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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10 자꾸 걸려 넘어지는 곳



#위험한_리뷰 10


차미령 X 연


자꾸 걸려 넘어지는 곳



차미령 수록 텍스트

「너머의 퀴어」




어린 시절, 읽고 쓰기의 꿈나무였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도서관에서 ‘음습한’ 주제의 책을 몰래 검색해본 경험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그 음습한 주제 중 하나가 퀴어였다. 당시에 퀴어라는 ‘고급진’ 표현을 알지 못했던 나는 닥치는 대로 동성애/동성애자/동성연애/게이/레즈비언 따위를 입력해보았는데, 당연히 접할 수 있는 책은 무척 드물었고 그나마도 혐오서적이 아니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매체가 다양화됐지만 특별히 만족할만한 결과는 찾지 못한 채 세기가 바뀌더니 이렇게 2010년대가 되었다.

오랜 시간 비규범적 성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는 서사의 감초 역할‘만’을 해왔다. 주인공의 친구, 주요 화자의 입을 통해 ‘카더라’로 전해지는 인물, 혹은 반전의 요소로 역할 지어졌다. 성소수자 캐릭터가 소설의 주연으로 등장한 작품은 적을 뿐더러 (없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소설적으로 잘 구현된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어쩌면 별것 아닌 이 경험은 나에게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첫째, 성소수자인 나는 읽을거리가 없다(어릴 때의 생각이다). 둘째, 성소수자인 나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재현될 가치가 없다(이건 조금 더 큰 다음의 생각이다).

내가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퀴어문학’으로 불리는 일군의 문학작품이 등장했을 때 열광했던 이유는 성소수자가 타인에 의해 재현될 만한 혹은 재현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삶이 고립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쓰이고 읽힐 수도 있다는 점이 무척 새로웠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을 문학적 시민권 획득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퀴어문학에 대한 지리멸렬한 걱정, 즉, ‘퀴어만 퀴어문학을 쓰는’ 퀴어문학의 당사자중심주의에 대한 걱정은 퀴어문학을 읽는 독자들이 느꼈을지도 모르는 (나는 분명히 느낀) 시민권을 얻는 감각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사건인 것 같다.



차미령의 글은 2010년대 퀴어문학의 주요한 소재들을 일별하고 있는 듯하다. 퀴어문학이 다뤄온 대(對) 기독교 문제, 그리고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중심의 서사를 중심축에 둔 차미령의 분석은 2010년대 초의 퀴어문학을 역사로 정립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러한 작업의 토대 위에서 앞으로 퀴어문학은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학제적 통사가 되어 갈 것이다.

다만 이 논의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축이 ‘너머’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생각해보건대 ‘너머’와 ‘경계를 가로지르는’을 빼놓고는 거의 퀴어문학을 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제는 완전히 비평의 언어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용어들은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문학으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든 보편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읽히고 더 쓰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퀴어문학이 이러한 용어 덕분에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물론 퀴어문학 중 일부는 여타의 문학 일부가 그러하듯 미래의 어떤 징후들을 포착하고 사회나 언어가 갈라놓은 경계를 바삐 움직이며 그 규범을 교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어쩐지 의아함이 든다. 이렇게 쉽게 ‘넘어’가도 되는 걸까? 이를테면 퀴어라는 고급진 단어와 성소수자를 지속해서 분리하는 방식으로 독해할 때의 위험은 없는 걸까?



퀴어문학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문학작품이 문단 안에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논의 된 것은 고작 2-3년 안팎의 일이다.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소수자의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는 말은 성소수자는 소수이며 그 밖에 다수의 세상, 좀 더 재현할만한 세상이 있다는 생각과 긴밀하게 공조한다. ‘퀴어함’마저 보편의 언어에 포섭되는 과정은 이처럼 부드럽고 매끈하다.

그렇기에 퀴어문학에서 당사자성을 경계할 때야말로, 당사자성이 퀴어문학에서 그토록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사실 텍스트를 둘러싼 당사자성은 흔히 논의되듯 작가의 커밍아웃과 자기 어필의 문제만은 아니다. 당사자성을 향한 호응은 오히려 독자로부터 온 것이다. 작가의 정체성을 중요시하게 된 데에는 그간의 문학이 퀴어를 대상화해 온 긴 역사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모르니까 쓰지 않겠다’라든가 ‘재미있는 소재니까 써보겠다’와 같은, 퀴어를 타자화한 재현에 관한 암묵적 동의의 역사가 그 주역인 셈이다. 그러므로 당사자성에 대한 열광이 독자가 가진 일종의 보호 장치로 먼저 작동되었음을 지적하지 않고 당사자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다음으로 더 논의 되어야 하는 것은 당사자성의 인정투쟁 문제일 텐데 이것을 시스템 혹은 타자에 의해 시민으로 인정받는 통과의례로 설명하는 좋은 글들은 무척 많기에, 나는 다만 다시 당사자 주체의 자리에서 ‘간신히 되찾은 나를 호명하는 언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고군분투하는 마음’만을 적고 넘어가려한다. 어쨌거나 문학이 사람에 대한 것이라면 이런 마음들을 폐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머’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퀴어문학을 퀴어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성정체성을 떼어놓는 것은 다소 손쉬운 해결책인 듯하다. 오히려 퀴어문학을 퀴어하게 보기 위해서 더더욱 고집스럽게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글이 등장하면 어떨까. 요즘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개념은 ‘재정체화’이다. 퀴어가 여러 매체를 통해 드러나면서 이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성정체성과 성별정체성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의 전환이 불러온 결과물은 분명히 다양한 시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미래를 문학은 어떻게 기대/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퀴어한 인물이 아니라 퀴어하게 되어가는 인물은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까?

(퀴어 서사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냥 쓰고 말았는데) 내가 아는 A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A는 남성과 결혼했고 자녀가 있는 여성이었는데, 결혼을 한지 15년이 지난 다음 재정체화를 통해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정의했다. 이혼 후 그녀는 자신의 여성파트너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대안가족이라 할 만한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당연히도 불화와 희로애락이 있는 이 가족을 이야기할 때, A가 ‘레즈비언으로 재정체화’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채 대안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것은 정당할까. 오히려 A의 재정체화를 짚어냈을 때 이 이야기는 대안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예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컨대 (특수한)정체성과 (보편으로서의)퀴어함의 거리가 아주 멀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퀴어문학의 카테고리는 앞으로 충분히 더 넓어질 것이다.



얼마 전 내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 퀴어문학 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에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무지개책갈피’는 성소수자 정체성을 근간으로 퀴어문학 DB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정체성의 대형전시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러니 마치 드래곤볼을 모으듯이 DB가 5000개쯤 되면 홈페이지를 폭파하자고. 그것이야말로 ‘활동’이 아니겠냐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당사자성은 깊이 박힌 돌부리 같아서 퀴어문학을 사랑하는 당사자들, 활동가들조차 시험에 들게 하고 자꾸만 걸려 넘어지게 한다. 갈팡질팡하게 한다. 그러니 부디 매끈하게 넘어가지 말고 함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주시길. 이쪽과 저쪽의 ‘너머’를 오가며 더 많은 이야기와 논의를 해주시길. 언제나 감사하고 또 바라며, 부족하지만 마음을 더한다.

그건 그런데, 내가 죽기 전에 ‘무지개책갈피’ 홈페이지를 폭파할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지도. 그리고 그때쯤에 나는 ‘무지개책갈피’ 내에 보수 세력이 되어 DB보호 운동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그러고 있을지도 몰라 조금 불안하다.





필자 소개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신입 편집자.

지치지 않고 계속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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