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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1 페미니즘 - 비평이라는 태도

2019년 8월 21일 업데이트됨

#위험한_리뷰 1


소영현 X 선우은실


페미니즘 - 비평이라는 태도


소영현 수록 텍스트


「비평 시대의 젠더적 기원과 그 불만」

「페미니즘이라는 문학」




태도


지금은 2시 34분입니다. 저는 늦게 깨어있는 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이 글을 시작하지 못하다가 이러다가는 정말로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시간에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어쩌면 고민은 밤늦은 시간에 가장 깊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자신의 컨디션이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은 구구절절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의 컨디션이 요즘 고민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나날이 느낍니다. 그 문제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나를 넘어서는 넓은 차원의 것입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또는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깨닫게 되)는 남성성/여성성에 대해 더 기민하게 생각하게 된다든지, 나의 이러한 발상이 옳은지 그른지 또는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문제라면 어떤 방식으로 나(의 사고방식)를 이해하고 부분적으로 수정해나가야 하는지와 같은 것입니다. 요컨대 저는 이것을 태도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말하기의 방식


저는 『#문학은_위험하다』의 소영현 평론가의 글에 대한 리뷰를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소영현의 글에서 제가 최근 고민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들에 말을 거는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이와 같은 글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백체를 쓴다고 고백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진실된 태도를 요청하게 되는 것은 같습니다.

‘리뷰’라는 글 형식은 최근 곰곰 생각 중인 문제 중 하나입니다(구체적인 고민의 결과물은 8월부터 웹진 〈비유〉의 ‘하다’ 코너에서 본격적으로 보시게 될 겁니다). 저는 리뷰를 요청받았습니다만 리뷰가 1차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여 부차적인 위치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리뷰는 정말로 ‘중심’에 대한 보조적이고 추가적인 논의이기만 할까요? 그것은 담론을 무엇이라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담론이란 단일하고 커다란 무엇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논의와 질문의 과정 전체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한 주제에 대한 (비)동의와 이견(異見), 지금 너머의 문제 상황에 대한 고려와 질문입니다. 또한 조금씩 다른 입장과 태도 그리고 수용과 이해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며, 때로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사안에 대해 그 거리 때문에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도 각자의 위치를 견지하며 그 주제를 가지고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나와 당신의 공존을 위한 삶의 원리가 될 수도, 어떤 주제에 대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담론’에의 이해를 바탕으로, ‘리뷰’라는 또 다른 의견의 제시를 1차 텍스트와 마찬가지의 무게를 지닌 것이자 수평적 위치에 놓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요?

저는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계속해서 이야기를 바깥으로 뻗어 나가도록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프로젝트에 대한 위의 해석을 전제로 쓰였습니다. 이 전제가 얼마간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할 때, 저는 제 최근의 작업과 이 프로젝트가 어떠한 포인트를 공유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거쳐 저는 소영현의 글 위에 저의 고민들을 겹쳐보려 합니다.



죽느니 죽이는 게 낫지 않나, 그렇지만


「비평 시대의 젠더적 기원과 그 불만」은 재현과 노동의 관점이 두드러지는, 제게는 최근 발견된 저의 상태와 밀접하게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소영현은 문학이 어떠한 폭력성을 재현하는 것 그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낀다기 보다 “그 재현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가”(32)를 묻습니다. 저는 몇 달 전 제게 일어났던 한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여성 문학 특집’이 실린 90년대 문학 잡지를 읽은 날이었습니다. 한 소설을 읽었는데 어촌에 사는 여성이 남편에게 맞아 죽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단숨에 읽지 못했습니다. 그 짧은 소설을 읽는 데 자주 기운이 빠졌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이전에는 좀처럼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컨디션이 좀 나쁜가 생각하는 동시에 당황했습니다. 그러고는 짜증과 화가 불쑥 치솟았습니다. 왜 이렇게 사실적으로 썼지, 맞아 죽는다고? 맞아 죽느니 죽이는 게 낫지 않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저는 저의 밑바닥을 마주한 것 같았습니다. 죽느니 죽이자고 생각하는 게 과연 맞는가. 아니라면 저 여자를 맞아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가 죽이는 상상력으로 괜찮은가?1)

문제의 핵심인 ‘재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단순히 폭력을 묘사하는 소설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장면이 구체적으로 현시화 될 필요가 있다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 역시 작품 어딘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적 현실이 ‘실제(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재현’의 응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 ‘사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 모두가 같은 응답을 하거나 그것을 수용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재현 방식에 관해 얼마나 치밀하게 고민했는가 하는 물음은 엄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꼭 폭력의 재현에만 적용되는 의문이 아닙니다. 소위 ‘페미니즘 소설’―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확답은 여기에서 차치하더라도―에서 여성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살피고 있는지를 따져볼 때, 단지 소재나 주제가 하위주체로서의 여성(문제)이라는 사실만으로 ‘재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는 방법적 고민은 더 까다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성과 여성 문제, 페미니즘, 페미니즘 문학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또 내어놓겠느냐는 태도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학 내 ‘노동(자 여성)’을 발견한다는 것


‘노동’의 맥락에서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문학적으로 필요한 접근법이라는 관점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문학의 영역에서 '노동'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까다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째서 사회과학이 아닌 문학에서?’와 같은 질문이 주어졌을 때, 타 학문 분야와 문학의 연결 지점을 만들고 학문간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라는 대답은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일 겁니다. 경계를 넓히고 허물고 또 어떤 교류와 참조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제가 이해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접근법 중 하나입니다. 위의 질문은 나아가 ‘문학이라는 자리’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만약 문학 작품 안에서 어떠한 여성 노동의 양상을 ‘노동’의 측면으로 다시 읽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요즘 저의 최대의 화두는 바로 이것입니다.

