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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체험적 시 창작 이론과 실제'의 실체


한국의 ‘체험적 시 창작 이론과 실제’의 실체

-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 시’의 창작 현장까지




‘한국 현대 시’라는 표상


이승훈은 『모더니즘 시론』에서 다음을 주장한다. “한국 현대시에 드러나는 현대성 역시 크게 보면 이른바 미적 현대성, 혹은 미적 모더니즘에 속하며 이러한 현대성은 사회적 현대성과 대립적인 관계를 띤다는 점에서 서구의 그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시’(한국시, 이하 우리시)의 경우 미적 현대성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그것과 다른 특수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30년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우리시의 현대성은 그 후 어떤 양상으로 심화되고, 아니면 확장되는 것일까?” (이승훈, 『모더니즘 시론』, 문예출판사, 1995) 그는 해당 저서에서 한국 현대시가 ‘모더니티’와 닿아있는 지점들, 또는 닿게 한 지점들을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 이후를 추적해나가며 한국 문학이 어떻게 역사적인 시체가 되어왔고 어느 지점에서 세계문학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지를 암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에선 현장증명의 방법을 통해 현재 한국 대학 강단에서 시 창작 강의를 맡고 있는 현직 교수들 및 시인들이 주장하는 시 창작 이론과 그를 바탕으로 한국 습작생들에게 교육되어지고 있는 합평방법론을 중심으로 현직 기성 작가들이 표상하고 있는 ‘한국 현대 시’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들이 당장에 흘리고 있는 ‘한국 현대 시’의 부산물을 추적한 후, 왜 그렇게 창작해야 하는지 또는 한국 현대 시는 왜 그렇게 창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설정한 까닭은 민용태가 『세계 문예사조의 이해』에서 자신의 저의를 드러낸 부분과 같다. “우리 현대문학의 문제는 서양의 그것을 수박 겉핥기로 받아들이는 데 습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초기 서구문학의 수용시기에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그 맛에 이르기 전에 다시 찬반론이 나오고 있다.”(민용태, 『세계 문예사조의 이해』, 문학아카데미, 2003)

현재 한국 현대 문학의 판이 세계문학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언급하면 등장하는 이름은 고작 ‘고은’, ‘한강’일 뿐이다. 한국 문학의 역사적 맥락을 보자면 이는 식민주의적 감각에서 비롯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매개로 서구권의 문학 제도, 노벨상 또는 맨부커 상에 대하여 찬양의 태도를 보이든 자조의 태도를 보이든 구미 중심의 세계문학 개념을 다시 불러일으켜 한국문학과의 관계를 그와 연결하고자 하는 그러한 행위는 비단 식민지 시대의 국수주의적 반응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며 그동안의 ‘현대성’ 건축의 노력들을 지워버린다. 세계문학의 개체, 다시 세계문학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선 현직 작가 및 교수들이 현대 문학에 대한 표상을 자의적으로 편집하고 있는 방법들과 죄명이 뚜렷하지 않은 그 언사들을 비판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의 정체성과 형상


2-1. ‘조선 시’와 ‘현대 한국문학’


