정 속에서 현재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대립이 선명해지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어야한다.


현대 문학의 시대성


시선,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자본과 결부되어있는 현 문학 판에서 출판사가 문학 작품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어떻게 엮어왔는지에 대해 또한 주목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문학판 내의 문학 작품들이 문학 내부의 문학성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 논리에 따라 흘러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시점을 유지한다면, 10년 만에 시집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의 대중적인 성공 또한 그 성공에 분명히 개입되어있는 시장 논리를 배제하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박준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통해 앞으로의 시가 편지글과 에세이를 표방해야 한다고 말하며, 시집 제목의 저의에 대해서도 “책 제목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어야 하지만, 상품으로써의 가치도 생각해야 하잖아요.”라고 밝힌 적 있다. 다음은 시의 목적성에 대한 박준 인터뷰의 일부 발췌문이다.


영화로 치면 상업영화, 예술영화가 있듯이 시도 대중적이고 친절한 시가 있는가 하면 전통적인 시, 예술적인 시, 사회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시가 있는 것 같아요. 대중들에게 쉽게 접근해서 시의 계단을 낮추는 작품도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가끔 SNS시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요. 굉장히 고마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시의 시대였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시단에 남은 훌륭한 시인이 있었고, 문학사적으로 한 번도 증명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을 시로 유입한 대중적인 시인들도 많았어요. 일종의 하이틴 시집이라 불렸는데, 전 이 분들의 문학도 굉장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공존해야 한다는 거예요.

거칠게 표현하자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옮기는 거죠.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아무래도 첫 번째 목적은 시를 시답게, 혹은 문학답게, 예술답게 쓰는 일이에요. 반면 시는 시집이라는 상품을 통해 유통되잖아요. 시가 어떻게 읽힐 것을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시를 많은 독자와 공유할 수 있을까가 두 번째 중요한 목적이에요. 시를 시답게 만드는 첫 번째 목적과 함께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 채널예스 유명인 인터뷰시리즈 ‘박준’, 2017.07.18. 중 일부


현대 문학은 자본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다. 여전히 상징 권력, 문학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과 무관하게 생존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문학은 문학성뿐만 아니라 시대성을 절대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시대성에 해당하는 현 작가들의 인정투쟁, 1인 혹은 소수 출판사를 통한 독립출판 문예지들의 발생 지점과 목적성 통해 전체 현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먼저, ‘독립’의 발생 지점에 해당하는 문학성이라는 개념의 분화이다.


두 가지 개념의 문학성과 단절된 문학의 장


현대 문학 중에서 언어가 집약되어있는 현대 시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언어감수성의 최대치가 평준화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젊은 시인’들만 존재하는 곳은 그 세대의 언어 감수성을 재생산하고 새로운 세대를 형성해내지 못하며 시대적 감수성의 단절 구간을 서서히 확대시킨다. 세대를 이어나가야 할 다음 시인 세대에 대해서 서로가 유사 언어에 대한 호기심으로만 접근할 가능성이 현재로서 크기 때문이다. 지망생들의 습작현장에서도 ‘새롭다’라기 보다는 ‘재밌다’라는 평가로 소재, 단어, 말투 등 미시적인 소재들로 통용되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미 ‘시의 문법’이라는 것이 고착화되어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눈에 띌 만한 것들, 순간적인 주목을 주는 일종의 수단들로 호평이 가능하다는 현상은 일정 획일화된 시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 문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만 보여주는 형식은 이미 기교와 문법이 평준화된 현재에 새로운 알레고리를 제시할 수 없다. 현 작가들이 추구하는 ‘현대 시’에 대한 개념은, 폐쇄적으로 자신들의 방식을 소모해나가며 총체적인 흐름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며 존재했다. 이를 삶의 새로운 알레고리를 발명할 수 없는 시대를 조명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방법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문학판 전체는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해야한다. 이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90년대 시인들이다. 현재 중간자적 위치로 90년대 시인들이 다시 조명 받고 ‘활발히’ 활동하는 현상에 대해, 그 의의와 감수성의 시대적인 단절에 대한 요인들을 함께 밝힐 수 있다.