당장 확답을 내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소영현이 지적하듯 “노동이 이미 남성적으로 젠더화된 의미망 속에 놓여있음”(43)을 짚는 것은 젠더화된 노동 공간이 여성의 노동을 이른바 ‘여성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노동’의 의미를 삭제했다는 맥락을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특정한 장소에서 수행되는 노동 혹은 성격으로 규정되는 노동을 ‘노동’의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에 덧씌워진 젠더화의 관점을 벗겨낸다면, 인식적 차원에서 ‘여성의 노동’이라는 경계 역시 허구적인 것이어서 얽매이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 주제는 〈문학3〉(2019년 2호) 원고2)를 쓰는 동안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최근 시에서의 노동에 대해 생각하는 글이었는데, 저는 이른바 ‘노동 문학’의 경계가 오늘날에 와서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국의 노동자, 단결, 파업과 같은 내용, 이미지, 구호가 나오지 않으면 ‘노동 문학’이 아닐까 하는 것이 주된 질문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더 나아가고자 했던 지점은, 특정 노동이 젠더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유하여 이를테면 육아 노동을 시에서 ‘노동’으로 접근했을 때 이 노동이 시적 주체에게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하게끔 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기대하는 효과는 어떤 장면을 ‘노동’으로 읽어냄으로써 그간 쉬이 ‘노동’의 영역으로 인식적으로 환원되지 못했던 노동을 제자리에 올려둘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점이었는데요, 미처 다 못 쓴 원고는 앞으로 차차 진행시켜 볼 예정입니다.



여성 문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접근 방식’으로서의 평론


결국 여성 문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냐는 물음과 등치되기 쉽고 곧 ‘여성문학이란 어떤 것’이라는 답변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범주화된 문학―예컨대 노동 문학, 여성 문학, 퀴어 문학 등―의 명칭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범주의 명칭들은 명명할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일 텐데 그 명칭이 오히려 특정 문학을 일정한 것으로 틀에 가두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갱신의 여지가 있는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끊임없이 유효한 지점을 발생시켜나가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고민 끝에 잠정적으로 내린 저의 소결입니다.

무언가 여지없이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히나 평론의 영역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지없는 명확함이란 독선적 허술함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성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가지고 가야 할 주제입니다. 완고하게 정의 내리고자 하는 태도 및 담론에 의해 구성된 ‘무엇’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러한 태도에 이견으로서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제출되었다면, 그것을 다른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완고한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이전의 것과 같은 한계를 지닌, 이전과 동일한 원리의 작업이 될 소지를 지니기도 합니다. 소영현이 「페미니즘이라는 문학」에서 말했듯 “결과적으로 제거하고자 한 “성차를” 다시 “생산”하게 되는 것”(220)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도가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닐 겁니다. 계속해서 대화와 논의의 지점을 열어놓는 태도 자체가 저는 일련의 페미니즘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도를 비평의 방법론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무엇’이 골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이냐는 태도가 논의의 진전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확장을 위한 정의 내리기가 “페미니즘이 직면한 피할 수 없는 역설의 일면”이면서도 “이 역설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페미니즘을 진전시키는 힘”(220)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페미니즘 역시 일종의 담론이라면 저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여하는 것은 단지 ‘무엇’에 해당하는 작품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 문학이라 이름을 붙인다거나, 그렇게 이름 붙은 작품을 선별한다거나, 선별된 것에 페미니즘적 해석을 가하는 작업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의미화'하는가의 방법적 태도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비평의 영역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느냐, 읽히느냐는 차원과 더불어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느냐’는 질문은 경계를 공고하게 만들기도, 경계를 확장하거나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평론이 완고하게 만드는 문학의 영역이 있다면, 역으로 그것을 완전히 허물어뜨릴 가능성 또한 평론의 영역에 적잖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접근 방식, 태도로서 경계의 문학을 탐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는 중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이 그다지 소영현의 글을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소영현의 글을 보면서 저의 고민과 맞닿는 지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해 이러한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었으며, 누군가 또 이 글을 읽고 자기의 고민을 겹쳐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리저리 해석하는 중인 페미니즘의 접근법 혹은 태도입니다.





1) 이와 관련하여 졸고 「너무 오래된 폭력(1990~2019)」(인천투데이, 2019. 3.) 참고. https://bit.ly/2Zz9C8H

2) 졸고, 「노동을 해보았느냐고」(『문학3』, 2019년 2호) 참고.


필자 소개



선우은실. 평론가.

문학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대화적인 방법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며 유지될 수 있는지를

줄곧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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