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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11 75년생 김지연


#위험한_리뷰 11


김미정 X 김이설


75년생 김지연



김미정 수록 텍스트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김지연 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다섯 살이다. 15년 전 결혼해 2005년과 2008년에 딸을 낳았다. 동갑인 남편과 열다섯 살, 열두 살인 두 딸과 함께 5년 전에 행정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의 강변 남쪽에 위치한 아파트에 거주한다. 남편은 옆 도시의 산업단지에 직장이 있고, 김지연 씨는 2006년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소설 쓰는 사람이 되었다. 10년의 습작기를 거치고서야 신문사로부터 받은 당선 소식은 첫아이를 출산한 지 딱 열흘 뒤의 일이었다. 남편은 김지연 씨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는지는 알았으나 소설가가 꿈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임신한 몸으로도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알라딘 서재 활동이나 블로그를 꾸리느라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시댁은 대구고 친정은 서울인데, 두 아이를 낳고 10년간 살았던 곳은 청주였던데다가, 자택 근무자이기도 했던 김지연 씨는 두 아이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양쪽 집안의 첫 손주여서 첫아이는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김지연 씨에게 첫아이는 그저 늘 거대한 숙제였다. 육아서와 양가 어른들의 지침, 소문으로 얻은 정보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몸과 정신을 가루가 되도록 갈아 넣는 일이었다. 일례를 들자면 WHO 권장 운운하며 모유를 2년 동안 먹였고, 돌까지 천기저귀를 사용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은 소설가로 살아남는 일이었다. 김지연 씨는 그 해 두 군데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당선작 중 하나는 모녀 노숙자를 다룬 「열세 살」이었고, 다른 한 편은 대리모를 소재로 한 「엄마들」이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되면 그해 봄, 월간지 《현대문학》에 차기작을 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생애 첫 청탁이자, 생애 가장 무서운 청탁이었다고 김지연 씨는 회상한다. 사실 그 지면이 진검승부의 장이라고 생각했다. 진검승부란 곧 현장의 평론가들에게 자기 소설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이자, 어떻게든 눈에 들도록 써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래야 다시 청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쓴 소설은 친모에게 버림받고 고속도로 갓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를 아빠라 부르며 그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소녀이야기로, 제목은 무려 「순애보」였다. 세상에, 김지연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득해지곤 한다.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되어 고개도 못 가누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가며, 두 시간 이상 통잠을 자본 적 없이 그 (잔인무도하고 끔찍한)단편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분명 악에 받쳤거나 독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일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못 키운다는 말을 듣기 싫었고, 아이를 핑계로 소설이 별로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했고, 훌륭한 소설가도 되고 싶었다.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하고 밝게 자라면 좋은 엄마라는 말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조건에 대해 김지연 씨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쓰고 있는 상태의 소설가가 성공한 소설가라고 믿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청탁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이 책 계약을 해야 했고, 끊임없이 문학상 후보에 올라야 했고, 끊임없이 평론가들의 글에 어떻게든 거론이 되어야 했다.



김지연 씨의 이상 증세가 처음 감지된 날은 2019년 8월 9일이었다. 김지연 씨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전 날이 비평집 <#문학은_위험하다>의 첫 번째 ‘#위험한_북토크’에 다녀온 날이었기 때문이다. 귀가 시간에 쫓겨 행사를 끝까지 경청할 수 없었던데다 수면시간도 부족해 피로가 겹친 상태로 초고 출력본을 들고 카페로 나온 참이었다. 450매짜리 경장편이었는데 첫 장부터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았다. 첫 부분에 소개되는 소설 속 연인 때문이었다. 이들이 ‘여-남’, 이성으로 짝지어진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 의심 없이, 어떤 거리낌 없이 써오던 설정에 갑자기 의문이 든 것이다. 그동안 소설을 쓰면서, 습작기까지 포함한다면 20년이 넘도록 한번도 의식해보지 못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여 커플로 만들어도 되는 걸까?’, 혹은 ‘남-남 커플로 설정해도 될까?’가 아니라 ‘연인인데 여-남 커플로 그려도 되는 걸까?’라는 의문. 김지연 씨가 궁금한 지점은 ‘된다/안 된다’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퀴어 소설이나 퀴어 프렌들리한 소설을 자주 접해서? 아니면 김지연 씨 스스로의 사고가 유연해져서? 독자들의 욕망을 파악해서? 그도 아니라면, 혹시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아닐까? 라는 의심.

