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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장 가능형의 향수병


오랜만에 넷이 모이자고 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럴까, 싶던 차에 말없이 훌쩍 여행을 떠난 두희를 떠올렸다. 넷이면 그도 온다는 것이기에 나는 갈지 말지 망설였다. 두희가 일 년 반 만에 귀국을 해 모이는 것이랬다. 문어체로만 말하는 그의 말투며 희미한 내 연애운 따위를 생각했다. 이리저리 생각하자 술이 고파졌다. 고파졌으니 그냥 가기로 했다.

눈 쌓인 12월의 대학로는 붐볐다. 팔짱 낀 사람들을 헤치며 걸었는데 양꼬치와 칭따오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도착했더니 욘과 김은 먼저 와 있었다. 간만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두희는 곧 올 거라고 욘이 말했다. 그러자 김이 여름에 떠난 사람이 겨울에 돌아온다며 중얼거렸다. 가끔 업데이트되는 SNS가 아니면 두희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계절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그가 여전한 표정과 목소리로 날 아는 체할지 궁금했다. 나는 그때와 똑같은 마음일지 궁금했다. 조마조마하기도 해 짜사이랑 땅콩이나 집어먹었다.

잠시 뒤 나타난 두희는 추리닝 차림이었다. 피부가 한층 더 거뭇했고 수염과 머리는 대충 정리한 듯했다. 얼굴에선 윤이 났는데 기름 때문이라기 보단 어딘가 닳아서 그렇다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얼굴이 일 년 육 개월 만에 갱신되는 것이었다. 익숙하면서 낯설 수 있다는 게 재밌어서 허허 웃었다. 모두들 엉거주춤하게 선 채 멋쩍은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한국 겨울 원래 이렇게 추웠습니까.

두희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춥죠, 그럼.

김이 대답했다.

원래 추웠는데 까먹었어요?

욘이 말했다.

아이, 추워.

내가 오소소 떨며 말했다. 네 명이서 오순도순 양꼬치 그릴에 손을 녹였다. 어쩐지 모양새가 좀 궁상맞다 싶던 차에 칭따오 맥주가 나왔다. 이렇게 넷이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라며 두희가 건배를 외쳤다. 자기 없이 셋이서도 만난 적 있냐고 묻기에 욘이 셋은 커녕 둘이서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어라 왜지, 하고 물으려다 답을 알 것 같아 질문을 맥주와 삼켰다.

그야 넷이 애매한 관계라 그랬다. 우리는 토요일마다 펍에서 마주치다가 말을 트게 된 사이였다. 가능한 한 익명으로 대화를 나누려고 호칭을 정해서 서로를 불렀다. 선을 넘는다 싶은 발언들은 모두들 피했다. 특히 각자의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불행을 억지로 막으려 하는 일은 없었다. 술잔이 비고 차는 행간에 어떤 고백들이 싹트면 묵묵히 잘 들어주는 게 다였다.

누군가 맥주를 들이키곤 갑자기 얘길 꺼내는 식이었다. 예컨대 삶이 텅 빈 건 아니지만 아주 충만하지도 않은 느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그리워하는 느낌. 혹은 어쩌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던 곳에 돌아가고 싶은 느낌. 헛헛한 느낌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얘길 꼭 남의 사연이라도 전하듯 하는 것이었다. 말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침울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그랬는데 그런 말을 듣고 있자면 어쩐지 나한테서도 능청맞게 시침 뚝 뗀 속내가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멋쩍고 남사스러워 견딜 수가 있겠나 싶은 심정들이었을 것이다.

모임이 처음 시작된 건 2년쯤 전 학교 후문 펍에서였다. 나는 토요일에 할 것도 없어서 갔다. 신청곡을 틀어주는 곳이었다. 사각형 펍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혼자 맥주를 마셨다. 좋은 펍은 변두리 자리의 분위기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맞은 편 모퉁이에 두희가 앉아있었다. 척 보기에 잘생긴 외모였다. 어찌됐건 나처럼 구석이 차라리 마음 편한 사람이겠거니 하며 꽤 마음에 드는 펍이라 토요일마다 들렀다. 들르다 보니 다른 두 구석도 일종의 지정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여자와 남자가 각각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두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흑! 하는 울음이었다. 술동무라도 해줄까 싶던 차에 웬 덩치 큰 남자가 두희의 맞은 좌석에 앉았다. 왼쪽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안주를 시키더니 두희와 술을 마셨다. 다음 토요일에는 둘이 아예 함께 앉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가 싶었는데 그 다음 토요일에는 또 다른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까지 합석했다. 왠지 다음 주에는 나도 합석을 해야 하는 눈치라 심호흡을 했다. 그때 건너편의 셋이 뒤를 돌아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별 기색들 없이 바로 시선을 돌려서 난데없이 상실감을 느꼈다. 재빨리 맥주를 마시고는 나와버렸다.