그 전에, 감수성 단절에 대한 문제가 현상된 최근의 사건으로 2013년 중앙북스에서 발간한 하상욱의 『서울 시1』이 스테디셀러에 오르고, 연이어 나온 『서울 시2』가 현재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대중문학으로서의 시의 단면을 보여준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현대 시의 메타포 과잉과 언어적 폐쇄성은 2000년대 이후 일상적인 공감이 불가능한 감수성의 단절을 시대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대중들에게 오히려 감수성 단절의 간격을 넓히는 차원으로 나타났다. 이에 한 두 문장의 키치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언어유희가 실린 하상욱의 『서울 시』 시리즈 1, 2는 시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와 대중이 만나는 교차점이 교과서에서만 가능하게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시대적인 문제점들이 이에 기여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 그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심미성이 상품이 상영하는 쉽고 화려한 표피 밑에 고여 있으며 표출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90년대 시인들에게 감수성이 시대적으로 단절된 구간에 위치한 존재들로 목격자와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해야 한다. 그들은 결국 문학이라는 텍스트 또한 읽는 사람들의 동요와 참여를 통해서만 완성이 된다는 것을 현재 전략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존재와 풍경 호명을 통해 감성의 시대적인 단절을 메울 수 있음을 당대에 보여주었다. 그들의 중간자적 위치는 젊은 시인과 노년의 시인이라는 이분법적 계층의 문학판 구조에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로 총체성을 유지시켜야 할 주체적 의무가 있다. 새로운 작가들의 인정 투쟁은 그러한 흐름과 바탕 속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다시 이어질 수 있다. 비단 하나의 계층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파와 기성 문인들과의 대립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기성 문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상징적인 영역을 축소시킨 채 물러나며 변화에 동참하지 않았다. 포기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문제에 대한 당위를 인정해버렸고 문학 장의 재구축은 오롯이 젊은 작가들(도구가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은)의 역할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시인들의 수동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이유는, 기존 문단의 폭력적인 구조에 동참,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으로 독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해당 작가들이 진보를 자처하고 있지만 실상 진보에 해당하는 작가는 현재 출현된 바 없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임 위원장이 되었다…… 구설의 핵심은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문인인데, 예술위원장까지 문인이 맡는다면 지나친 문단 편중이 된다는 거였다. 이런 잡음을 의식한 문체부의 한 관계자는 여러 가지 해명을 내놓으면서 “문학은 모든 예술 분야의 맏형에 해당하는 장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이런 수사는 낯설지 않다. 문학 종사자들은 입만 떼면 “언어예술로서 문학은 한국 정체성의 근간”(오창은)이라느니, “문화예술 생태계의 근간인 ‘기초예술’로서 문학”(고명철)이니 하는 말을 쏟아낸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시 혹은 문학은 그 시대 문화예술의 맏형, 그 이상이었다. 교양을 한 사회의 소통 기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시는 가히 조선시대의 유일무이한 교양이었다. 문학에 대한 교양이 없이는 관직에 나기기도, 직무를 수행하기도, 성공을 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문학 교양을 모르고서는 사교생활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대는 그런 시대도 아니요, 문화예술 분야 어디에도 장유유서는 없다……

