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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남국재견에서 우리는




나 - 기억 - 미래



미래의 이야기는 미래가 필요 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필요 없는 곳이 미래가 될 것이고 그런 미래는 이야기 안에서만 가능하다. 근데 그건 어떤 이야기인가. 일단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그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인간관계. 그런 게 가능한가. 나는 뭔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고 질문은 주로 그가 했으며 나를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건 것도 그였는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보다가 중간에 잤어요. 나도 영화의 중반부쯤 잠이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우리가 똑같은 부분에서 잠이 들었다는 게 신기하다, 사실 아직도 잠이 덜 깬 것 같다, 니코틴과 커피 없이는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살아본 적은 없지만 80년대처럼 극장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얘기를 했고 나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사실 전에도 극장에서 봤었어요. 그게 언제였죠. 씨네코드 선재가 닫기 전에요. 불도 붙여줬잖아요. 그랬나요? 전 담배 안 피우는데. 그때도 그렇게 말했죠. 담배 안 피워도 라이터 가지고 다닌다고. 그랬었나. 전혀 기억에 없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었고 사실 말을 믿는다기보다는 표정을 믿었고 저런 표정만 있다면 기억 같은 건 필요 없어, 기억이 필요하다면 그건 언제나 불완전한 것. 기억과 믿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아마도 중요한 게 있다면 말 그 자체일 거야. 어쩌면 그 말은 무언가의 인용일지도 몰라. 인용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오니까. 당신은 저에게서 무엇을 보시나요? 영화 속 여주인공은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데 그 의미를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주인공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남자만이 그 질문에 대해 여자의 머리를 가리키며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지요, 라고 대답한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슬퍼 보여요. 그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전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요. 그건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믿음은 생각에서 오지 않고 시각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남자가 갑자기 코트 안주머니에서 모리스 블랑쇼를 꺼내 낭독하기 시작하자 여자의 눈은 서서히 감기고 그 장면을 보던 그와 나의 눈도 감겼으며 우리는 각자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 자는 것은 어떤 종류의 영화관에서도 행복한 체험이라고 믿고 있다. 세상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으므로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 잠에 떨어지는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일 것이다. 스크린 위의 영상과 음향이 나 대신에 꿈을 꾸어주고 나는 꿈조차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잠을 탐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작품을 상영하더라도 작품의 변별적 특징을 모두 무화시키는 빛의 항적처럼, 영화관 내의 수면자는 스크린 위에 어떤 꿈이라도 그릴 수 있다.


『영화관과 관객의 문화사』에서 가토 미키로우加藤幹郞는 그렇게 썼다. 바로 뒷부분에 가토 미키로우는 오구리 고헤이小栗康平의 <잠자는 남자> 언론시사회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자를 흔들어 깨운 한 신문기자에 대해 얘기하며 극장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심지어 잠자는 남자를 보러 온 남자를) 깨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질문한다. 극장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꼼짝없이 스크린을 바라보며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것만이 영화를 보는 것이라면,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야만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라면 잘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미지에 대한 반응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가시성의 메커니즘은 우리는 생각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경직된 시선은 경직된 사고로 이어진다.


차이밍량蔡明亮 역시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은 다른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영화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꿈은 꾸고 난 다음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집니다. 무엇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어떤 것이 선명해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영화입니까. 꿈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꿈속에 앉아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얘기도 꿈에서 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다른 세계에서 만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꿈의 연출자다.



그 - 질문 - 장소


그는 나를 본 기억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고 얘기하다 보니 우리는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고 그래서 기억도 희미해지는 걸까 생각하며 그를 따라 명동의 하이라디오에서 난생처음으로 훠궈를 먹었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건 다른 세계에 사는 기분일 거야 중국어로 그가 주문했고 뭔지도 모른 채 이거 괜찮겠죠? 어때요? 하면 좋네요. 좋아 보이네요. 홍탕? 백탕? 그냥 먹나요? 이거 찍어 먹는 건가요? 맛있나요? 특이한데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몰라도 3개월쯤 지나면 생각날 거예요. 중국에 있을 때 자주 먹었어요. 가 본적 있나요? 아니요. 가보고 싶나요? 잘 모르겠어요. 베이징? 네 베이징. 그는 베이징전영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허우 샤오시엔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고 린창林强한테 영화음악을 배웠다고 했다. 누구죠? 임강. <밀레니엄 맘보>, <남국재견>에서 배우로도 나왔는데. 봤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씨네코드 선재에서 봤었어요. 안국동.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전작전을 끝으로 문을 닫았죠. 저도 그때 봤는데요. 같은 곳에 있었네요. 몇 편이나 보셨나요? 다섯 편? 얼마나 기억하시나요? 2015년인가요? 2015년이 벌써 4년 전인가요? 연남동에 있는 남국재견에서 같이 얘기한 적 있지 않나요? 그런가요? 친구분이랑 둘이서 오셨었죠. 그때도 씨네코드 선재에서 <남국재견>을 봤던 얘기하지 않았었나요? 그런 얘기 했었나요? 남국재견에 가본 적 없으신가요? 갔던 기억이 없는데요. 카페인가요? 바에요. 영화도 상영하고. 얘기를 듣다 보니 그곳은 최시형 감독과 김동환 음악감독이 함께 차린 곳이며 나는 언젠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시형 감독의 <경복>을 본 뒤 그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정확히 뭘 물었는지는 잊었지만 대답만큼은 기억에 남아있었고 별로 인상적인 답변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왜 선명할까, 저는 과거에서 과거를 보고 싶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었을까, 뒤늦게 궁금해졌다.