아무튼 그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몇 주 뒤 학교에서 두희를 마주쳤다. 이른 오후였다. 사람이 잘 지나지 않아 좋아하던 학교 후문 근처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던 참이었다. 지난밤 먹다 남은 치킨 살을 발라놓은 게 반찬이었다. 웬 비둘기가 기웃거려서 나눠줬다. 구구구구 맛있다고 먹었다. 그때 낯익은 누군가가 다가오기에 설마 했는데 과연 두희였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그가 맞은 편 벤치에 앉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비둘기네요.

비둘기죠.

내가 대답했다.

치킨 주고 계시네요.

나는 대답 않고 치킨 살을 묵묵히 던져줬다.

치킨은, 잔인한 음식 같지 않습니까?

그가 물었다.

새가 새를 먹을 수도 있죠.

그게 아니라 치킨 자체가 말입니다.

나는 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랬더니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치킨이란 것은, 달걀로 만든 튀김옷에 다 큰 닭을 담가 튀긴 것입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내 대꾸라도 기다리나 싶던 차에 그가 이어나갔다.

한때 가능했던 게 되지 못한 달걀과, 됐지만 실망한 닭이랑 합해지지 않았습니까. 잔인한 음식입니다, 치킨은.

할 말을 찾다가 나는 치킨 조각을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그래도 맛있는 걸요.

그건 그렇죠.

두희가 말했다. 봄바람이 내 이마를 쓸어 넘겼다. 하얀 낮달이 깨끗하게 떠 있었다. 날은 좋은데 꽤 이상한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왜 펍에 안 오십니까. 앞으로 넷이 같이 마시자고 권할 참이었습니다만.

그가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같이 술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생각 있으십니까.

나는 또 어깨를 으쓱 했다.

맥주는 평소에 레드락 드시죠? 사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을 봤다. 이상한 대화였는데 뒷맛이 괜찮네 싶었다. 그래도 사준다는 말에 대뜸 나가면 술에 환장한 여자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이미지 망가지긴 싫어 한 주 더 뜸 들였다.

갔더니 두희와 덩치 큰 남자, 그리고 단발머리 여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각자 스스로를 두희, 김, 욘이라고 소개했다. 별칭으로 각자를 부르는구나 싶었다. 순간 영희의 별명으론 뭐가 좋지 싶었다. 영희, 영희, 속으로 되뇌다가 어차피 별명 같은 이름이니 그냥 영희라고 부르라 했다.

기다렸는데 왜 이제와요?

자리에 앉았더니 욘이 물었다. 그녀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찰랑거리는 귀고리가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모두가 작게 웃더니 날 따라 어깨를 으쓱 했다.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하이파이브의 역사에 대해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이파이브의 역사요? 두 사람이 손뼉 치는 그 하이파이브?

네. 그 하이파이브요.

김이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덩치가 커서 일어나면 키가 190센티는 될 듯했다.

어쩌다 하이파이브 역사 얘기가 나왔어요?

야구 얘기를 하다가 나왔습니다.

두희가 대답했다.

야구요?

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팀에서 시작됐거든요. 하이파이브 말입니다.

아하.

내가 대답하고는 시큰둥하게 있었더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요, 요즘요, 하이파이브들 하고 다니시나요?

김이 물었다.

앗, 나는 매일 하이파이브를 해요.

욘이 말했다.

매일요? 누구랑 하십니까?

두희가 물었다.

내 쌍둥이랑 하는데요, 사실 완전히 하이파이브는 아니고 일종의 하이파이브인데, 또 실은 그것도 쌍둥이는 아니고 거울이랑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욘이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입을 주욱 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뒤 살짝 위를 올려봤다. 그러고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알았는데, 나는 입양아래요. 부모님이 알려주시더라고요. 나는 해외 입양안데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거예요. 걔는 어떤 나라로 입양됐는지 모른대요. 이러저러해서 걔를 찾을 방법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어요. 그래도 걜 찾을 무슨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 일본의 태어난 집에 직접 가봤죠. 그런데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고 쓰잘머리 없는 것들만 있더라구요. 하나도 도움 안 됐어요.

결국 도로 한국에 왔어요. 걔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어요.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어요. 봤더니 인사라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내가 아는 외국어 인사를 총동원했죠. 안녕, 곤니치와, 니하오, 알로하, 나마스테, 샬롬, 사와디캅, 헬로, 봉주르.

