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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_리뷰 0 『#문학은_위험하다』 릴레이 리뷰를 시작하며

2019년 8월 13일 업데이트됨


#위험한_리뷰 0



서문


#문학은_위험하다』 릴레이 리뷰를 시작하며


SRS는 총 14주에 걸쳐 여성 비평가 13인의 비평집 『#문학은_위험하다』에 수록된 비평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리뷰를 연재한다. 이 프로젝트는 소설가 조우리, 차현지, 천희란이 구성한 팀 ‘왓에버’(라고 쓰고 ‘어쩌라고’로 읽는다)가 함께한 기획의 일부이며, 이 책의 의지를 이어받는 운동이자 덕질이기도 하다. 청탁 과정은 투명하게 불공정하다. 우리와 친하거나 우리가 좋아하거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 중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우리의 뜻에 함께할 것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탁을 했다. 고료가 없기 때문에 당당한 거절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필자가 별 고민 없이 청탁에 응해주었다. 바쁜 일정에도 선뜻 청탁을 수락해준 필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문학은_위험하다』의 공동저자 장은정은 우리의 기획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책의 저자들과 소통의 창구가 되어주었다. “이왕 무급 노동하는 거 돈 줄 수 있는데 안 주는 곳 말고 돈 없어서 못 주는 곳에서 한다.”는 그녀의 신조가 언제나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음을 밝힌다.



비평을 읽는다는 것, 비평을 쓴다는 것


독자가 없는 비평, 그러나 독자가 없어서 강화된 비평의 권력을 자주 생각했다. 그 비평의 권위를 흔들어 보고 싶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품었던 생각이다. 그리고 『#문학은_위험하다』를 만나며 첫걸음을 뗄 용기를 얻었다. 불신과 의심이 아닌 애정과 믿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치열한 비평의 현장을 소개하고, 그 비평을 제도권 문학의 영역 밖으로 불러내 더 많은 독자와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더불어 보다 적극적인 독자로서 비평을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보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의 필진 구성은 비평가나 연구자보다 시와 소설을 쓰는 창작자에 훨씬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창작자들의 비평적 언어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있다. 그것은 완성된 한 편의 작품에 대한 겸허한 작가적 책임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동의할 수 없는 비평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무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끔 지나가듯 이렇게 말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그 작품 잘 썼던데요. 이번에는 별로던데요. 그러면 작가들은 이렇게 답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작가들이 비평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흔치 않다. 앞선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평적 언어를 갖지 못했다거나 이론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도 같다. 비평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는 오해가 있을까 하는 우려에 덧붙이는데, 작가들은 생각보다 비평을 열심히 찾아 읽는다. 그뿐만 아니라 비평에 썩 관대하지도 않다.

사실 창작자는 필연적으로 각자의 비평적 언어를 갖게 된다. 창작은 언제나 비평의 과정을 수반한다. 이는 단지 작품을 구성하는 기술이나 방법론적 체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작자는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자신의 창작 경험의 어디에 있는지, 동시대 작가들과 어떻게 호흡하고 어긋나는지를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다. 비평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검토하지만, 아무리 호평 일색인 비평조차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으며, 때때로 주된 비평적 관점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기실 창작자들도 비평을 쓴다. 그들의 창작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비평이고, 비평적 시선이 돋보이는 산문을 쓰는 창작자들도 많이 있다. 다만 저자 자신도, 비평도 그것을 비평이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물론 창작자들은 대부분 학계나 제도권에 형성되어 있는 비평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비평적 언어란 합의된 비평 용어나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만을 일컫지 않는다. 문학 이론 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사회학, 하물며 과학에 이르기까지 비평을 구성하는 모든 이론적 요소 또한 이에 속한다. 비평의 이론적 기반은 비평의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비평에서 작품과 비평가의 시선, 이를 설명하는 군더더기 없는 이론이 결합하는 순간 찾아오는 쾌감이 있다. 의미를 확정하기보다는 발생시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창작자로서, 나는 자주 비평적 언어에서 지적인 해방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묻고 싶다. 비평에 있어 이론은 도구인가 목적인가. 이론이 비평을 풍요롭게 한다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간혹 비평작품 앞에서 까막눈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비평은 한국에 갓 소개된 이론을 아무런 예비 설명 없이 사용하고, 어떤 비평은 온갖 이론가와 사상가들의 개념을 동시에 호명한다. 비평이 이론적 체계를 유연하게 변형하고 대입할 수 있는 문학 장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온갖 개념이 개별 사유체계의 맥락에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 사용된다는 인상을 받을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 텍스트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건 내 부족함 때문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정말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비평하는 동료들에게 질문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그에 대한 기준을 가지게 됐다. 나는 이제 자기 언어로 소화되지 않은 인용구로 위상을 확보하는 비평을,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비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한 비평이다.

