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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리가 가족이 되는 일




우리가 가족이 되는 일



수연은 <루비>라는 책을 단숨에 읽고 나서 모든 문장이 마음에 쏙 든다고 생각했다. 손뼉 치듯이 책을 덮고, 마지막 문장을 곱씹다가 다시 책을 펼쳐서 표지 날개에 적힌 작가 연보를 읽었다. 79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좋아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수연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질투할 일이 없고, 나이 차이만큼 시간이 보너스로 주어진 것 같았다. 합격, 수연이 작게 웅얼댔다. 그러고선 합격, 이란 단어가 주는 빈약함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가쁘게 올라온 마음이 금세 시들해졌다.

뭐가 합격이야, 어느새 방에서 나온 정명이 냉장고 문을 열며 말했다. 냉장고에서 새어 나온 빛이 정명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다. 정명은 냉장고에서 보리차가 담긴 물병을 꺼내 들고서 발끝으로 냉장고 문을 밀어 쩌억, 하고 닫았다. 오래된 냉장고에선 문을 여닫을 때마다 탄성이 떨어진 고무 패킹의 마찰음이 났다.

물 줘?

찬장에서 유리잔을 집어 든 정명이 물었다.

아니, 괜찮아.

뭐가 합격이야.

물을 한 모금 마신 정명이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정명이 물 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수연과 마주 보고 앉았다.

생각해봤어?

뭐를?

수연은 영문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정명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당황하여 거칠어진 수연의 몸짓이 궁색해 보였다.

우리가 가족이 되는 일.

정명은 더 또박또박하게 답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수연의 검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수연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이마에 비친 실핏줄이 두드러졌다.

그 비통한 표정이 예전엔 참 좋았는데.

정명이 수연이 잡은 물 잔을 끌어 내리듯 가져갔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쓸어 올리던 정명이 팽하고 웃었다.

가야지 차 끊기겠다.

정명이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수연은 귓전에 우리가 가족이 되는 일, 이란 말이 계속 되풀이하여 들리는 듯했다.

안 되지 않을까, 하고 수연이 물었다. 정명이 가족을 떠올릴 때면 집, 자동차, 운동회, 상장, 유원지가 떠올랐지만, 수연은 달랐다. 사람 수를 늘리는 일, 종교에 귀의하는 일, 그럼에도 언제든 분해될 수 있는, 공중 분해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예고하지 않는 나약함이 떠올랐다. 나갈 채비를 하던 정명이 다시 식탁에 앉으며 다분히 의도된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은 금방 알아챘다. 계획된 한숨은 수연에게 너무나 익숙했고, 그런 한숨을 마주할 때마다 서로가 의미 있는 것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수연의 머릿속을 채웠다.



안 되지 않을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맘때 정명은 이직을 준비하는 회사원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남몰래 꾀했기 때문에 항상 노곤했다. 매일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매일 부하 직원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정명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러니까 이천십 년 퇴근길에 한번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 넘어지는 찰나 앞 사람이 입은 후디에 달린 모자를 잡았고, 정명 대신 앞 사람이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정명이 안절부절못하며 앞 사람에게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넘어진 사람은 벌떡 일어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명과 수연의 첫 만남이었다.

안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라도 몸이 아프면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내밀었던 정명에게 수연은 말했다. 결국 둘이 사귀게 되었을 때, 수연은 정명을 치근덕대며 번호를 알아내려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고, 일부러 쌀쌀맞게 굴려고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날의 정명을 수연은 기억한다. 창백한 안색과 눈 밑으로 까뭇까뭇한 주근깨,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삐쩍 마른 몸.

왜 한숨 쉬어?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수연은 묵은 문제를 마주하기보다 목전의 문제를 보는 것이 편했다. 정명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던졌다. 생채기를 낼 만한 말을 신중하게 생각했고, 싸움보다 단어를 골라내는 데에 몰두했다. 정명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수연은 못된 말을 한꺼번에 쏟아낸 후, 되려 등신이 된 기분이 들었다. 조금 과했다고 느꼈고 정명에게 조금 미안했다.

집까지 한사코 바래다준다는 정명을 떼어내느라 수연은 정명과 한참을 입씨름해야 했다. 우리는 싸웠고, 그렇다면 우리의 귀가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정명의 친절엔 마지노선이 없었고, 오늘 같은 날이면 수연은 한결같은 정명에게 넌더리가 났다. 수연은 그런 친절이 돌연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태도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선의를 가졌으므로 딱 잘라 미워할 수 없는, 친절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수연은 열차 안에서 창밖을 보는 걸 좋아했다. 빠르게 지나가던 풍경이 정차 역에 다다르며 차츰차츰 느려지는 게 좋았다.