식민지 시절의 조선에서 조선 문학의 정체성을 규정할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정리한 서양의 문예사조, 즉 일본의 서양문예사조를 이식받았다. 그 과정 속에서 조선은 임화의 신문학사, 이식문화론과 같은 단적인 예를 들 수 있듯이 자국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었다. 당대 조선은 ‘가장 전통적인 것인, 즉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역할에 따라 문화적 정체성과 자주권을 강조하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조선인이 쓴, 조선의 정서와 사상을 조선어로 쓴 문학이라는 김억의 ‘조선 시’ 정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조선인’에 대한 정의의 어려움(조선인이라는 개념은 단일민족과 반만년이라는 민족적 자부심, 인종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신화이다. 단군 신화는 오늘날의 한국인을 다 대변해줄 수 없다. 현대로 와서 단순히 시민권의 영역으로만 설정하는 것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길이지만 그렇게 한다면 일제 강점기의 시민권이 없는 망명자들(독립운동가)의 글은 더 이상 한국 문학의 역사로 포함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디아스포라 문학, 재외 한국인 문학이라는 연구의 탄생배경이기도 하다), 조선어의 순수성에 대한 문제(1960년대 한국 문학사에서 4.19세대 작가들,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한국어 교육을 받은 자들이 식민지 시대 조선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문학에 대하여 번역어라는 비판을 가하며 한국어의 순수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에 김억을 대표로 한 일부 비평가들은 그에 반발하며 대립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80, 90년대 있었던 국어순화운동의 한계와 실패, 그리고 대중들이 순우리말 꽃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 작가들의 국수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 등은 조선어의 ‘순수함’ 또한 완벽하게 정의내릴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조선어 교재는 일본과 미국의 교과서 틀, 문장을 번역해서 만들었다는 점, 세대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등 여러 이유에서 다분히 ‘세계문학’의 개념이 유입되는 과정 속에서의 국수주의적인 반발이었다는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서양에서 발생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에 들어온 ‘문학’의 개념은 세계문학으로의 진입과정을 현상한다. 특히 한국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구미 제국주의의 압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로서 제국주의로 전화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첨예하게’ ‘구미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 오리엔탈리즘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김재용, 『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문학』, 47p, 글누림, 2012)을 벌였던 곳이다. 이후 한국 문학의 정체성과 형상은 이전의 구미 중심적 세계문학을 탈피하여 구미에서 시작된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지구적 세계문학의 의미를 획득하게 해주었고 그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여전히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에 대한 탐구가 미답이며 이에 대한 논의들이 대부분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번역한 것이었기에 현대 한국문학에 대한 설명은 더 보충되어야한다.



2-2. 한국의 ‘현대 시’와 세계문학


여기서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랭보에 대한 비평에서 밝힌 입장을 사실 자체로 수용하여 더 진행해보고자 한다. 황현산에 따르면 1963년에 발간된 송욱의 『시학평전』은 한국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 책에는 프랑스 상징주의가 절반 이상이지만 랭보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한국시에 필요한 것은 말라르메나 발레리에게서 발견되는 명증한 의식과 엄정한 질서였을 뿐, 랭보의 열정과 혼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옥의 염려, 시의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혼란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온 랭보를 보았을 때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충분히 이용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황현산, 「실패담의 미학」, 아르튀르 랭보, 김현 역, 『지옥에서 보낸 한철』, 민음사, 2016)이를 기반으로 우리가 통념적으로 상징주의가 이후 현대시에 미친 영향, 과잉된 개인주의에 빠지게 만들어 애매성과 퇴폐적 정서를 초래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김억의 조선 시 정의와 같이 ‘시’의 정체성 또는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상징주의는 한국 현대시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프랑스 상징주의가 기획했던 의도와 목적은 다시 기획되고 재구성되어 왔다는 점과 더불어 그 기획의 의도가 한국 ‘시’의 정황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면 현대 한국문학의 형상은 여전히 포스트 콜로니즘적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완전히 진입했다고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는 중이기에 확답할 수 없다.

‘조선 시’의 정의 이후로 한국 현대 ‘시’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지점은 송옥의 ‘현대 시’ 건축술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시학평전』(『사상계』1962.3-1963.3)은 “한국과 외국의 여러 시인과 비평가들의 훌륭하고 혹은 주목할 만한 시와 시론의 원문을 앞에 놓고” (송욱, 『시학평전』, 일조각, 1963년, 3면)현대성, 한국 현대 시에 대한 기획을 실천한 시작이었다. 송욱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 시의 현대화였다. 당대 전통 서정파에서 주장했던 질서와 조화를 강조하는 유기체적 시의 원리로부터 벗어나 부정정신과 행동정신을 통해 현대 한국 시의 방향을 구축하려 했고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현대성이란 과거의 것을 지금에 알맞게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것, 시대에 속하며 동시에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서구적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이에 송옥은 탈식민 이후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식민주의, 식민주의가 부여한 한국 문학의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규명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을 삭제한 탈식민주의, 피식민 주체를 민족적 주체로 설정하지 않고 퇴행적인 자본주의에 구속된 존재로 설정하여 현대성을 획득하기 위해 식민주의 감각을 차단했다. 이는 다음의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송욱은 해방 이후 5.16까지를 훑고 있지만 해방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해방기는 이념투쟁으로 혼란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발화할 수 있었던 시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시에서조차 해방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그의 기억 속에 해방기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삭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정영진, 「탈식민주의적 감각과 현대시를 향한 열망」, 9p, 『겨레어문학 제52집』 2014.)