즉, 이미 생존, 또는 정체성으로서의 문학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 작가 지망생들과 신인들에게 그들이 물러나는 듯하며 선을 그은 영역은 이미 다다를 수 없는 권력적인 위치에 대한 포고였으며 문학이라는 명예와 수단만이 남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김명인, 권성우, 반경환, 신철하, 오길영, 조영일, 최강민 같은 일군의 문학평론가들을 일컬어 ‘문학권력 비판론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문학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대형 출판사와 거기에 빌붙은 평론가 무리’를 문학권력이라고 규정하고 그것과 싸운다. 하지만 ‘문학권력’은 그들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문학권력이란 ‘문학’ 그 자체이다. 거대 야당이 고작 강담사에게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을 맡기고(이문열, 2004), 신임 대통령이 중요한 해외 순방에 상스러운 입담꾼을 동반하고(황석영, 2009), 두 명의 유력 대통령 후보가 병든 망상가(김지하, 2012)와 채신머리 없는 기담가(이외수, 2012)에게 지지를 구걸하는 일은, 유독 한국에서만 벌어진다. 열거한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문학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도, 문학이 수석이나 분재 취미가 절대 다다를 수 없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 장정일, 칼럼 ‘문학이 권력을 잃어야’, 한국일보, 2017.11.29

마치 기득권이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현상의 이면에는 사실 권력구조가 내면화되어 고착되고 있었으며 문학 내부의 문학성은 외부적인 권력 구조로부터 버려지고 파편화되어 문학의 장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체계’가 설립되어 있는 현 문단에서 문학을 통한 권력 유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규범과 질서로부터 단절이 기인했으며 문학을 명예와 수단으로 이용해온 문인 또는 문단 관계자들의 배제와 방관이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학성을 가장한 합리성이다. 그들은 이미 문학의 영역이 아닌 문학을 내세운 거대 권력구조 속에서의 정치적 영역에만 소속되어 있으며, 더 이상 현 시대의 문학의 생존에 대하여 논의할 자격이 없다. 함부로 정치성을 발화할 수 없는 직함적인 존재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직책이나 직함의 권위 형성에 연루한 모든 이들을 일컫는 것이므로 대상은 실체를 가진다. 노년의 시인들의 역할로 자리 잡은 언어적 ‘미학’이라는 말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권력적으로 수단화되어 더 이상 소통할 수 없는 감수성으로밖에 독해되지 않는 까닭이며 그 또한 단절에 관한 또 하나의 지대한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생존하는 문학에 대하여


이러한 폐단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황인찬2), 유희경으로 대표되는 젊은 작가들은 1인 출판, 2인 출판, 등단 여부와 상관없는 독립출판 시집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거나 대형 출판사, 대형 서점으로부터 벗어나 독립 서점(위트앤시니컬, 신촌)을 내기도 했다. 물론 이미 등단하거나 문단에서 한 차례 이상 거론되며 스타성을 부여받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표방하여 권력을 차용한 것이지만 목적은 자신들이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기성 문학의 공간으로부터 탈피하고 권력구조나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지 않은 빈 공간에 문학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은 이러한 목적의식을 촉발하는 사건이 되었다.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한 문단 관계자들의 반응은 안일한 문제의식이라는, 기성 문단권력의 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시인협회 이현승 사무총장은 “시인협회는 큰 행사를 치르느라 심리적 여력이 없다. PD수첩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왔었지만 거부했다.”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 밝혔다. 시인협회는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전한 바가 있지만, 의혹만으로는 입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회의 안상학 사무총장은 “탈선(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한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학생 연대)의 활동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추후 내부적으로 입장을 정리해서 답변을 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문학과지성사 윤명무 주간은 문지문화원 사이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다. 당분간 교육 프로그램 진행을 못하게 됐다. 내부적인 점검을 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라고 답했으며, “사안에 따라 논의 중이다. 일반 회사처럼 오너가 결정하는 구조가 아니고, 여러 동인들이 논의해야 하는 과정에 있기 떄문에 판단이 빠를 수가 없다.”며 입장 표명이나 전달이 느릴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뉴스페이퍼-문학신문, ‘탈선의 요구안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2016.11.24


문인단체와 출판사의 미온적인 반응에 작가들이 직접 나섰지만, 그 과정에서도 권력의 침투 현장은 비일비재했다.