힘내라 밖에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

엄마가 아빠와 시작할 때의 마음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복잡한 건 아니지만 중요하게 들어줬으면 좋겠다.

경자 옆에 수연의 몸집만 한 배낭이 놓여 있었다. 경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말했다. 수연은 경자를 빤히 보았지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자의 보라색 스카프만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것을 예고하지 않는 일.

수연이 기억하는 경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한 모금 마시고 질려버린 아이스 커피가 수연의 손에 들려 있었다. 플라스틱 컵에 맺힌 물방울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령이 생길 거야.

수연은 경자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되풀이하여 들리는 듯했다.


정명은 졸업식에 가족과 함께 꼭 자장면을 먹었다. 형제의 졸업식을 포함하면 지금껏 총 여덟 번 자장면을 먹었는데, 앞으로 몇 번의 자장면이 더 예정되어 있었다. 딸을 원했던 영길은 연숙에게 오랫동안 아이를 갖자고 보챘고, 둘은 정명의 동생을 얻었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영길의 표정을 정명은 기억한다. 얼굴이 빨개져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던 영길의 모습과 철그렁철그렁하며 떨어지는 동전의 소리를 정명은 기억한다. 수연도 보람을 본 적이 있다. 수연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러니까 이천십일 년에 처음으로 정명의 집에 초대받았다. 마중을 나온 정명이 철문 앞에 서 있었고 책가방을 멘 보람이 머리에 두 손을 올리고 오만상을 짓고 있었다. 보람은 개를 싫어했다. 보람은 집에서 나설 때 꼬리를 흔드는 개에게 번번이 돌멩이를 던졌다. 정명은 보람이 개를 괴롭히는 걸 목격할 때마다 머리통을 한 대씩 쥐어박았다. 그럴 때마다 보람은 형은 왜 나만 미워해, 라고 말하며 자신은 강아지가 무섭기 때문에 괴롭히는 거라고 말했다. 정명은 무서우면 괴롭힐 수 없어, 라고 답하며 보람의 머리통을 한 대 더 쥐어박았다. 그리고 난 네가 무섭지 않지, 하며 한 대 또 쥐어박았다. 보람이 가는 눈을 뜨고 수연과 정명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형 진짜 싫어, 하고 소리를 꽥 지르며 골목을 향해 뛰쳐나갔다. 정명의 집은 정원이 딸린 양옥식 주택이었다. 철로 된 대문을 열면 목줄에 묶인 채 누워 있던 개가 고개를 들어 꼬리를 흔들었다. 해가 잘 들고 아늑한 집이었다. 정원엔 잘 가꾼 화초와 나무가 종류별로 잘 갈무리되어 있었고, 제자리에 옳고 바르게 놓인 듯했다.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수연은 묻진 않았다.

귀엽지.

정명이 현관문을 열며 물었다.

뭐가?

보람이.

수연은 현관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가만히 기다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깨끗이 정돈된 정명의 방엔 찢어낸 달력 한 장이 벽에 붙어 있었다. 정명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연인 마리오와 베아트리스가 둘의 첫날 밤을 기리기 위해 그날의 달력을 찢어내 보관하는 대목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걸 시간을 정지시킨다고 표현했는데, 수연이 내심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이었다. 수연은 정명의 집에 갈 때마다 벽에 붙은 달력을 떼어내라고 요청했는데 정명은 응하지 않았다. 정명이 자신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수연은 자신과의 첫날 밤이 벽지처럼 방에 붙어 있는 게 싫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정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면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날의 수연은 생각했다.


네 아빠랑 좋은 시절은 끝났어.

경자는 말했다.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얼마 후 요란한 폭죽 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졌다.

끝났나.

경자가 물었다. 폭죽이 만든 연기가 밤 구름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몇 차례 불꽃이 터지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끝났나?

경자가 또 물었다. 그때 불꽃이 터졌다.

아니네, 경자가 답했다.

하늘에 퍼진 불꽃이 국화 모양을 내고 있었다. 작게 보이던 국화가 점점 커지다가 멸각하기를 반복했다.

네 아빠가 잠깐 예쁠 때도 있었지.

불꽃놀이 빛이 경자의 옆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지하철역에서 수연의 집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였다. 인적이 드문 상가 골목을 십 분 정도 걸으면, 나무 팻말에 무더위 쉼터, 라고 적힌 경로당이 나왔다. 경로당 앞에는 한때 식탁으로 쓰였을 법한 탁자 한 개와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는데, 수연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노인들이 간식을 나눠 먹거나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인 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적어도 한 명의 노인이 멍하니 앉아 있었기 때문에 동네 노인들이 교대하며 탁자를 지키는 게 아닐까 수연은 생각했다.