결국 “송욱은 역사를 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도 반대하고, 수난사로 처리하여 민족적 감정을 자아내는 것과도 거리를 두었다. 송욱은 현실의 경험을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맥락화 할 수 있는 감각을 통해 현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탈식민주의적 감각을 현대성의 중요한 표지로 독해했다는 것을 하나의 역사의식이자 서구 문학이론의 관념적 수용을 넘어 실천으로도 볼 수 있으나 온전한 주체성이 개인의 감각으로 자리 잡진 않았다. 자명성을 요구할수록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일종의 선언에 불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욱은 자유시가 발전할 수 있는 형식적인 요소들을 형성함으로써 일종의 임무를 부여하며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자유시는 전통적인 엄격한 형식과 긴장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시는 긴장관계를 형성할 무엇, 다시 말하면 반항을 형성할 그 무엇(전통)이 부재한 상황에 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도의 형식적 요소에 대한 탐구’를 우선으로 부재하는 전통 앞에서 서구 문학의 유산을 자원 삼아, 최소한의 것을 만들고 시작하자는 입장을 선명히 보여준다. 또한 보들레르, 투르게네프, 타고르 등의 산문시를 통해 ‘교양과 경험을 갖춘 위대한 인간성’을 시인의 임무로 부여함으로써 세계문학을 통해 한국 문학의 현대성을 회복하려는 점은 결국 이러한 현대성 건축 속에 “세계문학에 대한 안목을 통해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고 동시에 최소한의 형식 실험을 결합하면, 세계문학(시)의 동시성을 한국시에서도 추구할 수 있다고 송욱은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지점이지만 송욱이 『시학평전』의 서문에서 밝힌, “문학배경을 비교하는 안목으로, 한국시인의 입장에서”라는, 한국 현대 시가 역사적 배경을 영영 떠나 서구 중심의 예술의 복사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릴 것을 우려한 점은 간과할 수 없다. “현재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은 문명형태 그 자체에까지 시야를 넓혀서 각 문명형태가 인간성의 통일에, 즉 현대인의 인간성의 통일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것을 평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송욱, 「현대시의 반성」, 문학예술,1957. 3, 410면.)라는 그의 문장은 1950년대 지식인의 의무감과의 내면적 갈등과 미래적 시간의 도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지 않고도 식민주의적 정체성을 탈피함과 동시에 현실을 역사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탈식민주의적 주체를 설정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의 ‘미래적 시간의 도입’은 ‘육체 없는 시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3. 한국의 현대 시 교육


하지만 이후, ‘육체’는 생겼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가능하다. 다음은 정끝별의 『현대시 아이러니 교육에 관한 시학적 검토』(『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9집(22권 2호),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8.6.)의 일부이다.

이렇듯 아이러니가 현대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시적 장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에 대한 시론 교육 연구는 활발하지 않다. 아이러니에 대한 연구 또한 이승훈 시론(고려원, 1979)과 김준오 시론(삼지원, 1991, 3)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소설에 비해 시에 대한 아이러니 연구는 많지 않고, 시론에 대한 연구는 더욱 미흡한 실정이다.

  ……이승훈, 오세영, 김준오의 아이러니 논의에서 공통된 문제는 ① 말의 아이러니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가, 낭만적 아이러니와 우주적 아이러니가, 구조적 아이러니와 ()극적)/희극적 아이러니가 그 구별이 모호하다는 점, ②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이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 ③ 구조적 아이러니와 시적 역설은 물론이고 극적·낭만적·우주적 아이러니와 존재론적 역설 또한 실제 텍스트 속에서 변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인지 뒤를 이은 오규원의 시작법(현대시작법, 문학과 지성사, 1990)에는 아이러니가 누락되어 있으며, 권혁웅(시론, 문학동네, 2010)은 비유 차원의 이중성과의 비교를 통해 이중화의 맥락만을 강조하고 있다.