고민은 다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 눈치는 누가 주는가? 만약 눈치가 보인다면, 눈치를 보는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독자? 동료 소설가? 평론가? 아니면 김이설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쓰는 김지연 씨? 김지연이라는 이름을 가린 채 소설을 쓰는 김이설 씨? 그도 아니면 세계?! 세계라고 명명된 다수? 문학의 본령으로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존재들? 정치적 올바름? 아니면 문학적 올바름?

김지연 씨는 결국 소설의 연인을 ‘여-여’로 바꾸었다. 몇몇 문장과 몇몇 설정에 손을 대니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구성했던 것처럼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사실 연인은 연인인 것이 중요했지 성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지연 씨는 그때만 해도 퇴고를 마치는 데에만 급급해 더 이상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마쳐야 할 숙제를 지금 당장은 깊숙한 서랍에 숨겨놓고 눈에만 안 띄게 하는 일과 같았다.

서랍 깊숙이에 숨겨두고 미뤄두었던 고민을 다시 대면해야 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위험한_북토크’에 찾아갔던 계기로 『#문학은_위험하다』에 수록된 김미정 평론가의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이라는 글의 리뷰를 청탁 받는다. 리뷰 원고를 청탁받는 계기도 흔치 않았던 데다가 비평글에 대한 리뷰라고 해서 김지연 씨는 바짝 긴장한다. 언제나 평론가의 비평에 자신의 소설이 거론되기를 희망했을 뿐, 비평글 자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글쓰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김지연 씨는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수첩과 연필, 지우개를 준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어느 문장 하나 허투루 읽을 수 없어 본문 가득 연필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수첩엔 리뷰에 쓸 만한 메모가 아니라 김지연 씨가 하는 근래의 생각이나 고민, 걱정들이 두서없이 나열되고 있었다. “마감 연장 부탁 메일 보내기(월요일까지), 나의 세계는 구축되지 못한 것 같고 나조차도 내 목소리를 모르겠는데 자꾸 발언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림, 이 길이 과연 정말 나의 길일까” 같은 문장들이 적혔다. 와중에 군데군데 “대청소, 혈압약 받아오기, 산부인과 예약, 미용실 다녀오기, 아이들 운동화 구매.” 같은 일상적 메모도 적혀 있었다. 전자는 김이설의 카테고리에, 후자는 김지연의 카테고리에 묶일 내용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안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지연 씨는 사고의 흐름에 따라 계속 적기로 했다. 쓰기가 막막할 때는 문장을 열거하다보면 실마리가 보이거나 첫 문장이 번뜩 떠오르곤 하니까. 서너 페이지를 꽉 채운 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던 김지연 씨는 한 문단에서 덜컥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 우호적인 것에 대한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쓰고 싶은 걸 써야 할까, 그들이 반길 것을 써야 할까, 내가 즐겁게 쓸 수 있는 것을 써야 할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써야 하나, 써야만 하는 것을 써야 하나.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써야 옳은가, 계속 말해 나갈 것을 쓰는 것이 옳은가. 다수가 인정하는 것을 쓰는 것이 옳은가, 내가 믿는 걸 쓰는 것이 옳은 것일까. 옳은 것을 써야 옳은 것인가, 옳지 못하다고 여긴 것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들’이나 ‘다수’가 독자인지 평론가인지 정작 소설을 쓰는 김지연 씨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혼잣말처럼 이어진 문장들을 따라 읽다보니, 김지연 씨는 그동안 자기가 써온 소설에 대해서,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저 빨리 써야 할 리뷰가 잘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만 확고해졌다. 왜냐하면 김지연 씨는 평론가가 쓰는 비평이란 소설을 호명하고, 안내하며, 나아가 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탓이다. 소설가에게 평론가는 자기가 쓴 소설을 품평하는 사람이었다. 평론가는 시인이나 극작가처럼 다른 장르의 동료 작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 평론가가 쓴 글을 소설가가 ‘다시’, ‘보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솔직히 말하면 문학장의 권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자신도 없었다. 그것이 지금 김지연 씨의 고충이자 당장의 곤경이었다.



2019년 8월 9일의 이상한 조짐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김지연 씨는 그제야 비로소 창작자의 욕망에 대해서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욕망과 타자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어색함이나 불편함, 나아가 평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까지. 김지연이 쓴 김이설의 소설을, 김이설이 아닌 김지연이 읽으면서 겪은 불협화음에 대해서. 그것이 지금껏 믿어왔던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하는 소설”이라는 명제를 “누가 질문하도록 썼는가”하는 질문에서부터 다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고 여기게 된 이유인 것이다.




필자 소개



김이설

본명 김지연. 소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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