집에 도착한 수연은 녹은 아이스 커피를 개수대에 부었다. 커피가 뻐끔뻐끔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수연은 수도꼭지를 열어 개수대를 한 번 헹군 뒤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붉은색 바디솝으로 거품을 내는 동안 계속 싸구려 딸기 캔디 향이 났다. 얼마 전 집 앞 마트에서 할인해 판매해서 5,000원을 주고 산 바디솝이었다. 케이스에는 양 갈래머리를 한 여자 아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캐릭터 위엔 풍선 같은 글씨체로 ‘스위트 버디’라고 쓰여 있었다. 아동용을 산 건가? 수연은 이 향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 썼던 어린이용 치약의 맛, 어금니가 시릴 정도로 달콤한 딸기 맛이 떠올랐다. 먹지 마시오, 라고 쓰인 손바닥만 한 치약.

수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대강 닦아내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수연은 입맛을 다셨다. 딸기 캔디 맛이 입안에서 맴도는 듯했다. 이불 틈 사이로 딸기 캔디 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수연은 딸기 바디솝을 세면기나 변기 따위를 닦을 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베개가 점점 축축해졌고 수연은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불을 걷어낸 수연이 침대 맡에 놓인 향초에 불을 붙였다. 숙면에 도움을 주는 풀냄새와 라벤더향이 섞인 아로마 향초였다. 희미한 연기 향과 함께 초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작은 소리에 집중하고 있자니 수연은 졸음이 쏟아졌다. 막 잠이 들려는 참에 휴대 전화가 울렸다. 수연은 받지 않았다. 곧이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고 메시지에는 잘 도착했냐는 정명의 안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수연은 잘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 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이윽고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왜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냐고 다그치는 정명의 메시지가 있었다. 메시지엔 의도된 쉼표와 말줄임표가 빽빽했다. 수연은 정명이 상대의 안위보다 상대가 자신을 안심시키지 못한 것에 골몰한다고 생각했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 근데 이게 맞니? 네가 이렇게 다그치는 게 맞니?

수연은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 전화 배터리를 빼버렸다. 그러고선 미안하다는 말은 빼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달아난 잠을 다시 재촉했지만 그럴수록 눈이 떠졌다.


반장이 된다면 실내화가 닳도록 3학년 3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수연이 펼친 일기장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수연은 잠이 잘 안 올 때마다 글을 썼고, 글이 잘 안 써질 때마다 일기를 꺼내어 읽었다. 일기에는 지금의 수연과는 거리가 먼, 협동심이 빛나고 봉사심이 투철한 수연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3월 10일의 일기였다. 수연은 그날의 수연이 모든 것을 막아낼 만큼 단단해 보인다고 느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것은 아주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게 아닐까 수연은 생각했다. 페이지를 넘기자 착하고 예쁜 엄마라는 제목의 일기가 나왔다. 가방 안에서 우유가 터져서 교과서와 가방이 다 젖은 채로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자신을 혼내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 엄마는 정말 착하고 예쁘다는 내용이었다. 엄마와 함께 선풍기 앞에 앉아서 교과서를 말렸고 엄마가 세 권, 자신이 네 권을 말렸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그러고선 한 줄을 띄우고 우유에 디에이치에이가 많이 들어 있는 걸 잘 알지만, 난 우유가 정말 싫고 맛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도 적혀 있었다. 지금의 수연은 누가 먹으라고 하지 않아도 우유를 마시고 꽤 자주 마신다.



날이 밝아질 때 즈음 잠든 수연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수연은 휴대폰을 켜고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며 냉장고로 향했다. 구구절절한 정명의 답장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오늘 약속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만 와 있었다. 수연은 약속이 뭐였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은 정명을 잠시 원망하다가, 오늘이 정명의 스페인 친구를 공항에서 마중해 주기로 한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어제 미안했어. 네 말이 맞더라.

수연이 낮은 숨을 내쉬고 정명에게 항공 편명을 묻는 문자를 보냈다. 곧이어 항공 편명이 적힌 답장을 받았다. 오후 세 시 십 분에 도착하는 비행기였다. 수연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 한 줌을 꺼내서 반으로 갈라 올리브유에 볶아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토마토 청을 만들어 보려고 매번 마트에서 방울토마토를 사다 날랐지만, 토마토 청을 만들기도 전에 항상 다 먹어버렸다.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았다.


