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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6 나를 모른 척한 적이 있다



#위험한_리뷰 6


정은경 X 임승유


나를 모른 척한 적이 있다


정은경 수록 텍스트

「‘돌봄’의 횡단과 아줌마 페미니즘을 위하여」



가야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내가 아는 여자아이는 어, 어, 어, 하다가 물웅덩이에 빠지곤 한다. 가끔 개똥을 밟을 때도 있다. 앞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다. 거기 뭐가 있는지 알아서, 도착하기도 전에 머릿속은 이미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버리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가 없어서 기어이 한쪽 발을 적시고 만다. 그런 후에야 멋쩍게 웃으며 두 손을 들고는,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문학은_위험하다』에 대한 리뷰를 쓰게 된다면 뭐든 상관없지만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텍스트가 정은경의 「‘돌봄’의 횡단과 아줌마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그런데 막상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어, 어, 어, 하다가 ‘이거요’하고 말았다.


얼마 전에 한 남성 시인이 여성시사를 엮으려 한다며 전화를 해왔다. 누구나 알만한 굵직한 여성 시인들의 경우 참조할만한 글들이 인터넷 여기저기 많은데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며 도움을 요청해온 것이다. 도움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성을 마련하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내가 쓴 어떤 시에 대한 본인의 해설을 읽어봤냐며, 안 읽어봤으면 읽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에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미안하다며 읽기를 중단시키자 의외로 쉽게 아, 그러냐고, 아무래도 아이도 있는 그런 나이니만큼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할 테니 그럼 여기까지 하겠다고, 그런데 나는 이상한 데서 기분이 상했고, 아니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녁을 먹어야 하니 이만 전화를 끊자 하고는 정말 기분이 상해버렸다. 책을 쓰겠다면서 시인에게 전화해 시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무례함, 여성 시인에게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으면서 여성시사를 쓰겠다는 무모함 등에 문제제기를 했어야 함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여성’ 시인이니까 저녁 식사 준비를 하겠지, 그러면서 당연하게 ‘돌봄 노동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그 남성 시인의 태도가 나에겐 문제가 되었다.


나는 돌봄 노동을 하며 충족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수치심에 가까운 어떤 상태에 자주 놓여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돌봄 노동을 하며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족이 아닌 남을 위해 돌봄 노동을 하면서도 윤리적 충족감을 느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하는 노동인데 하면 할수록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오랫동안 이 간극을 어떻게 하지 못해서 괴로웠다. 정은경이 그의 글에서 참조한 낸시 프레이저의 이론에 따르면, 밖에서의 나는 ‘경제 생산’의 한 축으로 움직이면서 임금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생산노동자’에 가깝다. 하지만 퇴근 후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회 재생산 노동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 재생산 노동으로의 이동을 ‘전락’으로 평가 절하하는 위험성, ‘전락’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부정성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문장을 다시 구성하려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전락’이라는 단어가 놓인 곤경 그 자체가 돌봄 노동을 하며 내가 놓이게 된 곤경과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을 하며 내가 느낀 감정이 충족감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는 걸 설명하는 데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중간에 과일로 입가심을 하는, 내 아이들과 내 남편과 내 시부모가 연출하는 화목한 풍경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힌다. 그 풍경 안에 나는 없다. 내가 없는 그 풍경은 허구라는 걸 가족들은 모르지 않아서, 이제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라고, 와서 이 화목한 풍경을 완성하라고 요구하곤 했다. 풍경 속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놓치면 분위기는 금세 이상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직전에 슬그머니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그들처럼 웃는 것. 그게 나의 역할이었고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로 나는 자주 그 이상한 풍경을 떠올리며 왜 그 풍경 연출에 가담했는지 생각해야 했다. 내가 나를 구하지 않고 나를 삭제하는 폭력적 관계의 구성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어떤 장면은 조화롭게 설명되지 않는다. 죄책감, 억울함, 수치심, 분노가 뒤엉켜 도무지 나를 구해내지 못할 것만 같아진다.