더는 비평과 작품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평가하거나 평가받는 관계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혹여 비평이 작품의 우위를 정하거나 점수를 매기고, 권위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믿는 비평가가 있다면, 비평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비평을 읽는다. 그리고 비평적으로 읽을 수 있다. 비평적 호명이 문학장에서의 인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작자로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제나 함께 소설을 쓰는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내 작품을 분석하거나 의미 짓는 일을 넘어 작품이 나아갈 길을 함께 찾아주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창작자가 자신이 터득해온 비평적 언어를 신뢰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비평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프로젝트에 담길 모든 텍스트가 비평적 목소리라는 것 또한 분명히 하고 싶다.



왜 하필이면 『#문학은_위험하다』인가


사실상 『#문학은_위험하다』의 출간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지난봄을 기점으로 내 글쓰기를 소설이라는 장르에 한정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고, 거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비평적 언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결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 비평집을 읽고 개인적으로 리뷰를 써 보려던 것이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작가들의 비평집 리뷰라는 기획으로 발전했다. 애초에 이 책의 리뷰를 쓰려 했던 건 이 책이 앞서 출간된 페미니즘 비평서들과는 다른 독특한 의미를 성취하는 동시에, 텍스트가 아닌 책의 구성으로서 페미니즘 비평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이 책은 13명의 여성 비평가가 각각 2017년 여름부터 2019년 봄까지 발표한 19편의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텍스트는 미리 한 권의 책으로 묶일 기획 아래 제출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지면에 흩어져 있던 비평적 논의가 자연스럽게 맥락을 이루며 얻게된 효과는 무척 흥미롭다. 문학사를 중심으로 한 1부의 텍스트들이 서로 꼬리를 물며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문학사를 형성해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일부러 주제를 나누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들 비평이 서로 일치하는 관점을 공유하다가도, 상이한 해석으로 각각의 텍스트를 보충하거나 비판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서영인의 「1990년대 문학 지형과 여성 문학 담론」이 “90년대를 통틀어 주요 문학지에서 여성으로 다룬 예”가 단 두 건뿐이라고 밝힐 때 우리는 1990년대를 페미니즘 비평의 역동성이 발휘되었던 시기로 보는 다른 텍스트에서 덜 고려되었거나 누락된 정보를 교차 시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곧 여기에 실린 비평들은 서로 중첩되는 지점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독자의 비판적 읽기가 적극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는 확장된 텍스트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서로 간섭하며 연결되고 확장되는 이 비평집의 성격은 저자들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2000년부터 2018년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세대나 활동 시기, 활동 영역에 따라 각기 다른 비평적 환경을 통과해온 저자들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과 독자 시대의 한국문학’이라는 부제 아래 모여 있으면서도 특정한 비평적 관심사로 갈음되지 않는다. 2018년 데뷔한 인아영의 「문학은 억압한다」는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비평가 김현이 한국 비평사에 남긴 중요한 전언을 비틀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신경숙 표절 사태와 문단 내 성폭력 등을 통해 문학장의 위계가 폭로된 뒤에 문학장에 등장한 젊은 비평가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술논문과 현장 비평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 있다는 점도 유의미했다. 학계와 문단이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한쪽의 위계가 다른 쪽에서 작동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학술논문의 경우 학문적 염결성이 요구되는 보수적인 영역으로, 현장 비평은 보다 문학적 비약이 허용되는 작품에 가까운 영역으로 여겨왔던 것 사실이다. 이 책에 수록된 학술 지면에 발표된 텍스트는 논문에 요구되는 형식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현장 비평의 활기를 그대로 담고 있으며, 학계가 오히려 현장 비평의 기회와 지면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는 지속적인 논의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학사적 맥락에서 중단된 학계와 현장 사이의 활발한 대화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케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면은 ‘페미니즘 비평’의 정의를 확장한 데에 있다. 이 책의 어디에도 페미니즘 비평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한 페이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책은 수록된 텍스트를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것이 페미니즘 비평일 수 있는가. 예컨대, 양윤의의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서사」는 지난 몇 년 간 페미니즘 작가로 꾸준히 호명되어 온 강화길의 첫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 페미니즘 이론을 활용하지 않으며, 그간 강화길 소설 비평에서 주를 이루던 데이트 폭력이나 여성 혐오 범죄의 공포 등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과연 이를 페미니즘 비평으로 호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독자들의 답변은 분분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자면, 나는 이 비평이 페미니즘 비평으로 수록된 것이 무척 반가웠다. 잘 알려진 바대로 강화길은 여성인물과 그들의 심리를 정교하게 그려내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간 한국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없었던 서사적 긴장과 장르적 독창성을 확보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여성성을 삭제한 보편의 맹점만큼이나 특수화된 여성성의 게토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더 다양한 작품을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읽고, 여성서사에 대한 더 다양한 논의를 페미니즘 비평의 장으로 호출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 밖에도 유의미하며 논쟁적일 비평적 지점들이 이 책 곳곳에 펼쳐져 있다. 가능하다면 눈에 띄는 모든 면면을 소개하고 싶지만, 프로젝트를 함께 할 필자들과 공론장의 외연을 함께 확장해 줄 눈 밝은 독자들의 자리로 남겨두려 한다.



