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S

#위험한_리뷰 5 내 안의 미친女 깨우기



#위험한_리뷰 5


조연정 X 전영규


내 안의 미친女 깨우기


- 조연정,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를 읽고




조연정 수록 텍스트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2018년 한국문학의 여성 서사가 놓인 자리’라는 부재가 달린 조연정의 글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는 ‘2017~2018년 한국 소설에서의 여성서사’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글의 서두에서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이 글은 “최근 1~2년의 서사를 말하기에 앞서, 여성 서사가 강력히 요청되는 혹은 여전히 부정되는 짚어 보는 것”과 함께, “특정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여성 서사를 둘러싼 최근의 다양한 반응들에 대한 내 나름의 주석을 다는 방식”1)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여성 서사 중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강화길의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언급된 평단의 다양한 반응을 정리한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인해 발생한, 소위 ‘김지영 현상’의 유행, 미투(#MeToo) 운동과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처럼 문단 내 이슈를 비롯해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논의되고 있는 여성 서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독자에게도 큰 호응을 얻은 ‘김지영 이야기’는 2018년 말 밀리언셀러가 되기도 했다.



무엇이 세상의 그녀들을 공감하게 했을까. 무엇이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한 세대와 계급,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공감2)”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렇다면, 한 예를 들어보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라는 ‘여자’를 낳은 또 다른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54년생 강 여사는 과거의 그 시절과 비교했을 때, 서른하나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3대 독자 전 아무개라는 남편을 만나, 86년생 첫딸인 나를 출산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를 포함해 무려 다섯 명의 딸을 낳았다. 강 여사는 2년 전 35년간의 오랜 교직 생활을 명예롭게 퇴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부모님까지 함께 사는 강 여사의 결혼생활은 가부장제의 끝판왕이자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참으로 비상식적인 풍경들이 난무하는 삶이었다. 나는 네 명의 여동생이 있다. 강 여사가 유일하게 화풀이할 상대는 첫째인 나였다. 어린 동생들은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강 여사는 어린 시절의 내게 이런 말을 종종 퍼부었다.


이 집이 이 모양인 줄 알았으면 내가 절대 이 집안에 시집을 안 왔지. 나 사실 신혼 때 도망가고 싶었는데 뱃속에 네가 있어서 도망 못 간 거야. 직업이 ‘선생’이라는 체면 때문에 이혼은 더더욱 상상도 못 했지. 남들이 얼마나 깔보겠어. 선생이나 돼서 이혼이나 한다는 게. 그러고보면 나 참 바보 같았어. 그런 와중에 네가 소위 말하는 SKY대학교마저 못 들어가게 되니까 난 너무나 창피해서 동창회조차도 안 나갔어. 남들 앞에서 내세울 것조차도 없어졌거든. 난 내 모든 것을 내 자식들에게 전부 걸었어. 내 목표는 내가 낳은 다섯 딸이 어디 가서도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내로라하는 능력있는 사위들이 줄을 서게끔 말이야. 절대 어디 가서 불쌍한 몰골로는 보이지 마라. 그리고 나 불쌍한 사람이야. 너 나한테 잘해야 돼. 난 내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여자야. 너희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온 나를 실망하게 하는 행동 같은 거 해서는 안 돼.


강 여사가 퍼붓던 저 말을 떠올리면 난 ‘세상의 모든 엄마는 만고불변의 드라마’라고 했던 어느 소설의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면 강 여사는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자식 때문에 이 지경까지 내몰린 자신의 삶을 무기처럼 내세우며 나를 공격했다. 나는 강 여사의 유일한 감정 쓰레기통이었고, 강 여사는 가부장제 질서로 이루어진 집안에서 속절없이 희생당한 여자였다. 강 여사의 피해 의식은 자식을 향한 거대한 보상심리로 이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나는 지독한 사춘기를 앓았다. 강 여사에 대한 나의 증오감은 내가 대학생이 되고 집을 떠나면서 차츰 사라지게 된다. 최근에 나는 강 여사에게 물었다. 다섯을 키우기에는 경제적 상황도 빠듯했으면서 왜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으며,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죄밖에 없는 우리에게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퍼부었냐고. 강 여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난 이 집안에서 아들을 낳으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줄 알았어.