나는 그가 뭔가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집중적으로 믿고 있거나 아무튼 몰두하는구나 생각했고 그가 기억하는 사람은 들을수록 내가 아닌 것이 분명했는데 그는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사실 나도 그랬으며 기억이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우리는 만났고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실감만이 나에겐 중요하다,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가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보았기 때문일 거야. 남국재견에서 우리는 같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가 나를 기억하는 건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거고 그가 나를 그곳에 위치시켰다면 그건 나였을지도 몰라. 잊히는 것보단 기억되는 편이 나으니까. 내 기억에 대한 근거는 내가 마련해야 돼. 나는 재빨리 떠오른 생각을 메모했다. 영화보다는 왜 이미지가 남을까. 이미지보다는 왜 사운드가 남을까. <自我毁滅>을 많이 들었어요. <남국재견>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영화를 보다 보니 영화를 찍고 싶다기보다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음악을 만들다 보니 음악을 하기보다는 상담사가 되고 싶었어요. 상담사가 되고 싶어서 공부하다 보니 소설을 쓰게 되었고 저랑 밤새 얘기하는 사람은 전부 사라져버려서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다, 근데 그걸 알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거길 갈 수 있을까, 유령을 따라다니다가 어느새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리는 이야기, 그런 걸 쓰고 싶다, 생각했어요. 늦게까지 그는 그런 이야기를 했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계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나다, 나중에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적은 메모를 보았는데 거기엔 그렇게 적혀있었다.



우리 - 과거 - 감각


가을을 상상해보게. 언덕 위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바람이 불고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지. 나는 그중에서 잎사귀 하나를 골라 찍을 걸세.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땅에 닿을 때까지, 허우 샤오시엔은 임강에게 <밀레니엄 맘보>의 첫 장면에 대해 설명했고 영화의 테마곡인 <A Pure Person>을 듣고 있으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떠오른다기보다는 머리를 찰랑거리며 걷는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는데 영화를 봤으니까 그런 거겠지, 영화를 안 봤어도 그랬을까, 알 수 없었지만 2001년이 나에게로부터 멀어지고 있어. 이것은 모두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2000년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스무 살이었어. 10년 전이었고 지금은 더 어려졌어. 그럼 이제 내 나이는? 난 지금 몇 년도에 있나? 질문은 그렇게 시작한다.


