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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진실을 말함"에 대하여



"문학적 진실을 말함"에 대하여

-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서의 「부처님 근처」와 「불신시대」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서 저자 권명아는 공동체에서 추방된 부당한 죽음이 애도를 통해서 ‘생존’에 대한 책임을 문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여전히 삶의 어떤 형식들에 대한 슬픔, 죽음에 대한 감응(respond)가 촉구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또한 동시대 몇몇 작품들이 ‘윤리적 의식의 자리’가 만들어내지 않고, 끊임없이 죽음으로부터 온 자책감과 부채감을 “청소”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공동체로 정상화”할 뿐이라 한다. 그는 공동체에 익숙한 삶을 정상화시키는 방향으로 죽음에 대한 감응이 나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물으며 처음과 끝을 맺었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자임하는 여러 행위 주체들이나 영매를 자임하는 행위 주체들을 통해 죽음에 대한 감응과 애도를 진행 중인 “문화, 예술을 자칭하는 자들”을 비판하며 말이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작품과 그의 서술들이 해당 비판에 마땅할까? 억지로 끼운 듯한 부분들이 종종 보인다.



‘문학적 진실’이라는 표상


먼저 그는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박완서, 「부처님 근처」)이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공적인 애도가 금지된 죽음, 그 불가능한 애도의 작업 대신 온갖 애도 산업과 치유 종교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풍경을 작품이 흥미롭게 묘사한다고 말한다. 인용하기에 앞서 “타인의 죽음이 초래하는 삶에 대한 불안감과 자기보존본능”에 주목할 것이며 죽음을 ‘해소’하지 않고 삼켜진 죽음과 삶의 갈등 너머로 향하는 의지를 빌려온 것이라 비록 밝혔지만 “불가능한 애도의 작업” 대신 행해지는 “온갖 애도 산업과 치유 종교들”을 비추기엔 비약이 있고 결이 다르다.


나는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길 쏟아놓길 단념 못하고 있었다. 어떡하면 그들이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까, 어떡하면 그들을 재미나게 할까, 어떡하면 그들로부터 동정까지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심심하면 속으로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의 비위까지 어림짐작으로 맞춰가며 요모조모 내 이야길 꾸며갔다. 나는 어느 틈에 내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토악질하듯이 괴롭게 몸부림을 치며, 토악질하듯이 시원해하며. ( 「부처님 근처」 )


박완서의 문학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 이선미는 “직접 말하기의 서술방식을 통해 박완서 자전소설의 서술자는 서술시간을 환기하면서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사실을 사실대로 발설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 자체로 드러냄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의 내면화 양상을 비판”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상우, 나소정은 ‘복수’를 꿈꾸는 서사전략이 ‘치유’의 과정과 맞물려 나타난다고 보며, 박완서의 글쓰기는 상처를 치유하고 망령을 토해내는 전략이라고 읽어냈다. 박완서의 문학에서 죽음의 시각이나 의식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나 연구는 없으나, 인용한 문단과 기존 분석에 따르면 ‘토악질’ 또한 애도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물론 삼켜진 이물질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불가능한 애도를 드러내고 그것의 기록화, 고정을 통해 “너머”를 향한다는 독해도 가능하겠지만, 저자는 “온갖 애도 산업과 치유 종교들”을 휘발성으로 변질시키기 위해 작품들을 현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모순적인 맥락(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권명아는 죽음에 대한 감응과 애도를 진행 중인 문화, 예술을 자칭하는 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문화, 예술인이 있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불가능하다. 이는 본격문학과 대중문화를 분리시키려는 담론과 맞닿아있으며 그 담론에 대한 해명이 있기 전까지는 대중문화에 대한 본격문학 지향자의 콤플렉스적 표현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에서 본다면 모든 작품들은 ‘최선의 애도’ 중 하나일 뿐이며, 비평에 따라 손쉽게 바뀔 수 있을 뿐 같은 층위의 작품들이다. 여기서 정상화의 욕망과 대중적인 인기의 상관관계를 공식화시킨 것을 의심해볼 수 있다.