오규원과 권혁웅의 현대시작법과 시론은 현재 한국 대학 문예창작과 시 창작 수업에서 흔하게 교과서처럼 쓰이고 있는 교재이다. 그러나 위 사례만 보더라도 “현대 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시적 장치” 하나에 대한 시론 교육 연구뿐만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창작의 방법은 구별의 모호성과 더불어 ‘대강 그러한 느낌’의 정황에만 머물고 있다. 실제 시인 출신의 교수들이 습작생들의 시를 합평하는 현장에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명확한 ‘현대 시’ 창작 방법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창작 방법과 실기 위주의 수업이 주가 되며 목적인 문예창작이라는 대학의 전공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뿐 아카데미의 역할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실체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수의 역량이다. 현 20대의 습작생들은 대개 입시제도와 정부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문화 과정을 거치기 위해 입학한 경우. 반면 기성시인들은 그러한 교육 수준의 향상과 지적 요구에 앞서 나가주지 못하며 스스로도 확립하지 못한 이론들을 소개할 뿐이다. 시창작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노하우가 있을지 몰라도 교육법은 그와 별개의 문제이다. 신진 작가들을 길러내는 곳이 이제 대학이 되었음으로 보건대, 그들의 교육법을 기반으로 한 창작에 대한 발언들을 통해 현대성 건축에 대한 의무감의 부재, 또는 허술함을 말할 수 있다. 또한, 보편적인 현대 시의 형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보편성이 구미 중심적인 개념이며 비서구권, 한국의 현대 시란 어떠한 차이와 특징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지금의 형상이 등장했는가에 대한 반성적 차원의 시 창작 법에 대한 검토 과정이 얼마나 생략되어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장에서의 ‘현대 창작’과 추상론


강연호(시인, 원광대 문예창작과 교수) : 주제가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는 작품은 대체로 좋은 작품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이때의 주제는 진솔해야 하며, 지나치게 거창하거나 막연하지 않는 게 좋으며 생경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흔히 습작기의 작품들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은 대체로 주제가 생경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목 또한, 본문의 주제나 내용과 일정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너무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제목은 피하는 게 좋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을 모두 풀어 제시하는 제목은 피해야 한다. ; 유치환의 「깃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김춘수의 「리듬2」 등 인용.

‘좋은 작품으로 인정되기 어렵다’라는 문장에서 좋은 작품이란 무엇이며, 인정은 누구의 인정을 말하는가. 더구나 ‘진솔해야’ 한다는 점에서의 진정성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쓰이는, 어느 곳에 붙여도 그럴 듯하게 보이는 유명무실한 개념이다.

박주택(시인, 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 시점이라는 용어는 소설적 어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창작 용어로 굳이 차용하는 이유는 시점이 화자나 거리 또는 어조 등과 유기적 맥락을 이루기 때문이며 창작에 있어서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편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적절하게 창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여 표현하는 요령이 필요하고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는 축소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박주택은 단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편의성’을 이유로 소설적 어휘를 차용하여 시 창작을 규정하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표현하는 요령’과 같은 말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책임으로 돌릴 뿐 아무런 교육적 지침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참된 의미’는 무엇을 지시하는 지는 대강 알겠지만 알고 싶지 않다. 만일 ‘참된 의미’가 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그를 부정하고 현대 문학의 정의내릴 수 없음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과정은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맥락을 생략한 채 ‘참된 의미’를 지시한다면 전근대적인 예술 정신 또는 낭만성을 전근대적으로 지칭할 뿐이다.

김완화(시인, 한남대 문예창작과 교수) : 현대에 와서는 문학 행위 속에 독자의 참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재래의 문학 감상에서는 독자들이 독서 행위에서 수동적 관망의 자세로 시인에게 귀를 기울였다면, 이제는 직접 텍스트 안으로 파고 들어가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만큼 독자의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의 시들은 주로 자신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정서나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거대담론이 사라진 상황에서 미시담론으로 빠져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개인의 내면에 일고 있는 정감의 내밀함이나 섬세함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대 역사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형상화에는 소홀한 감이 많다. 그만큼 시에서 메시지를 강조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물론 시에서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강요할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인들이 개인의 사생활이나 감정과 정서만을 노래하고 그 시대 사회 상황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서 민족이나 인류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약화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등 인용.