왜 하필 전자음악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임강은 컴퓨터로 혼자 만들 수 있으니까, 밴드를 하면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는데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연기를 하거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보단 어렵지 않다. 가수 데뷔 이후 나는 거의 자폐아였다. 거의 집 안에만 있었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외출을 할 때도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 다녔다. 모든 게 싫고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自我毁滅>은 그렇게 살았던 나를 모조리 담아내 없애버리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음악이다. 임강은 <밀레니엄 맘보>의 인물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구입하고 일을 하는 것에 매몰된 사람들. 현재만 있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뭐가 될지 모르니까 허무감만 짙은 사람들. 내가 음악을 통해 해야 한 일은 그중 한 명에게 의미를 만드는 것이었다.1)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일 뿐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을 잘 모르며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언제나 수수께끼다. 영화를 이해하는 일 혹은 음악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인데 그 부분에서 항상 실패한다. 그런데 결과물은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 그 실패에서 난 얼마나 멀어졌나. 매번 작업이 끝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 실패를 볼 수 있었으면. 그들이 보려고 시도할 때 내가 그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눈 감았다 뜨면 오키나와였음 좋겠어. 바다소리가 들려? 응. 햇빛이 느껴져? 응. 눈 떴어? 아니 뜨고 싶지 않아. 기억하지 않아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오키나와가 아니라면 뜨지 않을 거야. 메도루마 슌.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 재밌었던 거 같아.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나는 오키나와인이다. 다케시 때문이었나. 거기가 오키나와였나. 우리는 유튜브로 탭댄스를 추는 기타노 다케시를 보았고 볼 때마다 웃었는데 다케시는 진지했고 그래서 더 웃긴 거 같다고 우리는 말했다. 펑쿠이에 가서 돌멩이를 주울 거야. 타이베이에 가서 육교를 걸을 거야. 우리는 핸드폰으로 지롱基隆의 육교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케시를 본 뒤에 우리는 오키나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 정말 그 장소에 가고 싶다기보다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으며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니 이건 바라보고 안 보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있을 곳이 없다면 그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질문했고 그런 건 사실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에 가까웠고 난 사실 죽은 사람이야, 무슨 뜻이야 그게, 결국은 다 혼잣말이야 소설 같은 거, 그 얘기 더 들려줘, 나는 왜곡해야지만 느낄 수 있어, 그렇다고 소설을 쓰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 않고도 지나간 이야기들. 유령을 따라다니다가 어느새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리는 이야기, 그런 거 쓰면 재밌을지 않을까. 어차피 쓰지 않을 거지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 기다리면 기다림도 언어가 돼. 그런데 기다릴 수가 없어, 우리는 말했다. 기다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건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욕실에서 마츠다 세이코를 틀어 놓고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은 내 바깥에 있어, 그렇기에 나를 지켜야 해, 생각했다. 난 더 이상 나 자신의 과거가 아니다. 왜 대답이 없어? 응? 내가 한 얘기 못 들었어? 욕실에서 나온 우리가 물었다. 이제는 읽지 않고 보지 않는 것들이 내 이름을 불러. 그럴 때 증오를 느껴. 그런 감정은 증오가 아니야. 이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 나는 말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감정은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야. 라이터를 찾아 더듬거리는 우리에게 불을 붙여주었고 나는 더 이상 선형적일 생각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마치 2019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쩌면 정말 그랬는지도 몰라. 2039년에 태어나서 2000년에 죽고 싶다. 밀레니엄을 보면서 말이야. 딱 그 정도가 좋은 것 같아. 2001년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지? 거기선 내가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전에 극장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를 봤지만 중간에 잠들었으며 나도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우리는 엎드려서 노트북으로 <밀레니엄 맘보>를 다시 보기로 했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잠들었고 너는 너의 세계에 있다가 내 세계로 왔어, 그래서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혼자 비키가 하오하오의 말을 떠올리는 대목까지 본 뒤 나는 노트북을 덮었고 잠든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었고 근데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정말 좋을까? 무의식을 엿본다는 건 예의가 아니야, 볼 수 있다고 해도 보지 않으려 해야 하고 봤다고 해도 못 본 척해야 하지 않을까? 같이 있으려면 오랫동안 잠든 우리를 보며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우리들, 다시


영화를 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그런 거 질문인가? 그런 게 질문이냐고 나한테 묻는 거야? 넌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처럼 보여. 기다리겠다는 말 하지 마. 난 그런 말이 제일 싫어. 기다린다는 말이 왜 나쁜 거지? 그런 거 약속이 되니까. 내 몸이 넓어지고 있어. 생각보다도.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우연한 만남은 언제나 약속된 것이고 우리는 한 번도 약속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거야. 창밖으로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일곱 번쯤 바뀌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고 초록불이 되어도 건너지 않는 사람을 보며 왜 건너질 않을까?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근데 꼭 건너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마 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린 걸 거야. 하늘과 구름의 경계를 가늠하다 보면 내가 혼자라는 것이 느껴져.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우리를 잊을 수 있도록, 우리가 삶을 잘 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 내가 우리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날 깨울 때까지 생각했다. 이젠 내가 어디서부터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충무로의 시네마테크에서 남산타워를 내다보며 그가 물었고 라이터를 찾아 더듬거리는 그에게 불을 붙여주며 그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되물었는데 그는 영화를 보기보단 잠든 나를 보고 있었다고 했고 나를 봤다기보다는 내 꿈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보이길래. 미안해요. 그냥 그게 누구였을까. 궁금했어요. 그런 질문은 어떻게 가능한가.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싶었지만 나는 기억나는 것을 말해주었고 거기선 내가 어떻게 보여? 그건 무슨 질문이었을까?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있나. 2001년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지? 나는 아직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우리를 아는지는 우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내가 있다면 나는 있고 없다면 나는 없다. 내 기억 속에 우리는 있고 나는 우리를 보고 왜 그렇게 빤히 봐요, 라고 말하는 우리가 있고 그럼 나도 있나 있다고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되나 아니면 기억이 되나 그런 모습은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네, 생각했고 평생 기억되었다. <남국재견>에서 우리는 잭 카오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생각나지 않았고 오늘 다시 영화를 봤지만 그런 장면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봤던 건 뭐였을까. 우리는 그 기억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걸까. 잭 카오가 같이 이삿짐을 나르던 사람과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문신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도쿄 꺼와 교토 꺼가 어떻게 다릅니까. 많이 다르죠. 한눈에 도쿄라는 것을 아시다니 대단하군요. 나는 왠지 그 장면이 좋았다는 얘길 하고 싶었고 가끔 <自我毁滅>을 들을 때마다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가사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自我毀滅