변화를 촉구하는 몇몇 작가들이 독립된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문학의 장을 구축하려는 시도와 이전의 구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대형 출판사의 이름에 기대지 않는 문학, 독자들의 후원을 통해 자본을 마련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독립문예지 『젤리와 만년필』는 2017년 5월 독자들의 후원, 크라우딩 펀딩으로 창간되었다. 블랙리스트 사태로 폐지되었던 '우수 문예지 발간산업'이 복귀되고, 선정한 문예지들 중 문학동네와 은행나무,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등 대형 출판사 속에서 유일한 독립 문예지인 그들의 존재는 문제적 위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젤리와 만년필』을 시용한 출판사 『베개』의 편집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조원규 시인은 『베개』 내 유일한 등단자로, 등단이라는 인정제도를 거쳐야만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했다. 위계 없는 수평적인 만남의 장으로의 문학하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누구든 글을 실을 수 있다는 베개의 공간은 열린 공동체를 모색함으로써 전략적으로 기존 문단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더 멀리』의 박시하 시인은 원래 디자인 전공으로 문학과 무관한 곳으로부터 등단을 통해 문단에 입성했다. 박시하 시인은 “등단하고 나서도 문단에서의 관습을 잘 몰랐다.”고 말하며, 공부란 문학을 통해 노는 것이었고, 문단에서의 관습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더 멀리』에는 평론가들에게 시를 써보라고 청탁하여 제목을 '네가 써봐'라는 실험이 등장한다. 막연히 실체 없는 누군가로 대변되어오던 은폐 구조와 이면의 폭력적인 문학 권력구조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위트적 기획을 보여준 것이다. 소설전문지 『악스트』의 편집위원을 지내고 있는 백가흠 소설가는 “매번 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하고 문예지를 통해 활동을 이어감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조차 읽지 않는 문예지가 양산되는 것에 대한 의식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왜 그렇게 되었나를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문학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문학은 대단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누가 문학을 대단하게 만들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판을 짜는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다.”며 “쉽고 누구나 접할 수 있고 다양하고, 그리고 우리가 잘 할 줄 아는 소설에 '읽기'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전달하면 좋겠다는 취지.”라고 『악스트』의 취지를 설명했다.

즉, 문학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고찰하며 문학이라는 상징 권력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90년대 말 문학 출판사의 이념적 지향이 무너지며 소수의 작가들에게 돌아가며 원고를 청탁하게 되었고, 문예지는 늘어났지만 문학적 다양성은 축소됐다는 것”이라는 유희경 시인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의도치 않은 권위가 생겨나고 의도치 않은 힘이 생겨난다면 과감하게 또 폐기해야 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현재 하고 있는 중”이라는 문학성 재확립에 대한 방향성 제고와 이어지며 열거한 작가들의 대답을 대변하고 있다.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행위


이러한 시도들은 비단 기존 문학에 대한 반대로서만 조명 받는 것이 아니라, 상업 논리가 문학에 결부되어 상업출판의 구조를 비판하는 서적이 대형 서점의 매대에 오르는 식의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구조에서의 해결책 모색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사람은 100명이다. 하지만 계간지에서 문학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100명에서 150명이면 포화이며 나머지 신인들은 오히려 등단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보다 더 문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결국 다양한 취향의 독자가 있더라도 계간지, 출판 우세의 구조에 의해 새로운 독자들이 원하지 않는, 시대상으로부터 단절된 작품만 실리는 잡지가 여러 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문학잡지는 늘어났지만 실제로 지면이 늘어나지는 않는 것 또한 상업논리의 이면을 보여준다. 청탁과 별개로 출판사들은 발표지면을 줄이고 있으며 문학은 오직 당위로만 존재하고 있다.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들은 전체적인 시스템, 전체적 자각을 통한 돌파구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전 문학 권력이 새로운 작가들에게 행한 배제로서의 단절은 오히려 자신들을 공공영역 속에서 실체화시키고, 그들의 구조적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정치성 발화의 기회로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의 ‘행위하는 능력’에 대한 문장에서 다른 모든 사회계층에 적용된다는 아렌트의 전제를 바탕으로 ‘정치인’을 ‘문단(으로 표상되는 문학 권력구조 유지에 포함되어있는 문인 집단)’으로 교체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된다.

