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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9 잠과 재

#위험한_리뷰 9


양윤의 X 한유주


잠과 재



양윤의 수록 텍스트

「여성과 토폴로지」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서사」




나는 열 살에 유괴당할 뻔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몇 년 후,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안방에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플라스틱 화장품 샘플용기나 금박이 벗겨진 분첩 따위의 예쁜 물건을 찾으며 놀던 때, 침대 밑이었나 장롱 깊숙한 구석이었나, 아무튼 아이의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서 발견된 빨간색 나무상자를 열어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여전히 초등학생이었을 때다.

상자에는 통장과 인감도장 따위와 더불어 내용물로 볼록한 하얀색 규격봉투가 들어 있었는데, 평소라면 호기심을 갖지 않을 물건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을 열어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뭉치를 펼쳤다.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모월 모일까지 현금 백만 원을 제일은행 모 계좌로 송금할 것. 송금하지 않으면 장녀의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자를 것임. 다른 종이들에는 양친과 나, 그리고 동생의 주민등록번호와 우리가 살던 집주소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자는 우리의 개인정보를 알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열 살이었던 어느 날, 자다 깨보니 엄마가 내 손을 붙들고 울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집에 등이 두툼한 남자들이 몇 번 드나들었던 것도, 한 달쯤 누군가가 항상 학교까지 나를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왔던 것도 모두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때리던 손은 생경하게도 우는 손이 되어 있었다. 그때 무심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나은가? 아는 손에 맞는 것이 나은가, 모르는 손에 손가락이 잘리는 것이 나은가? 나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볼록하게 채워 넣고 상자를 침대 밑인지 장롱 깊숙한 구석인지에 넣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양친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그 일, 그러니까 (사실)로 구현되지 않은 일이 드물게 떠올랐다. 한 번은 단편으로 쓰기도 했다. 백만 원이라는 금액이 손가락 열 개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화자의 목숨값을 억 단위로 올리면서 실소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살아 있을까? 죽었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살아있을 것이다. 추측하기로 그는 검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방 도시의 작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어쩌면 그는 양친의 지인이었을 수도 있다. 한동네에 사는 이웃이었을 수도 있다. 편지에는 소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고만고만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일단 경험이 적었고, 때리는 손들로 인해 구체적으로 아팠다. 잘려 나가지 않은 손가락의 아픔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당신은 의아할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선언조로……? 비장하게……? 당신은 모를 것이다. 나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낱낱이 말할 생각이 없다. 다만 암시할 뿐이다. 실현되지 않은 유괴 사건은 그때도 지금도 내게 아무런 자상을 남기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다. 나는 말하지 않는 화자다. 나는 직진을 애호하지만 글을 쓸 때는 늘 우회로를 택한다. 편지 봉투에는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빈 자리가 암시할지도 모르는 것, 에 대해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유괴를 예고하는 편지는 경찰이 개입하기 시작한 뒤로 더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를 발견했을 무렵 나는 새로운 취미를 갖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오층 창문틀에 매달려 이런저런 물건을 아래로 던지는 취미였다. 주로 클립이나 볼펜 따위였는데 나중에는 범법을 저지르기도 했다. 화장지 두 칸을 떼어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불타는 휴지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사라졌다. 재는 어디론가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전체에 안내방송이 울렸다. 내가 사는 동을 특정하지는 않았으나 요컨대 방화를 저지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깊이 반성하는 대신 해가 지고 난 뒤 다시 불붙지 않은 물건들을 조용히 내던지기 시작했다. 내던지고 싶던 것은 나였으나 내가 들어 올리기에 나는 좀 무거웠을 것이다. 설날이었다. 차례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배 혹은 사과 하나를 차가운 창밖으로 내던졌다. 하나만 던지면 흔적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낮이었고,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주민이 내 쪽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재빨리 창문을 닫고 숨을 죽였으나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아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심장이 뛰었다. 오 분쯤 지났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다른 이들이 제발 깨지 않기를 빌며 나는 문을 열어 초인종 소리를 멎게 했다. 지금 내 나이쯤 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사과 혹은 배를 어째서 집어던진 것인지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혹은, 할 말이 지나치게 많아서 방법을, 우회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자 그는 한동안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너. 남자냐, 여자냐?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배였을까, 사과였을까? 그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집 안의 다른 이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깨금발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 집에서 십이 년을 살았다.

아직도 그 집이 꿈에 등장할 때가 있다. 가스레인지에서 파란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러면 나는 홀린 듯 파란 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고통스럽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혹은, 그 사이에 고통이 있다. 잠은 때로 깊고, 때로 얕다. 얕은 잠 속에서 꿈이 더 깊어진다는 (사실)이 때로 의아하다. 이러한 때, 우회로가 보이지 않을 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막다른 골목인데 어째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는 질책이 들릴 때, 실현되지 않은 모든 것―그래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들이 두려울 때, 그러나 실현된 모든 것―잊으려고 하는데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들도 역시 두려울 때, 내가 저지른 사소한 죄들이 누군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중대한 죄들보다 크고 무겁게 느껴질 때, 이러한 때들, 때리는……, 때들이 내 개인적인 서사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럴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틀렸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수많은 암시를, 우회로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멍청이를 누군가라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를 언젠가라고 쓰면서 나는 그 멍청이를 일종의 심연에 밀어 넣고 있다고, 특성을 모두 잃게 해 존재 자체를 불안에 부치고 있다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는데, 그런데……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니야, 나는 여전히 두렵다. 염산 병을 들고 다니는 프랑스 남자가 나오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걸 읽기 전에, 한참 전에, 염산 병을 들고 다니는 남자를 이해한다고, 한 남자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 말이 발화되는 공간에 그와 나, 둘뿐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나는 괜찮았을까? 그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동안, 나는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나의 서사는 대부분 잠과 재 속에, 혹은 그 사이에 있다. 그것을 파내야 한다. 내던지지 않고.






필자 소개



한유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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