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S

우리의 존재는 왜 논리적이어야 하는가?

* 이 글은 2017년에 쓰인 글입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를 보고, 정말 이상한 법이라고 생각했다. 피해자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해야 한다니, 정말 이상한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일을 일상에서 접하면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곤 한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너가 처신을 잘했어야지”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이나, 국가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외치는 간절한 목소리나 노동자들의 파업에 “지겹지도 않나, 저 시간에 자기 일이나 하지”라는 말을 남기는 것들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피해자들에게, 나아가 약자들에게 그들의 아픔을 증명하라고 ‘논리적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이 논리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논리라는 것이 정말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인 진리나 정의로운 가치의 체계일까?

논리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 자연스레 나는 언어를 떠올린다. 논리는 언어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말을 배우면서, 말의 순서를 배우면서, 흰 바탕에 검은 자국에 불과할 어떤 사회적 기호의 인과를 배우면서 ‘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배워간다. 그렇다면 이 논리는 권력을 가진,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의 언어에 기반할 것이다. 교육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강자의 논리를 주입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강자의 논리에 편입되기 위해서 교육을 수용한다. 그들의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 강자의 언어를 배우고, 강자의 논리를 습득한다.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요구 받는다. 언어와 논리의 주체인 누군가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존재가 합당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 받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리가 필요하지 않는 자명한 사실인데, 우리는 논리에 맞춰 우리를 설명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위치가 그러했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낙인을 찍으며 타자로 밀어내왔다. 그리고 이 여성들은 이러한 낙인을 내면화하거나, 이에 저항하기 위해 또 어떤 말들을 남겨왔다. 그리고 그 말은 그 여성이 보다 여성일수록1) 논리적이기를 요구 받았다. 여성에게보다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자들보다 트렌스젠더들에게와 같이 사회가 배척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을 보다 어렵고 장황한 논리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장황한 논리는 길어지고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어려운 책이 없다. 사람들은 쉽게 이해되는 것들에 보다 관심이 있다. 그래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장황한 논리가 필요한 존재들은 보다 “나중”2)의 순위로 밀려난다. 우리가 어려운 책을 나중에 읽겠다고 아껴두다가 읽기로 마음먹은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함으로 우리는 스스로 남성의 논리를 내재화한다3). 그렇게 남성의 논리와 가까워지면 비로소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존재가 인정받는 것은 신청서를 내민 순서도 아니고 논리의 일목정연함도 아닌, ‘보다 이해하기 쉬운’ 순으로 즉 '기존 언어와 흡사한' 순으로 이루어진다.

윤김지영 교수는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는다”4)며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다른 약자들에게 페미니즘이 아닌 자기들만의 언어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한 때 ‘연대’라는 이름으로 손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갖추고 울타리를 쌓아 올리는 일은 기존의 남성들에게 배제되는 것보다 더욱 쓰라리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그는 연대를 거부하고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논리를 요구한다.5) 우리는 왜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아야 하는지 또 다시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이를 수용할 지에 대해서도, 이제 그들이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묶여 있었던, 아니 최소한 내가 그렇다고 생각했던 우리라는 ‘연대’는 논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감이라는 감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고, 언어와 대비되는 행동이나 실천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해서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연대는 우리를 설명해야 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저항하여 우리만의 언어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들의 언어와 다른, 철저히 실천에 기반한 언어이다. 그것은 맑스가 기획한 것처럼 체제를 한 번에 갈아엎는 위대한 실천이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우리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만의 지평을 구축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결코 남성의 논리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이라는 그 연대의 거부에 마음이 아프고, 연구의 지향을 첨언한 그 가벼운 말들이 아프다.

진리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아렌트 연구자 김선욱 교수의 말은 이러한 논리에의 요구에 저항한다.6) 그것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철학사가 애매하게 흐려 놓은 논리와 연대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었다. 논리는 진리의 영역으로 보내야 하고,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는 연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었고,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 논리에 수용되는 때가 오더라도, 우리가 그러한 논리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명확한 방향을 알려준 이 글자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논리적인 말들로 논리정연하게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라는 것에 무력감을 느낀다. 키에르케고어와 듀이에게서 배운, 이 모든 것들이 통합된 실천이라는 성찰은 이러한 무력감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는 이것이 비논리적이고 그래서 무력한, 그럼에도 질서에 수용되고자 하는 글자들이 아닌, 이에 계속해서 저항하는 하나의 실천이고 연대일 수 있다는 앎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픔에 지치지 말고 우리의 글자들을 남겨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설명하는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펼치는 지속적인 실천일 것이다.

1) 여기서 여성은 헤게모니를 쥔 남성과 구분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다.


2) “항의하는 시민들이 2월 16일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포럼에 참석한 문 전 대표를 찾아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느냐”며 항의하자, 문 전 대표는 “나중에 말씀해달라”고 했다.” 김한주, 「10년째 ‘나중에’ 차별금지법…문재인 논란으로 제정 운동 촉발」, 참세상, 2017-02-23,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2047 (2018-06-02).


3)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 때도 그녀는 걸어가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파주: 열화당, 2012, p. 54.


4) “페미니즘의 지평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소수자성이라는 다각적 차이들의 공명대이지, 모든 소수자성을 빨아들이는 통일체, 수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페미니즘은 반드시 무엇을, 누구를 포섭하고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거나 모든 억압들의 해방원리이자 만물 구원 여신론이 결코 아니다. 페미니즘은 만물해방설의 만능적 이론과 실천도 아니며 모든 다각적 차이의 소수자성의 정치학들을 삼켜버리고 마는 상위 심급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소수자들의 해방 이후에야 ‘나중에’ 오는 하위 심급도 아니다.” ‘윤김지영’ facebook 2017-05-29, https://www.facebook.com/jiyeong.yunkim/posts/1471479119564720 (2017-06-02).


5) “게이 남성은 남성을 사랑함으로써 “게이 남성을 남성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남성으로 간주되기에 여성이 될 수 없는 모호한 위치에 게이 남성을 위치시킨다.”로 주장하셨는데 바로 그러한 비식별적 자리를 왜 반드시 타자의 원형인 여성의 자리로 국한하는 용어를 차용하는가를 되묻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식별역의 자리를 굳이 다시 여성의 자리로 가져오는 용어를 통해, 이미 남성을 사랑할 적합하고 승인된 원형적 자리에 여성을, 그리고 그 사본으로서의 자리에 남성 게이를 위치시키는 효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윤김지영’ facebook 2017-06-01, https://www.facebook.com/jiyeong.yunkim/posts/1474637239248908 (2017-06-02).


6) “정치가 이런 진리, 즉 형이상학적 진리와 무관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복수성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절대적 진리 주장이 파괴한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이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으로 무장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주장과, 여기에 근거한 설득과 동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묻게 된다.” 김선욱, 『정치와 진리』, 서울: 책세상, 2001, p. 83.




작가 소개


-la


"우리들의 현재를 모아 미래로 가는 꿈이 있다."



조회 493회

©2019 by akaive of memorandum : Cha Hyun Jee.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