거칠고도 말랑한 손의 희미한 온기, 손목에서 뛰는 약한 맥박, 그것만 없다면 지금 내 품의 어머니는 꼭 죽어있는 것 같았다. 오오, 죽은 사람, 참 이렇게 고운 사상(死相)도 있겠구나! 이 평화로움, 이 천진함, 나는 별안간 세차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어머니는 지금 잠드신 것 같은 고운 사상을 내게 보여줄 게 아닌가. 나는 그곳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운 죽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흉한 죽음이 얼마나 집요한 저주인가를 알기 때문에. ( 「부처님 근처」 )


박완서의 소설로 돌아와서, 위 인용구문에서의 “사상(死相)”은 재현을 통해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행위, ‘시체’를 응시하기보다는 영매에 가까운 소재로 출현한다. 저자는 박완서가 「부처님 근처」에서의 죽음에 대해 “육친적 근친성의 형식으로만 감응하는 한 그 슬픔은 애도의 윤리, 다른 말로 하자면 ‘문학적’ 진실에 이르지 못한다”고 밝힌 고백을 먼저 인용, 이를 적극 차용하여 최근의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과연 이러한 의미의 ‘문학적 진실’ 혹은 애도의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이어서 육친적인 근친성 속에서만 슬퍼하는 애도의 윤리, 타자의 타자성의 자리는 불가능하고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때에만 ‘문학적 진실’의 자리가 마련되지만 오늘날 ‘문학적 진실’은 슬픔의 피붙이적인 형식이 소설의 본래적 형식이라는 그런 감각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편집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문학적 진실’이라는 표상, 즉 그가 지키고자 하는 문학의 고유성이 바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속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문학이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때에 대한 향수처럼 ‘애도’의 가능성을 새로운 역할로 부여하여 복고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그가 대표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엄마를 부탁해」, 「해운대」는 대중문화의 장에 포섭되어 있다. 비단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현대가 예술과 미학의 필연적인 실패, 새로움의 실패 그리고 과거 속으로의 감금을 드러내는 문화로 구성되고 있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장에 따르면 “평평함과 깊이 없음”의 문화, 새로운 종류의 피상성의 문화이자 현실 감각이다. 권명아의 논의는 ‘문학적 진실’과 ‘작가 공동체’를 언급하며 자칫 텍스트 자체에 대한 비판보단 문학이라는 표상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발언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특히 “객관적 폭력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통해 빚어질 수 있는 것이다"라는 발언은 다시, 그가 주의하고자 하는 주관적 폭력으로 회귀하여 문학적 진실을 매개로 슬픔을 감응하는 피붙이적인 형식의 폭력성을 ‘식별가능한 행위자’로 형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진실에 가깝지 않은 행위자들을 배제시키며 ‘6‧9 작가선언에 참여한 “불편한 공동체”의 친구들의 유의미함으로 귀결되는 것도 의혹이 제기된다. 이러한 글의 흐름은 대중문화 전면에 대한 일종의 문학적 콤플렉스가 없지 않아 보이는 까닭이다.



‘정치적인’에 대한 해명


글이 쓰이고자한 바에 의거하여 타자의 타자성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표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박경리의 「불신시대」이다. 「부처님 근처」가 개인의 한계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고 단정했을 때, 「불신시대」의 진영은 새로운 구성을 위한 ‘청소’를 과감히 자행한다. 권명아의 말에 따르면 죽음을 심문에 부치지 않는 정상화를 욕망하는 삶이자, 복고적인 보수적 퇴행의 양상에 해당하는 자기 서사를 산출하는 이 시대의 인간의 삶에 불구하다. 하지만 진영의 행위는 “공동체의 정상화를 욕망하며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어내지 않음”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모든 괴롬은 내 속에 있었다. 모든 모순도 내 속에 있었다. 신도, 문수의 손결도 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곳에도 실제 있지는 않았다. 나는 창기(娼妓)처럼 절조 없이 두 신전에 참배했다. 그리고 제물과 돈을 바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문수와 나의 중계를 부탁한 신에게 주는 수수료였는지도 모른다. 중의 몇 끼의 끼니가 되었다. 결국 나는 나를 속이려고 했다. 문수는 아무 곳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 「불신시대」 )