우상 없는 연대를 위하여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 절대다수의 동의를 얻는 비평, 세대를 조망하는 압도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비평, 특정한 작가의 역량에 찬란한 빛을 부여하며 스타 작가를 탄생시키는 비평이 있다. 그러한 비평이 매 시대의 중요한 작품들을 기입함으로써 우리의 문학사를 써왔으니 그를 좋은 비평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한국의 문단 문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지나오며, 우리는 모두를 제압하는 탁월한 담론으로부터 태어난 일그러진 문학의 얼굴을 봤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좋은 비평이란 다음의 문학적 우상을 발견하는 비평이 아니라, 신성화되려는 우상의 의지를 해체하는 힘을 가진 비평일 것이다.

릴레이 리뷰를 기획하며 이 책을 관통하는 공통의 경험(강남역 살인사건, 문단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 신경숙 표절 사태, 세월호와 촛불 탄핵 등)보다 개별 텍스트의 상이한 관점에 더 많이 주목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들을 마주 앉히고 토론을 시키는 장면을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그때 떠오르는 답도 없는 긴 토론이 결코 지루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책을 환영하는 마음과 무관하게 매 순간 무릎을 치며 공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책의 텍스트들이 시도하는 것은 비평적 성취의 경주가 아니라 대화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대화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대화로서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차이를 끌어안고 대화하기를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책을 읽는 내내 자주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 역시 그 대화를 이어받는 목소리가 되기를 바랐다. 이 책의 의지를 지지하되 이 책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필자들에게는 13명의 필자 중 한 명의 필자를 선택해 쓰되 필요하다면 다른 텍스트를 자유롭게 언급해줄 것을 요청했고, 의문이 있다면 의문을, 비판의 지점이 있다면 비판을 제기해주기를 부탁했다. 앞으로 리뷰를 연재할 13명의 필자가 비평적 언어나 이론적 위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 자체를 비평적 대화라고 느끼게 된 작은 해프닝도 소개할까 한다. 소설가 한의연에게 릴레이 리뷰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한 일이다. SRS를 통해 소설 한 편을 접했을 뿐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로 청탁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의연 작가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본래 이 프로젝트의 가제 앞에는 ‘여성 작가’라는 수식이 있었다. 청탁을 한 우리도, 청탁을 받은 한의연 작가도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논의 끝에 우리는 이 해프닝이 중요한 경험이 되리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제안서를 검토한 한의연 작가는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긴 고민을 나누며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이 프로젝트의 취지가 훼손될 것에 대한 한의연 작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프로젝트 참여자의 생물학적 성별 제한을 없애기로 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프로젝트는 참여하는 필자들에게 게재료 3,000원 외에 별도의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다. 원고료를 지급할 형편도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필자들께 내내 송구하다. 그런데 정작 리뷰에 참여한 필진들에게 우리가 들은 말은 고맙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문학은_위험하다』의 저자들로부터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사를 전해 들었다. 우리가 받은 감사의 인사는 리뷰 필진과 책의 저자들이 주고받아야 할 것 같아 여기에 남겨둔다. 이 기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해주신 작가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페미니즘이 아니었다면 이 책도, 우리의 프로젝트도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페미니즘 유토피아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페미니즘에는 유토피아가 없다. 페미니즘은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이론이 아닌 진화하는 생물이다. 페미니즘은 배제되고 억압된 것을 계속해서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의 빈자리를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믿어온 문학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간의 비평을 한자리에 모았다고 밝히며 “아쉽게 함께하지 못한 비평(가)들이 있다. 그 자리들까지 비워 둔 채로”의 한자리임을 잊지 않은 소영현의 서문이 주는 울림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 『#문학은_위험하다』 릴레이 리뷰인 #위험한_리뷰

14주간 매주 화요일 SRS에서 공개됩니다.




필자 소개



소설가 천희란

휴양을 좋아합니다.

작품집 『영의 기원』이 있습니다.

사주시면 휴양에 보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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