매일 거울 앞에서 인사를 했어요. 근데 문득 인사 대신 그냥 손만 맞잡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외국어 인사는 너무 길고 머니까. 그런데 거울이란 물건은 말이죠. 아무리 손을 갖다 대봤자 건너편과의 사이엔 항상 틈이 생기잖아요? 결국 그것 때문에 거리가 그 이상 안 좁혀지더라구요. 그래도 나는 집 나설 때면 늘 거울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나와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두희와 김이 음, 하더니 맥주를 들이켰다. 나도 들이키자 욘도 들이켰다. 두희가 잔을 내려놓고는 욘 씨는 매번 이력이 바뀌는군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신청곡을 적더니 우리에게 펜과 종이를 돌렸다. 욘은 신청곡을 적으며 크리켓 선수들도 하이파이브를 했을까, 하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뭘 쓰고 있나 몰래 흘겨보니 모르는 곡이었다. 나도 김도 신청곡을 써넣자 두희는 종이를 주인아저씨에게 가져다주러 갔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쪽 벽면에 프로젝터로 틀어져 있는 미국 90년대 뮤직비디오를 봤다. 재미가 없어서 금방 시선을 돌렸다. 침침한 조명에 나무의자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벽에는 포스터나 그림들이 빼곡했다. 그중엔 부처와 알라와 시바와 예수가 잔디밭에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그림도 있었다. 커다랗고 우아한 후광을 등진 그들에게 사람이며 동물이며 사이좋게 다가가고 있었다. 왠지 귀여우면서도 경건한 마음이 들어서 이런 그림에라면 기도를 해봐도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희는 돌아오며 뻥튀기를 한 그릇 퍼왔다. 김은 싱긋 웃으며 남세스레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다정한 사람인가보다 했다. 그때 두희가 뻥튀기 그릇을 내려놓다가 그릇을 쏟고 말았다. 연두색 분홍색 노란색의 초라한 뻥튀기가 와르르 바닥에 퍼졌다. 김이 아, 하며 황급히 달려들기에 도로 줍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떨어진 개수를 세는 것이었다.

둘, 네, 여섯, 여덟, 열…….

김이 중얼거렸다. 어두운 바닥을 손이 분주히 더듬었다. 덩치에 비해 어째 소심해 보이지 않나 싶었다.

김 씨, 뭐하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욘이 대신 설명하겠다는 듯 김이 왜 저러냐면, 까지 말했는데 두희가 조용히 하자며 쉿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둘은 이전에 본 모습인 듯했다. 우리는 잠자코 김을 바라봤다. 떨어진 뻥튀기를 다 센 그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덧셈을요, 좋아해서요.

좋아 한다고요? 덧셈을?

내가 물었다.

얼마나 좋아하냐면요, 길에 보이는 숫자란 숫자를요, 다 더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더하지 않으면 마음이 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가끔은 이렇게 떨어진 것도 더하고 풍경에 보이는 것들도 더하는데요, 어째 허하긴 매한가지라서요, 곤란해요. 플러스를 하고 나면 이콜이 뒤따라 생겨나잖아요. 그런데 그 이콜이 어김없이 플러스로 계속 변해버려서요. 덧셈을 해야 해요.

이 얘기가 뭔 얘긴가 싶어 멍하니 있었는데 두희와 욘은 다 이해했다는 듯 끄덕여 나도 따라 끄덕이고 말았다. 김은 눈웃음 지으며 모두를 둘러봤다. 아아 이곳은 허언의 장이로구나, 싶었다.

넷 사이에선 늘 고백 아닌 고백이 오갔다. 그리고는 지나간 이야기엔 미련 없다는 듯 새로운 화제로 서로 떠들곤 했다. 낯선 사이니 덕담이 오가지 않거나 침묵이 흐르면 난감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서로에게 허락해준 자리임을 알았다. 그런 공기 안에서라면 우리는 명랑해질 수 있었다. 어떨 때 나는 그들이 오지 않는 평일에도 그 펍엘 갔다. 가서는 두희를 처음 본 날을 떠올리거나 네 명의 신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그림을 보거나 내 연애운을 점쳐보거나 했다. 어찌됐건 그 펍에선 편안한 마음을 느끼곤 해 매주 들렀다. 염증이 느껴져서 갑자기 발길을 끊기 전 까지는 그랬다.



다들 얼굴이 불콰했다. 먼 중국 땅의 향신료며 고수나물 냄새가 허공을 어질어질하게 돌아다녔다. 화장실에 간 두희가 돌아와서는 무슨 얘기들 하고 계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두희에게 중국도 갔다 왔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내버려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가 나중이면 까먹을 것 같아 그냥 관뒀다.

댁 때문에 우리 모임이요, 어떻게 공중분해 됐는지 말하고 있었거든요.

김이 말했다. 난데없이 틱틱거린다 싶어서 왜 그러나 하고 그를 쳐다봤다. 눈빛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술기운에 그러는 거라고 보기엔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를 끈질기게 추궁하는 눈길이었다. 그러던 찰나 욘이 그의 맥을 끊었다.