수연은 공항 입국장 의자에 앉아서 스페인 친구가 오길 기다렸다. 비행기는 경유지인 샤를 드골 공항에서 이십 분 남짓 지연돼서 세 시 삼십 분이 되어서야 도착했고, 수연은 입국 게이트 앞에 서서 그를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걱정했다. 큰 키에 짙은 갈색 머리를 했다는 것이 수연이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크게 ‘수연’이라고 적힌 종이를 내보이며 등장했기 때문에 수연은 곧바로 그를 알아봤다. 수연은 황급히 다가가 종이를 아래로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는 가슴팍에 종이를 가져다 대며 트렁크를 멈춰 세웠다.

수연 씨입니까?

그가 종이를 살짝 흔들며 물었다.

네.

내 이름은 에두워르드입니다. 정명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에드워드요?

아니오. 에두아르도, 에두아르도입니다.

에두아르도가 느릿느릿 말했다.

네, 그 종이 좀 내려 주실래요?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에두아르도의 한국어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고 말도 잘 알아들었지만, 무언가 고전적인 말투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햇빛을 받은 한강이 일렁이며 물비늘을 만들고 있었다.

수연, 이곳은 바다입니까?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를 지나는 열차 안에서 에두아르도가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뇨 강이에요, 한강.

그렇다면 이 근처에 바다가 있는지요?

아뇨.

없습니까?

네.

수연은 서울에 혹시 바다가 있던가, 하고 생각했다.

서울도 아주 큰 도시이다.

네.


에두아르도와 수연은 서울대입구역에 내려서 정명의 집으로 향하여 걸었다. 에두아르도가 맞선에 나온 남자처럼 시시껄렁한 질문을 수연에게 던졌다. 신발이 아름답습니다.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취미는 무엇입니까. 얼렁뚱땅 답하다 지친 수연은 에두아르도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취미라니 보통 한국 사람은 취미란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외국인과 말할 때는 사전에나 적힌 말을 하는구나, 하고 수연은 생각했다. 에두아르도는 기다렸다는 듯 사극, 사극을 좋아한다며 반색했다. 그래서 오늘은 짐을 놓고 한국의 궁을 보러 갈 거라며 낭랑한 눈빛을 보였다. 아, 사극을 좋아하시는군요, 하고 수연이 신통치 않게 답했고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삼 일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타다요시를 만날 것입니다.

에두아르도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타다요시오?

네, 정명도 타다요시를 알지요?

네.


정명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러니까 2007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호주 골드코스트로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정명은 특유의 친화력과 요령으로 같은 과정을 밟는 많은 친구와 친해졌고, 여전히 두루두루 연락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정명이 어학연수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유일하게 친구가 되지 못한 일본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루는 정명이 밑바닥이 드러난 자신의 바디 크림을 뿌욱하고 짜내다가 조금 부족해서 룸메이트이자 일본인인 타다요시의 바디 크림을 엄지손톱만큼 썼는데, 후에 줄어든 바디 크림을 알아챈 타다요시가 크게 정색했다고 했다. 정명이 타다요시에게 조심스레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타다요시는 정명에게 일본말 몇 마디를 나지막이 내뱉더니 휙 돌아섰다고 했다. 당황한 정명이 한걸음에 퍼시픽 페어에 자리한 드럭 스토어로 향해 같은 브랜드의 바디 크림을 사서 타다요시에게 내밀었지만, 타다요시는 여전히 어두운 낯빛으로 잇츠 오케이 암 오케이, 라고 말하며 정명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에 타다요시는 소지품을 모두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썼고, 정명은 타다요시가 자신을 도둑 취급한다고 느껴 못마땅했다고 했다. 결국 둘은 방만 공유하는 사이가 됐고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별다른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수연 씨?

네?

내일은 뭐를 하십니까?

글쎄요.

수연은 오늘부터 공모를 위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너 때문에 미뤄졌다고 말하고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저는 내일 정명과 동물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호랑이를 볼 것입니다.

아, 호랑이.

네, 호랑이. 수연도 같이 가겠소?

봐서요.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연이 고민해 보겠다고 바꿔 말하자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에두아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같이 가시지요. 호랑이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귀여운 것들도 많습니다.

귀여운 거 안 좋아해요.

다시 칠흑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트렁크 바퀴가 보도블록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에두아르도는 힐긋힐긋 수연을 쳐다보며 말을 건넬 알맞은 틈을 찾았지만, 얼음장 같은 수연의 표정을 보고 줄곧 단념했다.