허혜정(시인,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강사) : 잘 구사된 어조는 독자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독자의 관심과 공감을 효과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작가의 책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현대 시’를 읽는 독자들은 현대시를 쓰거나 전공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이 실정이다. 또한 ‘대 역사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형상화에는 소홀한 감이 많다’라는 식의 전형적인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고 너희는 그때의 그것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관료적인 말은 내셔널리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현재와 미래적 시간을 단절하고 과거에 연연하며 ‘현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족과 인류’를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러나’의 용법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 저의는 너무나도 투명하다.

이은봉(시인, 문학평론가,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 시적 인식의 기초는 상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다. 상상은 콜리지의 낭만주의 미학에서 구체화된 용어이고, 형상은 벨린스키의 리얼리즘 미학에서 구체화된 용어이다. 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들 용어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내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습작자들이 자신의 심적 에너지를 다양한 내적 형상어, 즉 독특하고 유별난 부사나 형용사, 명사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습작자들이 이처럼 내외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어휘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습작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라는 것이 심미적 언어의식의 산물임을 자각하게 되고, 나아가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해 가게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살아있는 시』 동인들의 시들에 대한 이은봉의 비평 : 심미의식이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은 일정 있으나경지에 다다르기에는 한 단계 성장이 필요하다.

노창선(시인, 청주과학대 문예창작과 교수) :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더 좋은 작품으로, 더 좋은 시적 완결성을 보여주는 것이 신진 시인들의 책무이자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봉은 구미 중심의 문예사조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여 겉핥기식으로 ‘궁극적인 내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문장 하나로 시 창작 방법론을 형성해내고 있다. 곧이어 습작자의 특징을 정의내리고 그 특징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미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했다고 여기며 초연주의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자신이 말하는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한 자라고 널리 인정받는 사람들과 자신의 지위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경지’라는 말을 맥락상 해탈, 득도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시 창작 방법을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공간에서 종교적 차원에서나 쓸 법한 용어를 전달하고 마치 그 자체가 방법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방법이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시적 완결성’이라는 것은 완결된 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닫힌 시가 과연 시가 될 수 있는 지 생각해본다면 말의 폐단이 쉽게 드러난다. 그의 발언은 신춘문예의 실린 시들이 다 똑같은 이유이기도 하며 현 문학 생산 구조를 재생산해내는 대표적인 장치 중 하나이다. 비록 신춘문예라는 제도가 기본적인 ‘기술’을 갖춘 자들을 선발해 역량을 키우고자함을 의도하고 있다지만 신춘문예를 통해 그러한 ‘경지’의 시를 보여준 사람, 또는 가능성은 실제 하는가. 없고 없을 것이다. 현대 미술의 현장과 같이 현 문단 내에서도 문학 작품은 기호의 차이를 통해서만 소비되고 있으며 아주 손쉽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엽(시인, 경기대 한국동양어문학부 교수) : 시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질서나 논리를 갖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구성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명시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의 대부분이 시조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시조의 형식은 잘못 알려져 오고 또 교육됨으로써 오히려 폐쇄적인 장르로 인식되어 왔다. ; 초장, 중장, 종장의 삼단 구성과 기승전결의 사단구성, 그 외의 구성들은 일단 구성, 이단 구성, 비정형 구성으로 구분 가능하고 주장하고 있다.

이지엽은 시조의 방식을, 소설적 용어를 사용하여 연결하고 있으나 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이라는 개념적인 단어를 매개로 설명 가능성을 어필하고 있으나 충분한 설명, 그의 공식적인 연구가 없으므로 특정 권위를 통해 설득하고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희중(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 거칠게 보자면 대개 습작 시인들은 순수한, 흔히 나르시시즘과 결탁한, 자기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첫째 단계, 곱고 깨끗한 세상을 꼭 그런 언어와 비유로 노래하는 둘째 단계, 세상 또는 자신을 객관적,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고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셋째 단계를 순서대로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시적 인격의 발전 과정이면서, 현대시의 발전과정이기도 하다.