얘는 또 왜 이런대. 그냥 각자 살던 얘기 하고 있었죠.

그녀가 말하고는 고량주 한 잔을 홀짝 삼켰다. 내가 펍에 발길을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희는 긴 여행을 떠났다. 토요일 모임을 지속시키기엔 욘과 김으로선 힘이 부쳤을 것이었다. 모임이 사라진 건 그래서인 듯했다.

내가 펍에 가지 않게 된 이유는 이제 굳이, 라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쩐지 허무하고 소용없다 싶었다. 허언을 가장한 푸념은 나아지는 것 없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우스꽝스런 배역에 진지하게 몰입한 배우들 같았다. 유난떤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듣고 있자면 왠지 찔려서 스스로를 3인칭으로 조망하게 됐다. 풀 수 있었던 참고서나 벌 수 있었던 돈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며칠 뒤 두희가 여행을 떠났다는 글을 SNS로 읽었다.

1년 반 사이 욘은 기자가, 김은 스타트업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취업을 하지 못한 건 나와 두희 뿐이었다. 욘과 김은 펍에서 보내지 않은 시간을 각자 차곡차곡 쌓은 듯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마음에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량주를 삼켜서 기어오르는 것들을 떨궈냈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은 다 익은 양꼬치에서 고기를 덜어내며 일터 얘길 했다. 김은 박봉에 엄청난 근무 시간을 불평했고 욘은 무능한 상사의 눈치를 봐야한다며 불평했다. 테이블이 빈 칭따오 맥주병으로 북적였다. 맥주병의 스티커에 결로가 흥건했다. 그들 얘기를 듣자 하니 부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맥주병 스티커나 떼어 고이 접어두었다.

나는 노량진에서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그곳은 신기하게도 희망과 절망이 딱 5대5로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곳이었다. 왼쪽 눈에선 희망의 안광이, 오른쪽 눈에선 절망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누구든 희망과 절망의 낙차를 매일 겪었다. 나는 희망 빔 절망 빔, 하고 눈에서 광선을 뿜어내는 거대괴수가 된 고시생을 상상하며 쉬는 시간에 웃곤 했다.

아무튼 서울은 여러모로 비쌌다. 반지하의 고시원 방에서 발 겨우 뻗고 살았다. 내가 씨앗이라도 되는 양 심겨졌는데 물론 씨앗이 아니기 때문에 햐, 알고 보니 묻힌 거더라, 하고 회한 어린 감탄을 밤이면 했다. 낡은 반지하방에선 뭐든지 여러모로 삐걱거려서 무너질까봐 겁나기도 했다. 그런데도 월세를 35만원씩이나 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까 했지만 그러지 않고 싶었다. 고로 연희동의 작은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다. 호르몬에 미쳐 날뛰는 중학생들은 과연 몬스터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가르치는 학원에서 한 파트 수업이 끝나고 교재를 복사하고 있노라면 옆 반 수업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초등학생들과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남자 강사였다. 얘들아 가능형이 뭐가 있지? 가능하다, 할 때 그 가능형, 하고 그가 물었다. 그러면 애들은 캔이요, 파서블이요, 에이블이요, 하고 대답했다. 요즘 초등학생들 참 고생이 많다 싶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아마 갈 일 없을 나라의 언어를 아이들은 어떤 심정으로 배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릴 적엔 나도 공부에 꽤 열심이었다. 다른 언젠가의 다른 곳에 있을 내 모습에 꿈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건 다른 때의 다른 곳을 향한 향수병뿐인 듯했다. 문득 캔이니 에이블이니 파서블이니 하는 문장의 내용을 가능형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이 삶에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도로가에 쌓인 눈이 질척했다. 건널목에서는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욘 씨. 김 씨. 요즘도 거울이랑 하이파이브랑 덧셈 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오.

아뇨, 안 하는데.

둘이 대답했다.

그럼 그때처럼 털어놓아야만 하는 것들은 안 털어놓으며 지냅니까?

두희가 물었다.

덧셈을 안 하니까요, 당연히 속이 많이 허전해요.

바쁘니까 뒷전이죠. 까먹고 지내요. 은근히 편하더라고요.

욘이 대답했다.

편하다, 라. 조금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뭐가요?

욘이 되물었다.

자신의 헛헛함에 대해서 말입니다.

두희가 말했다. 김이 고량주를 들이키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턱을 괴더니 두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두희 씨는요, 예? 잘 알지를 못하시겠지만요. 생계란 것이 있고. 예? 그러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도 있고. 그런 것이지 않겠나요? 이해가 안 되나요?

맞아, 맞아. 솔직히 칭찬 해줘야 돼.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거 대단한 일이에요. 박수라도 칠까요, 우리? 싫어? 여기 사람 너무 많은가.