이미 한참을 살아놓고서, 지금부터는 시 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지금까지의 일상을 재배치해나갈 때 나를 추동시킨 힘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시 쓰는 삶’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등치시키며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화목한 가족을 표방한 허구적 서사가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직장에서의 노동에 대부분의 물리적 시간을 배분하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퇴근 후의 나는 ‘다른 삶’을 기대하며 ‘시 쓰는 노동’에 매진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다르게’ 살고자 했던 계획은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내가 하고 있는 게 뭔지 들여다보고자 했을 때 내가 맞닥뜨리게 된 건, 어디에도 없는 나였다. 이상하게 내가 없었다. 나를 지키려고 했던 일인데, 정작 지키려는 ‘나’는 있지 않았다. ‘나’를 구성하는 실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다르게’가 아니라, ‘나’로 살아야 했다는 걸. 일상적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 그 자체를 살아야 했었다. 나만 참으면 되니까, 적당히 참기 위해 슬쩍 발을 뺀 ‘화목한’ 풍경은 표면적으로는 무사하다. 무사한데, 나는 일상적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내는 데 둔감해져 있다. 자꾸 안을 만들고 나를 밖에 위치시키며 주저하고 있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온 것이다. 내가 지금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며 성실하게 관계를 형성해나가고 싶었을 뿐인데, 성실함을 넘어서는 뭔가를 요구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고부터는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렸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결혼을 통해 내가 뭔가 부당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당함은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건가.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 외에는 이 부당함을 설명할 길이 없는데,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뭐가 그렇게 부당하다는 거야, 의아해 하는 표정을 본다. 다들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항변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는 건가, 본질적으로 관계 구성은 누군가의 헌신에 의해 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에 이르게 된다. 결론은 자주 자책으로 끝났다. 그게 가장 쉬우니까. 자책 뒤에 따르는 일종의 윤리적 보상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여성’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사회학적 보고서다. 르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거칠게 서술되었지만, 그 간결성과 사실성으로 인해 이 다큐멘터리적 서사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텍스트가 되었다.”는 정은경의 평가는 적실하다. 한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소위 ‘문학적 언어’로 서술된 서사였다면 ‘엄청난 폭발력’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큐멘터리적 서사’야말로 써 내려가는 입장에서나 읽어나가는 입장에서나 숭고한 인간적 희생과 같은 윤리적 환원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필연적 서사 전략임을 나는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하며 느꼈던 복잡한 감정과 상황을 이야기로 풀어내려 할 때마다 맞닥뜨린 곤궁을 이 소설은 멋지게 돌파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독자들은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지금껏 가부장제를 작동시켜왔던 동력 중 하나가 여성의 자책이라는 억압적 윤리였음을 서술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텍스트다.


나는 ‘돌봄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가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누군가를 억압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절실한 사람이 돌봄 노동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키며, 그 과정에서 충족감을 느끼면 된다. 나 또한 나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내 주변 사람을 위해 돌보는 노동을 하며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더 건강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다만 누구의 강요에 의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하지 않았을 때 비난받고 싶지 않고, 자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돌봄 노동’을 하는 어떤 순간에 수치심을 느낀다. 혹은 누군가 ‘나’를 자연스럽게 ‘돌봄 노동’의 자리에 위치시킬 때 수치심을 느낀다. ‘아 저는 살림을 안 해서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런 방어적인 발화를 하고 나서 또 한 번 수치심을 느낀다. 한번 몸에 각인된 상처는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취약할 때 되살아난다.


피하고 싶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자발적 의지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삭제하고 억압한 ‘나’를 한 번은 제대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 살잖아, 일반화했던 나를 반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식 곳곳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일반화된 가부장적 시스템의 균열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멀쩡하게 작동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여자아이 가야가 여전히 어, 어, 어, 하면서 웅덩이에 빠지듯이, 그런 가야의 모습을 내가 안쓰럽게 느끼다가도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나는 ‘나’를 느끼고 싶다. 자책과 수치심에서만은 벗어나고 싶다. 그래야 어디 가서 밥맛없는 말을 덜 할 수 있을 것이고, 집에서는 틈만 나면 맥주나 찾아대는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자꾸 잊어서, 또 나를 괴롭힐까 봐 잊지 않으려고 다음 문장을 여기 옮겨 적는다.


돌봄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고 임금이 지불될 때, 의존이 창피한 단어가 아니게 될 때, 상호의존이 규범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난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p.156)


보수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금 체제 아래서 진정한 무임승차자는 일자리를 기피하는 가난한 싱글맘들이 아니다. 오히려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을 기피하는 모든 계급의 남성들이다. 저임금과 무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기업들이다.(위의 책, p.191)







필자 소개



임승유.

시인. 최근에 「나는 멀었다」라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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