행위를 하는 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있다는 말에 대해서,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대중뿐만 아니라 문단조차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문단은 ‘전문가 집단’에 포위돼 있어요. 따라서 이제 행위와 관련한 문제는 문학인과 전문가 사이에 놓여 있어요. 문단은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해요. 문단이 혼자서 세상만사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런 결정을 현실적으로 내리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죠. 원칙적으로 보면 항상 서로 의견이 모순되게 마련인 전문가들의 조언을요. 그 과정에서 상식이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죠. (여기서 상식은 모든 이가 공통으로 가진 감각, 심사숙고를 통해 모든 타인의 표현 양식을 고려하는 판단 능력이라는 칸트의 문장을 전제한다.)


- 한나 아렌트,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요? 언어가 남아 있어요.’,

『한나 아렌트의 말』, 마음산책, 68p, 69p

그렇다면 상식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누구일까, 현재 ‘문학인’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전문가’를 자처하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문단을 대변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모든 이가 공통으로 가진 감각’, 상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칸트의 정의를 공유할 수 있는 문학성에 대하여 여태 모든 타인의 표현 양식을 고려하는 심사숙고의 과정이 정말 있었는지, 공통으로 가진 감각이라는 것이 왜 단절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을 보여줄 수 있다. 비단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존’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학에서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각자의 모든 행위들은 이에 더욱 힘을 가지게 되며 유예하던 문제들이 부딪치게 되는 지점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사실 독립 문예지, 출판, 서점들이 새로운 시도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편집자 또는 기획자로 불리는 문인들이 다시 문학 작품을 선별하고 하나의 기획을 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개인들이 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굳이 문학이어야 하며 문학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요지이다. 각자의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이유들은 전부다 절대 같을 수 없지만, 그 이유들로 비롯되는 언어적인 발화, 문학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공적인 영역이 형성되는 것이고, 그곳이 이념으로서의 문학, 문학성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글의 취지는 계층을 나누고 구조를 가시화하여 분쟁지점을 만들려 했기보다는 문학이라는 상징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각자의 언어를 활성화시켜 끊임없이 이런 문학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언어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태도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다. 긍정하고 말았던 사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폭력적이었고, 얼마나 큰 폭력으로 다가올지에 대해 인지해야한다. 또한 거대 권력구조 속에서 은폐되어왔던, 각자의 정치성이 구현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 현대 문학의 판은 현재 왜 이를 문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해야할, 그리고 대답할 수 있는 시점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1)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시의 시대'를 이끌었던 시집들이 재출간 대열을 이끌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1987년 시집 '나는 너다'가 절판 20여 년 만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복간됐다. 지난해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1979년 초판)가 창비에서, 박노해 시인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년 초판)이 느린걸음에서 개정판으로 나왔다. 소설과 수필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문학과 지성사는 1960년 '새벽' 11월호에 처음 발표됐던 소설가 최인훈 소설 '광장'의 55주년 기념판을 냈다. 문학동네에서 최근 펴낸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 7권은 1977년 첫 산문집을 포함해 1990년까지의 산문집들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추려내고 재편집한 것이다. 황석영 선생이 엮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문학동네)' 10권도 현재의 작품들이 포함돼 있지만 100년간의 소설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복고'다. 작가를 둘러싼 생활상, 사회상의 '옛 얘기'가 황석영 작가의 해설에 담긴 '명단편 101'은 출간 2주만에 10권 모두 중쇄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네이버뉴스 발췌, ‘복고의 시대, 문학까지 재출간·복간 바람...이유는?’, 2015)


2) 황인찬은 독립출판사 읻다를 통해 2015년, 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와 2017년, 위트앤시니컬이 기획하고 출판사 아침달이 제작한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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