주체의 상실을 통해 구조를 비판할 때, 문제는 다시 주체가 우선인지 구조가 우선인지를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체와 구조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적이나 배타적인, 이중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진영이 겪은 일렬의 부조리한 과정들, 저자가 피상적인 죽음 해소라고 읽어낼 법한, 은 ‘무한히’와 ‘외로움’밖에 해명할 수 없었던 텍스트와 별개로 구성해나갈 수 있는 자로써의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등가교환을 염두에 두고서 추구한 합리적인 방식으로써의 이해관계는 기초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구성된 시민사회의 질서를 가능케 했으나, 진영이라는 지점은 그 질서가 상이한 이해관계의 갈등과 적대를 언제나 내포하고 있는 위태로운 구조이며 적대성을 통제하고 있는 도덕을 고발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분법적 사고로 “너머”를 향유한다는 피상적인 사유에 머물지 않고 있다. 일례이지만, 단순히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익숙한 서사”라거나 “가족 서사의 복귀와 같은 문화적 현상 등은 세계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보수적 퇴행의 징표”라고 분석하는 것과 더불어 “형재애적인 공동체로 환수될 것인가”의 여부, 국소적인 문학의 장(場) 내부로 귀결하는 식의 “심문에 회부했다”는 것은 해당 텍스트에서 ‘정치적인’이 쓰인 당위를 해명할 수 없다. 문학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여 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 「불신시대」 )


위 인용문에 대한 서술에 앞서, 진영의 마지막 행위, 결단을 인용한 이유는 「부처님 근처」와 비교가능하며 ‘애도’에 대해 더 새롭고 적합한 조명임을 말하고자 가져온 것이 아니다. 두 작품의 비교를 통해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의 논지를 다시 보충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본질화하고자 하는 문학의 특성에 대한 내부적인 반증에 해당한다.


진영이 죽은 아들의 애도를 통해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죽은 아들을 성공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진영이 필요로 하는 애도의 행위란 다만 “타다 말고 불꽃이 잦아지”기 때문에 “휴지를 꺼내어 타다 마는 사진 위에 찢어서 놓게” 하는, “사진이 말끔히 타버”려 “노르스름한 연기가” 차차 가늘어지기 위한 포즈, 부차적인 행위일 뿐이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소년병” 이야기*는 진영이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피난하던 도중 본 “피가 철철 흐르는 시체 옆에 아이”로 이어지고 곧 자신의 아들 문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영은 마침내 구역(嘔逆)을 느낀다. 하지만 「부처님 근처」에서 ‘나’가 피부 근처에서의 애도는 애도가 아님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던 시도와 그로부터의 ‘이물감’과는 다르다. 진영의 시선은 “구역이 나올 정도로 자기 자신이 싫었다”며 이물감을 한 문장으로 축약시킨 후 바로 시선을 전환한다. 진영은 곧 거짓말이 뻔해 보이는 계주 아주머니와 무신론자였지만 영세를 받게 된 상배(相培), 신발을 도둑맞을 까봐 신발을 싸들고 가는 신자둘, 미사를 올리던 중에 시뻘건 불덩어리처럼 나타난 상상 속의 헤살꾼, 시계와 의식을 하나로 표백시켜버리는 하얀 미사포 등을 마주하게 된다. 「부처님 근처」가 “고운 죽음”에 대한 믿음을 환기시켜 또다시 정상화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비춰주는 이야기라면, 「불신시대」는 부조리가 극복되는 순간 부조리가 될 수 없음(부조리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음이기 때문에)을 전제하며, 부조리함이 모든 믿음을 철폐하여 현실계를 직시할 수 있게 해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진영은 “잃어진 낭만을 찾아보듯이 신과 문수의 죽음이 동렬의 신비라는 것, 그리고 아무도 신과 죽음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라 생각”하지만 “의식적인 맹목은 끝내 맹목일 수 없”음을 인식하는 존재이다. “둔하면서도 산다는 본능만은 가진 것, 그저 산다는 것, 진영은 어머니에 대한 잔인한 그런 주시를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나”와 닿아있지만 항상 헤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노잣돈의 많고 적음을 통해 천도의 순서가 정해진다는 사실과 “페스트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만연되어 가는 가짜 주사약”들은 진영으로 하여금 “사람을 좀 미워해야겠다. 반항을 해야겠다. 모든 약탈적인 살인자를 저주 해야겠다”는 문장에 도달하여 “신용 보증으론 종교보다 더 실한 게” 없다는 시대적인 사실, 곧 정치적인 존재의 필요를 조명한다.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에서의 「부처님 근처」는 「불신시대」 서사의 반대 맥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저자가 문제 삼았던 “살아남은 자들의 공동체로 정상화”로 다시 귀결하게 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정치적인’ 존재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로부터 꼭 정치적인 존재의 대두가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있지만 문학이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전제, 그로부터 나온 논리들은 해당 작품과 엇나간다. 단지 거울의 역할이라면 「해운대」의 이상할 만큼 긴 청소 장면도 사회를 비추는 데에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를 말하기엔 비평가의 과민함이 맞다. 저자는 특정 현상을 단편적으로 설명해주는 데에만 「부처님 근처」의 일부를 끌어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며,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를 통해 공적인 영역-애도가 윤리에까지 도달해야함’은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접근의 문제