김은 손날로 테이블을 치며, 욘은 싱긋거리며 말했다. 내게도 어떤 고민들은 중요했다가 곧잘 사소한 것으로 바뀌었다. 중요한 걸 중요하게 유지하는 건 중요할지 문득 궁금했다. 무심코 중요, 중요, 하며 내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서 화들짝 놀라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언뜻 김이 두희를 노려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어떤 진득한 감정이 그의 눈빛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김이 취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내가 취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냥 둘 다 취해서 그런 걸로 결론지었다.

그래서. 우리 유책임한 두희 씨는 여행 어딜 다녀왔어요? 솔직히 우리가 아까부터 듣고 싶어 했던 거 알잖아. 왜 말을 안 해. 말 좀 해봐요.

욘이 말했다. 두희가 다리를 달달달 떨더니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겉옷을 챙겨 입고는 나갔다.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비록 싫증이 나서 모임을 떠나긴 했지만 나도 토요일마다 이것저것 얘길 많이 했다. 가끔 날이 답답하다 싶으면 우리는 다 같이 펍 말고 다른 곳에 갔다. 잠 안 오는 열대야엔 아주 느지막이 모이기도 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대학로 근처의 성벽을 올랐다. 성벽에 걸치고 서서 내려다보면 멀리까지 훤했다. 남산타워의 불빛이 느긋이 깜빡거리고 빌딩이며 집들이 낮게 내리깔렸다. 욘이 조용히 노래를 부르거나 김은 옆에 서서 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세거나 했다. 그렇게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희망들이란 얼마나 믿을만한 것들일까. 나는 언제쯤 내가 바라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먼 폭죽소리가 팡팡펑펑 들려왔다. 누군가 뭔가를 축하하는 소리였다.

집 진짜 많네.

욘이 말했다.

저 옛날에 이 동네에 산 적 있어요.

내가 말했다. 모두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모기가 많았다. 나는 팔뚝이며 종아리며 찰싹 찰싹 때렸다. 손바닥에 터지는 느낌이 들어 봤더니 피가 조그맣게 번져 있었다. 슥 닦고는 말을 이었다.

그 무렵 저는 레고를 좋아하는 애였어요. 부모님은 두 분 다 왜소했는데요, 저는 초 고도비만이었어요. 딸인데도 몸무게와 키로 아빠를 앞질렀죠. 초등학생 때였는데,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안 놀고 방에서 펑퍼짐하게 앉아서 레고로 집을 짓곤 했어요. 친구들한테 놀림 받기도 했는데 혼자만 있으면 어김없이 행복해지는 유년기였죠.

그런데 우리 집이 재개발 된다고, 이사를 가게 됐어요. 참 좋아하던 집이었는데. 한옥이었어요. 마당엔 라일락이랑 감나무가 있고 뒤뜰엔 아까시가 있었어요. 워낙 음지이고 습해서 뭔가가 많이 살고 있었죠. 온갖 게 다 나왔어요. 흰개미, 그냥 개미, 쥐며느리, 그냥 쥐, 곱등이, 돈벌레, 이런 것들이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집의 골조가 끼익 거렸는데, 겁났다기보다는 집이 꼭 살아 있어서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어요. 가을밤에 자다 보면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홍시가 퍽!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무튼 재개발 된다는 말을 들으니, 난데없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내가 무거워서 집에 이상이 생긴 건데, 너무 착한 엄마 아빠가 그걸 숨기려고, 그래서 재개발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정말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허물어진 그 집을 보니 끔찍한 마음이 일었어요. 마당의 라일락이랑 감나무, 그리고 뒤뜰의 아까시도 뿌리째 뽑혀 있더라구요. 널브러진 잔해들이랑 휑한 터 주위로, 살 속이 뒤집힌 것처럼 나무뿌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집 주위를 배회하면서 파편이라고 추정되는 조각들을 모았어요. 쪼그리고 앉아 한때 내 집이었던 잔해들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맞춰봤어요. 어린 마음에 나름대로 복원해보려고 했던 거죠. 근데 안 되더라고요. 레고처럼은. 그때 이후 레고로 만든 집은 안 부수고 그대로 모셔놓았어요.

내가 이야길 마치자 모두 조용히 맥주를 홀짝였다. 지금은 홀쭉한 내 모습에서 초 고도비만이었던 어린 시절이 잘 안 떠오른다며 김이 말했다. 아직 짝을 못 찾은 밤 매미가 맴맴 울어댔다. 피워놓은 모기향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두희는 모기향을 들어 가로등 빛에 이리저리 비춰봤다. 연기가 새근새근 피어올라왔다. 그는 그걸 한참동안이나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연기가 작게 나는군요. 한 번은 큰 연기가 피어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원예의 제왕이 되고 싶게 해준 화분에서,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두희는 마요네즈에 오징어다리를 푹 찍더니 질겅질겅 씹었다. 질긴지 한참을 씹더니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첫사랑이 준 화분이었습니다. 그이는 식물을 좋아했습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해서 물만 마셔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여자였죠. 아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헤어지자는 걸 제가 여러 번 붙잡았어요. 어느 날 제게 화분 하나를 주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분은 말라 죽고 그녀는 떠났습니다.