이희중의 해당 언사 속 비유와 묘사로 보건대 그는 현대 문학의 역사적 맥락을 지우고 ‘시적 인격의 발전 과정’이라는 말을 통해 아비투스 차원으로 희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 ‘요즘 사람들’, ‘현 시대적 상황’의 책임을 묻고 있다. 착소한 그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황인원(시인, 경기대 국문과 겸임 교수) : (습작자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본인이 생각하는 작품으로, 「바퀴벌레」를 인용한 후에) 이 시는 아주 고약하게 거의 시답지 않다. 너무 산문적이다. 물론 산문시라는 시 형태도 있기는 하지만 산문시라고 해서 제멋대로 시적 진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1행과 2행 사이에 몰려온다라는 단어가 3번이나 사용됐다. 또 이 시간이 왜 느닷없이 바퀴벌레가 되었나. 이 시는 작자의 경험을 의미 없이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한 배제와 선택에 의해 구도를 짜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시는 하나의 그림과도 같다. 정확한 구도에 의해 작성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시적 진술의 범위’를 설정했다는 것은 시적 진술마저 범위를 가지고 그 안에서 활동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황인원은 단어의 반복, 아이러니 또는 은유 사용 자체에 대해서도 거칠게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자뿐만 아니라 시 자체에 대해 철저히 주관적인 평가를 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하나의 그림과도 같다’는 말로 합평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림이라는 것이 정확한 구도에 의해 작성되는가에 대해서 그의 창작 방법을 맥락으로 상상해본다면 결국 유럽 중세 시대에나 유행했던 풍경화 따위를 말하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하여


이 글은 현장 연구에 대한 디테일과 역사적 맥락의 삭제를 방지하기 위한 신비평과 형식주의의 혼란과 혼재에 대한 연구, 그리고 해방기 외국문학 수입의 양상과 현장에 대한 연구 등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한다. 다만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능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카데미에서의 시 창작 강의는 가능한가. 한국 현대 문학의 반성 없음을 현대성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앞으로도 볼 수 있는가. 한국 창작 비평의 역할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를 비롯한 대형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시집들, 현대 시라고 부르는 것들의 전형들의 뒤편에 실리는 평론은 해당 시집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에 대한 독해법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괄호 속에서 사례로 제시한 현상은 현대성 구축에 대한 연구가 창작 법에 도입이 된 이후의 모습인가, 만약 도입이 된 결과라면 이것이 최선 또는 한계인가. 다시 말해 이 글은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부재를 말하고 한국 현대 시에 대한 미래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권위로부터의 해방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을 획득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시창작의 영역에서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여전히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교양주의적인 교육법이 답습의 방식으로만 반복되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들은 시 창작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라는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국문학, 또는 문화연구의 책임으로 밀어진다면, 시 창작은 왜 아카데미의 영역의 보호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왜 스스로 ‘시’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여 자가 생산-자가 소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독자’의 영역을 신경 쓰는가. 거칠게 말하자면 자격론을 기반으로 영위하고 있는 자들이 자격론을 비판하거나 이후를 교육할 수 있는가.

한 때 카뮈에 열광했던 이유는 실존주의나 부조리를 통해 근대에 대한 현대인의 혼란, 개인의 균열을 발견한 것이며 인간 보편에 대한 억눌린 분노가 읽혀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로써의 알제리, 이슬람과 아랍인의 관계, 비서구와 서구의 충돌이라는 지점들은 당시 희석되었던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학습의 측면에서도 서구권의 문학적 개념을 비서구권에서 습득하여 전통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서구적인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기 인식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을 가진다. 한국 현대 시의 트렌드인 서정시에 대한 회귀의 흐름을 그러한 발견의 과정, 식민화 과정에 저항하는 한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쓸모가 없다. 현재 서정은 단순한 코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관계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읽었을 때 여전히 콜로니즘이기도 하다. 현대 문학의 판은 신서정, 불가능한 서정, 미래서정 따위의 낭만적 용어를 만들어내고 부추길 것이 아니라 현대성에 대한 무지 또는 현대적 주체가 인식하는 세계가 이 글에서 지적한 바와 다르게 지엽적이지 않다는 반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서정주, 윤동주, 기형도 등을 다시 호명하며 과거를 복고한다 해서 시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에 안주하지 말고 시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와 현대가 어떤 지점들이 닿아있고 어떤 지점들이 멀어져있는가를 확인해야하는 것이다. 현대 문학이란 새로운 가치를 건설하는 것이 문학의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어쩌다 지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고 몇 가지 말들과 작품들을 덧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현대 문학에 종사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단순히 문학을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이라는 세 지점에 대해 각각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거나,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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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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