這個世界 對我來說 所有的慾望都可以麻醉

這個世界 對我來說 祇是漫無目的的活下去

我的靈魂 愈飛愈遠 找無方向 無依無靠

我的靈魂 愈飛愈遠 人世運命 命中註定


我的身軀 像無定時的炸彈

我的生命 隨風漂流無形影

我的名聲 管太別人知影

自我毀滅 放棄得到的物件


我的身軀 像無定時的炸彈

隨時都會 無小心就引起爆炸

我的身軀 慢慢已經無感覺

毀滅一切 毀滅自己的生命


今世所有的愛恨攏無分明 無關係! 我早已經無所謂

若不是還有存在一點感情 我的身軀和靈魂早就脫離

若是可以重新再來的話 希望這個世界 真正有輪迴

把所有看不過去的 包括我的肉體 不管過去的 今日的攏總毀滅


我的身軀 裝一粒不定時的炸彈

我的生命 隨風漂流無形無影

我的名聲 不管別人是不是知影

自我毀滅 毀滅世間所有的物件

毀滅一切 毀滅一切 毀滅一切 毀滅一切


自我毀滅 自我毀滅 自我毀滅 自我毀滅



자기 파괴


세상은, 나를 위해, 모든 욕망은 마취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저를 위해 목적 없이 살기 위한 것입니다.

내 영혼은 점점 멀어지고 방향을 찾고, 도움을 받지 못한다.

내 영혼은 더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습니다.


내 몸은 영원한 폭탄과 같습니다.

내 인생은 공중에 떠돌아다닙니다.

내 평판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입니다.

자기 파괴


내 몸은 영원한 폭탄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폭발로 인해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 몸이 천천히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생을 파괴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랑과 증오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벌써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도 약간의 느낌이 있다면, 내 몸과 영혼은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이 정말로 환생하고 있기를 바란다.

과거와 관계없이 내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 시키십시오.


내 몸, 나는 시기가 맞지 않는 폭탄을 가지고 있다.

바람으로 보이지 않게 내 인생이 흐른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내 평판

자기 파괴, 세계의 모든 물건 파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십시오.


자기 파괴 자기 파괴 자기 파괴 자기 파괴



허우 샤오시엔 추모 전작전은 이번 주까지였다. 그의 유작은 사실상 <밀레니엄 맘보>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유바리에서 비키를 놔두고 사라졌던 잭 카오가 다시 등장하여 과거를 헤매는 이야기다. 결국 <남국재견>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후에 <밀레니엄 맘보>를 끝까지 봤을까. 끝까지 본다고 해서 끝을 알 수 있을까. 우리에게서 나는 무엇을 봤을까 아니 우리는 나에게서 뭘 보고 싶어 했을까.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지요, 그렇게 얘기해주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지만 물을 수 있었으면, 무엇보다 우리가 나를 보려고 할 때 내가 거기에 있었으면, 그런 생각은 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계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나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누군가 맥락을 가져가버린 문장들만이 남았다. 이상한 건 난 거의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을 극장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영화가 끝나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지? 그런 질문은 항상 혼자서만 가능했고 기억하다 보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까지도 나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그게 벌써 2029년의 일이었다.




1) 강병진, 허우 샤오시엔과 지아장커의 음악적 페르소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7607





필자 소개


나일선.

2016년 <더멀리>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문예지에 소설을 썼다. 

단편집 <우리는 우리가 읽는 만큼 기억될 것이다>를 냈어요.


#나일선 #남국재견에서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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