말라 죽은 줄 알았던 모종을 화분에서 땅으로 옮겨 심었더니 살아났다는 얘길 들은 적 있습니다. 되살리고 싶다고 빌면서도 한 편으론 애도를 하며 저도 뒷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며칠 뒤 검은 연기 한줄기가 뒷산에서 피어오르더군요. 불이 난 거였습니다. 자라라는 나무는 안 자라고 검은 연기만 무럭무럭 솟아올랐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예에 아무리 젬병이라지만 그렇다고 불이 날 것 까진 없잖습니까.

원예를 잘 하는 것은 곧 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화분을 잘 가꾸고 키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모종을 사서 키워도 어쩐지 계속 말라 죽었습니다. 지치더군요. 저까지 바짝 말라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역시, 원예의 제왕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가봅니다.

김은 다정한 눈빛으로 두희의 고백을 경청했다. 욘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야길 마친 두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둑한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모기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우리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두희가 최근에 개봉한 그 영화를 봤냐며 다른 이야길 시작했다.



두희는 담배 피우러 나가고 없고 김은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욘이 아까부터 웬 술을 그렇게 먹냐고 물었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남은 고량주를 다 따라 마시고는 턱을 괸 채 눈을 끔뻑였다. 거친 숨소리에서 술 냄새가 났다. 잠시 뒤 두희가 저희 2차 갑시다, 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들 별 이견이 없어서 주섬주섬 밥값을 나눠 냈다. 어느새 밤 열두 시가 넘었는데 바깥은 안개가 자욱했다. 늘 가던 펍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쌓인 눈 위로 뽀드득뽀드득 걷자니 취한 마음에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때 문득 두희가 입을 열었다.

여행을 어딜 갔다 왔냐고요. 음. 마침 저는 원예의 제왕이 되고 싶기도, 되기 싫기도 한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가운데에 끼어있었달까요.

나는 추웠지만 다들 보폭을 늦추기에 같이 설렁설렁 걷기로 했다.

답답한 마음에 기분전환이나 할 겸 여행이나 떠나자 했습니다. 유럽, 동유럽, 인도, 중국. 아무튼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참, 영희 씨. 덴마크엘 갔더니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레고로 만든 집이 있더군요. 보자마자 영희 씨 생각이 났습니다.

두희가 말하고는 나를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두희가 피식 웃더니 따라서 어깨를 으쓱 했다.

어찌됐건 그러다가 페루에서 어떤 부부의 집에 홈스테이를 꽤 길게 했습니다. 금실이 좋은 부부였는데, 우연찮게 그들도 화분을 많이 갖고 있더군요. 기념일마다 하나씩 주고받은 화분이 모이고 모여서 그렇게 많아진 거랬습니다. 마당도 꽤나 근사했었죠. 이 분들이라면 원예의 비법을 알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원예의 제왕이 되는 법을 알아오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우연히 기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 집에 머무르며 이것저것 많이 배웠습니다. 잡일을 많이 했죠. 열심히 일하던 제 모습이 믿음직했는지 화분에 물을 주고 돌보는 일도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시들시들해지더군요. 화분 말입니다. 저는 곧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결국, 또 다시 실패를 하고 만 것입니다.

두희가 말했다. 김은 조금 떨어져 비척비척 걷더니 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네, 하는 가사였다. 목소리가 청승맞아서 어쩐지 더 궁상맞았다. 욘이 조용히 좀 하라며 그를 나무랐다. 눈 때문에 질척해진 아스팔트 도로 위로 이따금씩 차가 지나갔다. 한숨을 쉬었더니 입김이 짙게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달이 흐릿하게 보였다. 김이 중얼중얼 거려서 나는 그에게 혹시 뭐라도 세고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입을 연 건 두희였다.

저도 긴가민가한 이야기라 할지 말지 고민했습니다만, 역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겠습니다. 욘 씨. 페루 공항에서 말입니다.

욘과 내가 두희를 바라봤다. 두희가 말하고는 한 번 더 숙고하는 듯했다. 옅은 신음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욘 씨의 쌍둥이 자매를 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셋이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우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찾다 보면 언젠가 만나지 않겠냐, 하는 겁니다. 페루에 사는 분인지, 아니면 저처럼 여행하는 분인지 알 수 없지만 보기는 봤으니까 말입니다.