무엇이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감정적으로 분노하기보다는, ‘무엇이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했다. 이것이 내 나름의 ‘거리 두기’였다. 초중고 시절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똑똑한 우등생이었고, 그 옛날 악명높은 경쟁률을 뚫고 교원대학교 간호학과 장학생으로 진학했고, 대학 표지 모델을 장식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추었던 저 여자를, 남들은 몇십 년을 수학(修學)해서 겨우 얻는 교직 시험도 한 번에 통과한 저 여자를 누가 저 지경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정말 저 여자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결혼 전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자 철없는 사고뭉치 남동생을 뒷바라지 하다가, 결혼 후에는 당신의 남동생만큼이나 곱게 자란 3대 독자 남편의 사업 대출 자금을 자신의 35년 교사 생활의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퇴직 연금마저 저당 잡히면서 빚만 죽어라 열심히 갚아야 하는 강 여사의 삶에 대해. 난 강 여사에게 당신의 피해의식과 자식들에 대한 보상심리, 타인의 이목을 과하게 신경 쓰는 심각한 체면치레에 대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후 강 여사는 나를 “저 년 앞에서는 무슨 말도 못 하는 싸가지 없고 지랄 맞은 큰딸년”이라 불렀다. (난 이 호칭이 마음에 든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였을 것이다. 난 강 여사와 비슷한 삶을 사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왜 똑똑한 여자들이 결혼 후에는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왜 그 능력을 집안의 하나뿐인 독자(獨子)라는 이유만으로 무능한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에 써야 하는지에 대해. 그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음에도 왜 자신의 삶마저 포기한 채 기를 쓰고 그들 집안의 대를 잇는 일에 치중하는지에 대해.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족 로맨스 성장서사를 연구하고 싶었다. 나의 성장 배경을 본다면 페미니즘적인 사유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를 포함한 강 여사가 낳은 다섯 명의 영리한 딸들은 세 가지의 생존 법칙을 만들게 된다. 첫 번째,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턱대고 다산(多産)하지 말 것. 두 번째, 이혼을 몇 번이고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남의 이목이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나부터 살고 볼 것. 나의 행복을 우선으로 할 것. 세 번째, 아무리 내가 처한 환경이 지옥 같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대책 없이 도피하지 말 것. 우리도 강 여사의 거대한 보상심리에 대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강 여사가 ‘내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 너희들을 향한 희생 때문이다’라는 기구한 당신의 삶으로 우리를 공격 할 때면, 참다못한 우리들도 당신의 병적인 피해 의식과 기이한 보상심리를 지적하는 방법으로 방어를 했다.


그리하여 강 여사가 낳은 다섯 명의 딸은, 강여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낳았지만 성질머리 하난 지랄 맞고 대가 센 년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성질머리 하난 지랄 맞고 대가 센 여자들’이 되어버린 강 여사의 다섯 후예는, 애초부터 결혼에 대한 낭만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부모와 남자의 도움 없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여자의 삶을 스스로 터득했다. 자, 지금까지가 82년생 김지영에 버금가는 여느 평범한 54년생 강 여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가부장적 질서에게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그러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그 질서에 일정 부분 동화되어버린 그때 그 시절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불어 나와 나를 낳은 여자의 삶에 대한 하드코어 달콤살벌 만고불변의 드라마로 이루어진 가족사가 되겠다.



올해 초였다. 난 ‘페미니즘과 여성시, 문단 미투’라는 주제로 가장 아픈 글 하나를 썼다. 「그 이후의 시간을 이어나갈 그녀들의 언어」라는 글에, 내가 직접 경험한 사건 하나를 고백했다. 예전, “강의하려면 교수와 탁.탁.탁을 해야 하는 여자 대학원생, 좆도 아닌 년, 레밍도 모르는 병신같은 년, 냄비, 술도 못 따르는 씨발년, 나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는 씨발년”으로 불렸던 예전의 나에 대한 이야기3). 일종의 작은 문단 미투라고 볼 수 있겠다. 10년 전, 시인이자 애인이었던 P는 나에게 저런 폭언을 쏟아부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난 이 글이 발표되고 난 후 농약을 검색했다. 혹시 이 글로 인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상황이 닥친다면, 마시고 죽어버리라 다짐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문인이 내가 쓴 글을 읽었다. 그들은 나의 고백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며 내 편이 되어주었다. 재미있던 건, 내가 P라는 이니셜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문인들은 P가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P의 청소년 시집은 판매중지되었고, P는 자신이 일하던 문학관에 스스로 사표까지 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문단이라는 특수한 세계에서 이와 같은 고백은 당연히 용기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여자인 너에게 큰 불편과 손해, 자칫 논란의 중심에 설 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 않으냐고. 그런데도 이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이냐고. 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 정말, 살고 싶어서 썼어요.



『82년생 김지영』이나 『다른 사람』을 포함해 최근 한국 여성 서사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성의 결여라는 도식적 평가에, “젠더 위계로 고통받는 비참한 현실에 응답하고자 하는 절박함을 새로운 지분으로 요청할 권리4)”를 묻는 조연정의 질문에 공감한다. 조남주는 어느 글에서 자신이 『82년생 김지영』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 한글 문서에 소설의 첫 문장을 적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추석 연휴 직전이었다. 결혼한 후로 명절을 앞두고는 알 수 없는 우울감, 좌절감에 휩싸이곤 했는데 그 해에도 그랬다. 결혼하고 첫 명절, 차례를 지낸 후 남자들은 따뜻한 안방에서 밥을 먹고, 그 음식을 차린 여자들은 난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마루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때의 충격과 자괴감은 잊을 수 없다. (중략)