존 스토리에 따르면, 미학적 접근이 갖는 문제는 가치 평가의 구성 속으로 들어가는 그 능동성과 에이전시의 세계를 빼내 버리는 데 있다. 이는 불가피하게 문화를 대상들의 성질로 환원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보존되어야할 대상들의 상상적 박물관, 그리고 선택된 대상들의 내재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도록 교육 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교육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는 인식할 수 있는 소수와 인식할 수 없는 다수 사이에 그어지는 구분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미학적 가치 평가는 배제하는 매커니즘으로 활용될 수 있다.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는 현 대한민국의 애도 문화를 천만 영화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소설을 통해 문제화하여 정치적 수행이 가능한, 애도를 위한 공적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을 통해 마련)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공간의 가능성을 타자의 타자성이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는 문학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학적 가치 평가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해당 공간의 불가능성이다. 하물며 그의 표현이 향하고 있는 ‘대중’을 생각해봤을 때, 6·9 작가선언은 얼마나 인식불가능한가. 천만 영화의 소비 자체를 현 시대의 ‘애도’하는 행위 자체로 동일시시켜 다뤘다는 점은 더욱이 무리수이다.

권명아가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로 불러온 모든 작품들은 정치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순한 스타일들의 열거를 비평(편집)을 통해 피상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현재의 상태를 파토스의 쇠잔이나 무관심의 팽배로 일반화하는 관점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효할 수 있지만 동시대의 텍스트들을 균질한 계보로 읽어선 안 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들은 윤리의 필요라는, 단일한 세계로부터 쉽게 호명되는 것보다 다원체 속에서의 파편화된 개인들과 그 사이의 적대성, 강한 불만으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능성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문화/과학 북클럽 논쟁』 2회에 저자는 열려있음을 밝힌 바 있다.


권명아 : “……정동을 전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정동이 사람들을 물들이는 것이고 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념은 항상부적절한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정념이 법, 윤리, 도덕이 갖는적절함의 원칙에서는 항상부적절한 것으로서 그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념은 항상부적절한 것인 동시에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적시고 물들이는 부정적인 감염력이나 침투의 차원과 관련이 되어왔습니다. 따라서 정념은 적절하게 나누고 분류하는 수목형적인 분류의 체제로부정적으로들어오는 순간만 잠깐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론적으로 틀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방법론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정념이나 정동이라는 탐구의 대상을 추적하여 다루는 데에는 보다 섬세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애도의 문화적인 형식에 주목하여 타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조망한 시도로나마 읽을 순 있지만 무한히 수평적이고 포착할 수밖에 없는, 파편화된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선 더 많은 차원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먼저 “문학적 진실”에 대한 현시적인 해명, 대중문화와 대중문학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불가능성, 그리고 “정치적”일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비평이 해낼 수 있는 명확한 조건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론적인 틀 없이 탐구의 대상을 추적하는 방식”은 결국 그 이전의 이론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저서는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정반합에 기댄 낙관적인 역사주의로 빠지려한다. 대중적이지 않은, 애도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개인의 정치성을 확인하려했지만 그의 접근방식은 합(合)에 대한 긍정성을 전제하고 있을 뿐 독자(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로 가까워지며 그 자체로는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문학’이라는 표상