두희가 조금은 횡설수설하며 설명했다. 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두희를 올려다봤다. 쌍둥이가 있다는 욘의 말을 나는 반만 믿었는데 정말로 있는 모양이었다. 눈 쌓인 보도 위를 네 명이 어쩐지 황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두희가 말을 덧붙여 나갔다. 요컨대 이런 것이었다. 욘과 키도 체형도 같았지만 복장과 머리스타일은 달랐다, 아주 닮은 사람일 수도, 어쩌면 정말로 쌍둥이일 수도 있다, 하필 그날 공항이 인산인해라 발은 분주히 움직였는데도 멀어져갔다, 그 사람에게 잃어버린 쌍둥이가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모두가 이 얘길 얼떨떨한 표정으로 들었다. 욘의 얼굴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가만히 서있기 추워서 일단 펍에 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말했다. 앞에서 웬 고양이가 으야오옹, 하고 날카롭게 울기에 화들짝 놀랐다. 술기운에 눈이라도 던져주려고 뭉쳤는데 도망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펍 쪽으로 가는데 다들 말이 없었다. 나는 욘의 없는 줄 알았던 쌍둥이며 두희가 길렀던 화분이나 마침 먹고 싶은 호빵이나 군고구마 따위를 생각했다. 그리고 일터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밤을 새우는 김의 모습이나 상사에게 쿠사리를 먹는 욘의 모습도 떠올렸다.

그렇게 걷다가 건널목에서 기다리는데 왠지 곁이 휑해서 뒤돌아봤다. 김이 따라 오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기우뚱하게 서있었다. 욘이 김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욘은 남 달래줄 기운이 나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김의 덩치가 커서 욘은 팔을 위로 뻗어야 했다.

김, 2차 갈 수 있겠어? 우리 건너야 돼.

욘이 묻자 김이 대답은 않고 고개를 오히려 치켜 올렸다. 긴 한숨을 위로 뱉어냈다. 입김이 위로 높이 솟아오르기에 굴뚝이 생각났다. 아까부터 새까맣게 타고 있나 싶은 김의 속내를 떠올려봤다. 나도 두희도 그 둘에게 다가갔다.

김 씨 많이 취했나 봐요. 아까 고량주 그렇게 마시더니.

내가 말했다.

저기 계신 두희 씨는 말이죠, 거짓말쟁이예요.

김이 흐릿한 소리로 말했다. 두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와 욘이 난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욘 씨의 쌍둥이 봤다는 거요, 거짓말일 걸요. 너무 믿으면 안돼요. 저 사람은.

무슨 소리예요, 김 씨. 우리 빨리 가자. 춥단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김이 고개를 도로 푹 떨어뜨리고는 난데없이 코를 훌쩍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콧물이라도 마시나 싶었던 차에 그가 고개를 도로 들었다. 추위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빨갛게 달은 얼굴이었다. 그가 턱을 문 채 두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그가 말했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느새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이 삐비빅 소리를 내며 있지도 않은 보행자를 재촉하고 있었다. 나도 문득 마음이 초조해졌는데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더운 여름밤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국 발 미세먼지가 남아 있어 누르스름한 가로등빛이 허공에 널찍하게 퍼졌다. 시원한 게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깨물어먹으며 건널목에 다가가던 차에 누군가가 보였다. 덩치가 커서 김인가 하고 다가가보니 김이 맞았다. 그 옆엔 다른 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보니 두희였다. 뒤에서 놀래줄 심산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런데 거리가 좁혀지자 생소한 광경이 비쳤다. 거구의 남자와 중키의 남자 둘이 건널목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꺼지기를,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면서.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쳤다. 가로수에 붙은 매미까지 울음을 멈추며 괜히 숨을 죽였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으로 흘러내렸다. 토요일 모임에 싫증이 난 건 그 즈음부터였다.

나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볼이며 귀며 코끝이며 다 시렸다.

아이, 김 씨. 화 내지 마요. 우리 가서 술 마시면서 얘기 찬찬히 하면 되잖아. 응?

내가 말했다.

왜 말도 없이 나 떠났어.

김이 들은 체 않고 두희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 물었다. 어수룩하지도 존댓말도 쓰지 않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남정네들의 주먹다짐이 시작되려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욘과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만 주고받았다.

왜들 싸우고 그래요.

욘이 김을 말렸다.

대답 해.

김이 두희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서 따졌다. 그런데도 두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이 없었다. 김은 눈물을 슥 닦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누가 누굴 때린 건 아니었고 김의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눈 더미가 쓸려 떨어진 것이었다. 김이 어푸, 하더니 얼굴을 털었다. 얼굴에 묻은 눈 조각들이 녹아 땀 같이 보였다. 그는 두희를 바라보며 잠시 파들파들 떨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고는 왔던 길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욘은 두희와 김 사이를 번갈아보더니 김에게 갔다. 김 씨, 왜 그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또 연락할게, 하고 욘이 소리쳤다. 두희와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척거리는 김과 애써 부축을 하려는 욘이 점점 멀어져갔다.