관련 기사들을 스크랩하고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더 먼저였다. 2015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칼럼이 나왔고, 여성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웹툰, 방송, 노래 가사들이 쏟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는데 무엇이, 왜 문제인지조차 몰랐던 것 같다. 제대로 알고 싶었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조남주, 「딸, 엄마, 페미니스트」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유숙열 외 25인, 이프북스, 2017) 114쪽 중에서


세대와 계급,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세상 모든 그녀들의 공감은 이 ‘간절함’에서 비롯한 게 아니었을까. 이전과는 다른 삶, 그것도 이전보다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끔찍한 상황들을 쓰거나 말해야 하는 간절함 말이다. 최근의 여성 서사를 미학적 가공이 결여된 정치적으로만 올바른 소설이라고 평가하거나, 혹은 정치적 올바름이 문학을 질식시킨다는 논란에서, 그러한 평가나 논란이라도 발생해야만 그제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녀들의 존재감을 본다. 그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녀들의 용기와 희생, 고통을 동반하는 증언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녀들의 비극은 불합리한 질서로 이루어진 환경에 동화되지 않거나 그 질서를 거부하기에 발생한다. 그 세계가 부당하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들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몰고 가는 자들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신들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몰고 가는 자들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유행 현상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미 ‘각성한 독자’들의 실망보다는, 여성 혐오적 현실에 관해서든, 문학과 삶의 관계에 관해서든, 무언가를 새롭게 ‘각성한 독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의미 있는 지점으로 논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여전히 하게 된다.5)”라는 조연정의 말에서 ‘각성된 독자’란 ‘내 안의 미친女’를 한 번쯤 깨워 본 자들일 것이다. 자신의 비극을 실감한 자들. 지금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반드시 쓰거나 말해야 한다는 간절함을 실감한 자들.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는데 무엇이, 왜 문제인지 모르고 있다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누군가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된 자들일 것이다.



난 여성의 복수를 소재로 한 영화의 다음과 같은 장면들을 좋아한다. 자신을 억울하게 감옥에 보낸 백 선생을 개처럼 목줄로 묶고 끌고 다니다 머리통을 총으로 산산조각 내는 꿈을 꾸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참다못한 복남이가 낫을 들고 섬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난도질하는 장면. 세상 모든 그녀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마무시한 미친女라는 존재가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 나의 분노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아는 순간, 내가 겪은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 또한 내 안의 미친女가 깨어났다. 앞으로의 문단 생활이 평탄하지 않더라도, 정말 농약이라도 마시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그 글을 꼭 써야만 했다.


나의 글을 시작으로 P에 대한 또 다른 증언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동료 문인들로부터 몇 년 전 갓 등단한 어린 여성 작가를 보며 “물 좋네.”라고 했던 P의 무례한 언행을 들었다. 그 순간, 문득 소싯적의 추억이랍시고 19인치 허리사이즈를 가진 여자와 성매매한 무용담을 늘어놓던 P가 떠올랐다. 간절히 바라건대, 난 그런 무례한 족속들을 포함한 문단 내 언어·성·위계폭력 가해자들이 문단이라는 세계에서 평생 복귀 불가능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게 잘못인지 몰랐습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시기는 개인적인 일로 정신 상태가 안 좋았던 시기였습니다.”와 같은 변명 같지도 않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영영 먼지가 되어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난 이 세상의 모든 그녀들이, 이 글을 읽고 자기 안의 미친女를 깨웠으면 한다. 나 또한 그녀들의 글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일들을 떠올렸고, 그 경험을 주석처럼 이어나갔다. 나의 가족사와 내가 겪은 사건들을 직접 고백하는 것만큼 강력한 진실은 없다고 생각한다. 혹 내 이야기가 미학적인 결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미학적 결함이나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 이전에, 독자는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그녀들의 ‘간절함’에 공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그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는 방법을 안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되 그것으로 남들을 괴롭히지 않는 법6)”을 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내 안의 미친女를 깨워라. 우리에겐 금자 씨의 권총보다, 복남이의 서슬 퍼런 낫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는 무기가 있다. 이 구역의 미친女들이 세상을 바꾼다. 복수는 지금부터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이제 젠더 위계로 고통받는 비참한 현실에 응답하고자 했던 우리의 절박함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그들이 불편해하고 두려워해야 할 차례다.




1) 조연정,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문학은 위험하다』, 민음사, 2019, 393p.

2) 소영현,「서문:문학은 위험하다」, 『문학은 위험하다』, 위의 책, 7p.

3) 전영규, 「그 이후의 시를 이어나갈 그녀들의 언어: 이소호, 이소연, 주민현의 시」, 『문학에스프리』, 2019년 봄호

4) 조연정, 앞의 글, 404p.

5) 조연정, 위의 글, 395-396p.

6)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창비, 2017, 28p.




필자 소개



전영규.

문학평론가.

가장 낮은 곳에서 읽고 쓰되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상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합니다.

나를 포함한 지구인들이 인간답게 멸종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합니다.



조회 224회

©2019 by akaive of memorandum : Cha Hyun Jee.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