해당 텍스트 전면에 현 시대의 정념이 ‘촛불시위’ 당시 광장으로 집약된 정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밝힌 전제 또한 지나치게 일반론적이다. 이는 반(反)의 역할을 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시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이원론으로 나누는 접근이다. 「불신시대」에서 진영의 “애도하지 않기로 함”, “청소” 행위가 “공동체의 정상화를 욕망하며 윤리적 의식의 자리를 만들어내지 않음”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도는 단순히 공적인 수행으로의 연결에서만 가능성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이에 해당 텍스트는 애도나 문학적 공동체로 귀결할 것이 아니라 애도하지 않음에 대한 추가적인 서술을 해야만 한다. 슬픔과 외로움에 정치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일 수 있음과 없음을 분간할 수 있는, 구조 밖에서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재구성을 위한 정치는 단순히 반대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근대적 제도(시와 소설이라는 양대 장르를 중심으로 구성된) 자체가 일종의 자명한(혹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근거들에 기반하고, 따라서 그 근거를 무효화시켜버리는 사건에 봉착할 때면 매번 무능력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앞서 인용한 유가족 최선자 씨의 절규 앞에서 ‘문학성’, ‘시적 경험’, ‘총체성’, ‘구성’ 같은 범주들은 모든 근거를 박탈당한다. 사건 앞에서 문학은 무능력한 것.”이라는 문제의식은 권명아의 텍스트가 얼마나 소박하고 천진한지를 증명한다.

문학이 타자의 타자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능케 할 순 있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 문학은 그라운드 제로** 상태, 사건 앞에서 무능력했으며 애도는커녕 기능할 수 없었다. “유가족 최선자 씨의 절규 앞에서” ‘문학’ 역시 절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는 애도의 (불)가능성을 문학적 서사에 두었지만 문학은 꼭 “육친적 근친성의 형식으로 슬픔에 감응”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애초부터 애도를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문학이라는 표상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근거, 문학이라는 본질에 대해 먼저 해명해야한다. 그것이 해명되기 전까지는 『해운대』,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들의 텍스트를 「부처님 근처」와 비교하여 비판하는 접근방식은 너무나 피상적이며 (본격)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일반화에 그치지 않기에 유효하지 않다. ‘문학’이라는 표상은 다시 정의되어야한다.




*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도로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 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나이 어린 소년이었더라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년병은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 있는 수박 한 덩어리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것이다.”  (박경리, 「불신시대」, 『한국단편문학선2』, 민음사, 1999, 296p)


** 2001년 9ㆍ11 테러 발생 이후 세계무역센터(WTC) 붕괴 지점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의 사전적 의미는 (폭탄의) 낙하점, 핵폭발 바로 아래 혹은 위의 지점을 뜻한다. 하지만 일본의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사상으로서의 3·11』의 언급에 따르면 “근거라는 것은, 혹은 이성과 토대라는 것은 독일어로 ‘기초’입니다. ‘Ground’, 영어에서 말하는 ‘ground’입니다. 즉 ‘대지’, ‘토지’와 같은 말이군요, 다리가 발 딛는 이 대지가 근거이자 이유이며, 이성을 움직이는 무엇”이며 이는 ‘애도’의 방식을 논하기 이전에 근원적인 질문을 요구한다.



참고문헌

권명아,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이상우‧나소정, 「복수와 치유의 전략적 서사-박완서의 작품세계」, 『인문과학연구논충』 25권,  2003.

이선미, 『박완서 소설연구』, 깊은샘,  2004.

권명아·김홍중‧조형근,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문화과학사, 문화과학 72,  2012

김형중,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문학과 증언-세월호 이후」, 『후르비네크의 혀』,  2016,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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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안녕하세요. 작가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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