아이 씨. 나는 술 더 먹고 싶은데.

술집에 가는 건 포기하고는 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이나 코나 입술을 요목조목 뜯어봤다. 시선을 의식한 그가 날 바라봤다. 나는 술기운에 두희와 팔짱이라도 끼고픈 마음이 들었다.

김 씨는 왜 저렇게 화 낸 거예요?

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너무 눈치 없나 싶었지만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근데 김 씨랑은.

김 씨랑은 어떤 관계였냐고 물으려다 말을 삼키려고 했는데 취한 김에 그냥 아예 삼키진 말기로 했다.

근데 김 씨랑 손잡고 있던 거 다 봤어요. 저번에.

내가 말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 했다.

욘 씨가 쌍둥이 였다는 말 진짜인가 봐요. 정말로 그 사람 본 거죠?

이번에도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 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맥이 빠지고 말았다. 두희고 김이고 일단 다 원망스러웠다. 이제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그냥 앞만 보고 터덜터덜 걸었다. 찬 공기에 취기가 좀 가시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살던 예전의 그 집으로 가보자고 마음 한 켠의 귀소본능이 속삭여왔다. 그런데 내일은 공부 하고 알바 해야 하니까 나는 곤란해, 곤란해, 하고 되뇌었다. 그런데 문득 그가 물어왔다.

제가 너무 유책임했습니까. 저 자신의 헛헛함에 대해, 너무 유책임했습니까.

나는 풀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나빴냐는 말처럼 들려서 아니꼬왔다. 김에겐 아무래도 무책임하지 않았나 싶었다. 나빴죠 그럼, 하고 대답하려던 차에 갑자기 유책임, 유책임, 하고 곱씹게 됐다. 아무 말도 안 나올 것 같았는데 눈물은 조금 나올 것 같아 입이나 다물기로 했다.

그와 나는 집이 다른 방향이었다. 두희는 그렇다 치고 나는 집 까지 어떻게 가나 걱정됐다. 버스를 탈까, 걸어서 갈까, 하다가 택시를 타기로 했다. 로터리에 서서 갓길에 서서 허공에 손을 한참 휘휘 저었더니 택시가 앞에 섰다.

두희 씨, 나 간다. 잘 가요.

내가 앞문을 열며 말했다. 두희는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택시 아저씨에게 노량진으로 가 달라고 했다. 조수석의 사이드미러로 두희를 봤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택시를 가만히 선 채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목소리 좋은 여자가 심야의 신청곡이라며 노래를 틀어줬다. 뜨뜻한 택시에 타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눈을 끔뻑거리며 창문 밖을 올려다봤는데 안개 때문에 달이 흐릿했다.

반쯤 꿈을 꾸는 와중에 머릿속에 여러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바빠서 자신의 헛헛함을 돌볼 틈이 없는 욘과 김은 무책임한 걸까. 공부를 하고 돈을 벌어도 마음이 허한 나는 중요한 걸 중요하게 유지하지 않은 걸까. 갑갑해서 창문을 조금 열었다. 만약 유책임해진다면. 그래서 잔인한 두희는 원예의 제왕이 될 수 있을까. 욘은 쌍둥이를 찾을 수 있을까. 김에겐 더 이상 숫자를 더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올까.

나는 노량진의 그 집 말고 옛날 내 집을 떠올렸다. 라일락과 아까시가 피는 곳. 가을 늦은 밤이면 다 익은 홍시가 떨어지는 곳. 레고로 만든 집이 있는 곳. 땅에 심겨진 나무들이 뽑혀져서 참담하게 뿌리를 드러낸 곳. 내가 너무 무거웠던 곳. 어쩌면 그래서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곳. 여기저기 널브러진 집의 잔해를 떠올렸다. 한때 집이었던 조각들을 기억 속에서 주섬주섬 불러 모아봤다. 원래의 모양으로 다시 쌓는데 자꾸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래도 차곡차곡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짓는 마음으로 다시 쌓았다.

문득 욕지기가 올라와 아저씨에게 세워달라고 했다. 내리니 노량진역이었다.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택시를 보내고 허리를 숙인 채 한참 있었다. 몸의 겉과 속을 뒤집어 찬물로 헹구어내고 싶었다. 상체를 겨우 일으키고 몇 걸음 걸었다. 신호등 불빛이 안개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나는 건널목 앞에 섰다. 밤 매미가 숨을 죽인 어느 열대야의 두희와 김처럼. 빨간불이 꺼지기를,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작가 소개


류한경

93년생.

글도 쓰고 사진도 찍습니다.

instagram: @hankyung.ryu

hankyung.ry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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