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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13 필경사는 죽고 저항은 계속된다

#위험한_리뷰 13


강지희 X 차현지


필경사는 죽고 저항은 계속된다



강지희 수록 텍스트


「2000년대 여성소설 비평의 신성화와 세속화」

「광장에서 폭발하는 지성과 명랑」




"우리가 아이를 낳을 때 그들은 책과 그림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지.

우리는 세상에 사람을 퍼뜨리고, 남자들은 세상을 문명화한 거야.

하지만 이제 우리도 글을 읽을 줄 아니까, 우리가 그 결과를 평가해보는 게 어때?"

-버지니아 울프, 「어떤 연구회」




나의 십대 후반을 돌이켜보건대,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의 개국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드들을, 그것도 당대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반할만한 쇼를 리모컨만 돌리면,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 그 자체였다. 할리우드 비하인드 뉴스나 저질스러운 리얼리티 쇼도 나의 말초신경계를 무척이나 자극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내가 손꼽아 반복 시청했던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Sex And The City>였다. 지금도 여섯 개의 시즌, 모든 에피소드를 (아마도) 전부 기억할 정도로, 내게는 그 시절 거의 바이블과 같은 쇼였다. 물론 십대 시절이었기에, 부모와 함께 사는 고등학생 자녀가 거실에 놓인 TV로 적나라한 성관계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쇼를 보고 또 보았다.

이십대가 되고 난 후에도 나의 ‘사대주의적 시티 우먼 뽕’은 여전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쇼퍼홀릭>, 클래식이 된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이 대거 개봉했고, 나는 그들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뉴욕, 런던과 같은 이름만 들어도 웅장한 도시에 사는 그녀들은 때로 마놀로 블라닉 한 켤레 때문에 렌트비를 못 내기도 하고, 꿈속에 나올 것 같은 남자의 등장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어 원나잇에 도전을 한다. 얼마나 멋진가! 일단은 그 엄청난 대도시에서 혼자 자취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가끔 월세를 밀리고 카드빚에 허덕여 파산 직전이 되어도 가압류 당할 만한 명품 재산이 있다는 것도, 비록 어정쩡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어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눈밭을 달려오는 마크 다아시 같은 어마무시한 남자도 있으니, 이건 정말 최고 아닌가. 그렇다. 나는 그 최고되는 지점에서 언제나 그녀들을 동경했고,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나의 사랑은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와르륵 무너지고 말았다. 나의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계속 주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게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나?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쇼퍼홀릭>을 읽으면서 거룩하기 그지없는 문학적 숭고함에 고취될 수는 없다. 그건 나도 인정.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을 단박에 박살내야 한다? 그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문학을 '칙릿chicklit'이라 명명했고, 나는 그때 '칙릿'이라는 단어에 다소 비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들이 핸드백에 넣어 들고 다니기 좋은 책. 칙릿’은 chick literature의 줄임말이지만, 그 함의를 번역하자면 이런 뜻이다. 이것도 지금 찾은 게 아니다. 하도 '칙릿'을 문학 작품으로 여기지 않는 당시 교실의 분위기가 답답하여 찾아본 것. 아니, 여자의 핸드백에 들어가는 책이 무엇이든 그것을 다 '칙릿'으로 부른다면, 지금 내 작은 에코백에 담겨 있는 책들은 뭐라고 규정할 것인가. 에코백과 핸드백은 다르다. 맞다. 나는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그 말인즉 '칙릿'은 적어도 웰 드레스드 업을 한 여성들이 읽을 만한 책이라는 것. 옷을 잘 입는 여성이 읽는 책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 읽는 책의 범주가 다르다는 것인가. 그렇게 경계를 나누게 된 기준도 불분명한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일이 드문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은 '칙릿'의 범주 바깥에 있는 책인가?

어디서나 쉽고 간편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볼륨감과 간명한 스토리가 담겨 있는 20-30대 여성을 위한 책. 그런 것이 '칙릿'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마지 않던 대도시 여성들의 정념과 욕망의 스토리는 죄다 '칙릿'의 범주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을 배우는 이십대 여성이었던 내가 무조건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소설들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망가진 인간의 속물성을 보여주는 천박한 책이라고 했다. '칙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독만 가득해지니 결코 읽어서는 안 된다고, 정말이지 '결코'를 붙여가며 어깃장을 놓으신 덕택에, 나는 내가 사랑하던 그 책들과 잠정적 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얼마 전,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술을 마시던 중에 후배 하나가 10년도 더 된 일화를 말해주었다. 자신이 소설을 쓰면 항상 먼저 보여주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루는 "너는 왜 맨날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써? 여자는 언제 주인공을 해?"라고 물어봤다. 후배는 당황해서 "아, 그냥 나는 보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답했고, 그 친구는 "그럼 여자의 이야기는 보편이 아니야?"라고 반문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일화를 들으면서 꽤나 씁쓸해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경험이 한 번씩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 여성성이 완벽하게 거세된 소설만을 기계적으로 쓰던 시절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특성이 완전히 소거된 인물만을 그려야 한다고 설파하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였고, 그는 매우 보편적인 것을 통해서나 인간의 근원적 속성이라는 걸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대를 나왔다. 그리고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전부 여학생이었다. 여학생들은 당연하단 듯 보편적인 인간을 그리기 위해 여자도, 남자도 아닌, K나 H 같은 이니셜로 된 캐릭터를 구현했다. 그 캐릭터들의 젠더적 속성은 아무래도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에 더 가까웠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함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아리아나 그란데, 빌리 아일리쉬와 같은 저명한 팝스타들이 'GOD'을 'Her'라고 지칭하는 2019년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때는 2000년대 중반이었고, '무성'의 캐릭터들이 목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 생물학적 여성성을 무화한 작업을 지속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의 말을 거스르려고 쓴 단편으로 데뷔를 했다. 단편의 주인공은 여고생이었다. 그가 그리도 쓰지 말라던 히스테릭한 여성 캐릭터. 그 후, 내가 배워온 것과, 세상과 마주하는 내 글쓰기는 너무 달랐다. 스물다섯이던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다. 스물다섯 여성에게 주어지는 불공평함과 피로감이 있었고,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꽤 많이 겪었다. 교실에서 배운 소설은 그런 나와는 너무나도 먼, 내 생활과 지경의 고충에서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 '보편'의 서사였다.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어 도망쳤다. 그래서일까. 나는 데뷔 10년차를 앞둔 중고 신인이다.

그때 이후로, 여성을 초점 화자로 하는 서사를 쓸 때 많은 부분을 검열해왔다. 그 검열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서야 나는 소설을 쓰는 데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쓰는 소설은 대도시에 혼자 사는 여자(서울 살이의 자취를 경험했던 나)의 서사가 태반이고, 그 여자가 겪는 우여곡절의 연애 대소동, 또는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며 분투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칙릿'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십대 후반에 보던 미드의 영향력에서 그다지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대 여성이 사는 삶이고, 겪어내야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것을 '칙릿'이라 규정하고, 그것은 진정한 문학이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들, 경시적인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던 사람들은 지금의 문학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여성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만 문학성의 경중을 가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 든다.

아, 앞서 등장했던 그 누군가는 당연히 생물학적 남성이었다.

그에게 '여성'은 언제나 특수한 성정을 지닌 존재로 비쳤을 터.

지난해 그가 가르치던 대학의 학생이 그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고, 그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폭로 학생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피해자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그와 학교를 상대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필자 소개




차현지

소설가. SRS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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