기회의 땅,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너구리는 찬장에.

현관문 도어락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수연은 쪽지를 떼어내 에두아르도에게 건넸다. 쪽지를 받아든 에두아르도는 입을 활짝 열고 잇몸을 보이며 킁킁킁킁 웃었다. 수연도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며 기회의 땅, 이란 말 때문에 살짝 코웃음이 났다.

집이 세이프티 박스 같습니다요. 근데 찬장이 무엇입니까요?

어투가 뒤섞인 에두아르도의 질문에 수연이 다시 코웃음을 참았다.

...싱크대에 있는 서랍장이요.

...

싱크.

아 아이씨 싱크.

수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비밀번호는 84086이에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는 에두아르도를 지켜보며 수연이 말했다.

음... 천천히 말해주겠?

팔, 사, 영, 팔, 육이요.

팔, 사, 영, 팔, 육, 이.

아뇨, 이는 빼고요.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팔, 사, 영, 팔, 육.

아, 알았습니다. 팔사영팔육.

그리고 별을 눌러야 해요.

별이요?

별....

수연이 어깨에 멘 가방을 낚아채듯 가슴 쪽으로 휙 돌려 메고 가방 안을 뒤적거려 펜을 꺼냈다. 펜 끝을 딸깍 누르며 수연은 에두아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두아르도도 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정명이 준 쪽지를 달라고 말했다. 에두아르도는 서둘러 가슴 팍에 달린 티셔츠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수연에게 내밀었다. 받아든 수연이 쪽지에 비밀번호를 적었다.

기회의 땅,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너구리는 찬장에. 84086*

수연은 쪽지를 도로 건네고, 에두아르도와 짧은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며 삐비빅하고 전자음이 났다. 수연이 승강기 하강 버튼을 누르고 위치 지시등을 바라보았다. 정명의 집 현관문에서 우다당하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승강기가 도착했고, 승강기 문과 정명의 집 현관문이 동시에 열렸다.

수연!

너구리 라면 봉지를 손에 든 에두아르도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너구리 드시고 가실래요?

엘리베이터 문이 도로 닫혔다. 수연은 에두아르도를 따라 정명의 집으로 들어갔다.

냄비에 물을 올리던 에두아르도가 한국과 일본을 일주일 동안 경험한 뒤에 둘 중 한 곳에서 ‘오래살기’를 결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민이요?

그렇게까진 아닙니다.

그럼....

수연이 물었다.

번역 일을 할 것입니다.

에두아르도가 답했다.

그제야 수연은 쪽지에 적힌 기회의 땅, 이란 말이 이해됐다. 수연은 정명이 지금까지도 타다요시와 미묘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 다시마군요.

에두아르도가 뒤를 돌아 수연을 바라보았다. 에두아르도의 손에 검은 다시마를 들려 있었다.

스페인 너구리에는 다시마가 없다는 거 아십니까요?

네?

다시마가 없습니다. 스페인 너구리에는, 호주 너구리에도요.

...아, 네.

사실은 있습니다.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연은 생각했다.

베지터블 플레이크에 잘게 잘라서 들어 있어요. 한국 너구리에서 다시마를 찾아보라고. 정명이 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실은 있는 것이지요.

에두아르도는 말을 고르듯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은 그런 차이가 좋다고 덧붙였다. 에두아르도가 다시마를 냄비에 퐁당 빠트렸다.

...내일 동물원 같이 갈까요.

수연이 물었다.



오후에 비 내린대. 오늘 가는 거야?

수연은 정명에게 문자를 보낸 뒤 물이 든 유리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예보와 달리 쨍쨍한 햇빛이 방안을 비췄다. 수연은 눈을 쨍그리며 창문 밖 철재 화단에 놓인 스파티필룸을 바라보았다. 스파티필룸이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수연은 유리잔에 남은 물을 화분에 붓고 창문을 닫았다. 식탁에 올려둔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에두아르도가 잔뜩 기대하고 있어.

수연은 답장을 확인하고 유리잔을 식탁에 올려놓은 뒤 마른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 발등에 물을 뿌리며 물 온도가 미지근해지길 기다리다가 샤워기 머리를 홀더에 고정했다. 수연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스위트 버디’ 바디솝으로 거품을 냈다. 그러던 중 입안에 물이 들어왔고 수연은 물을 퉤 하고 뱉어 냈다.


아래로 움푹 팬 파란 양동이 모양의 콘크리트 우리 안에서 곰이 꼼짝 않고 하늘 한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돌연 곰이 상체를 들어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손뼉을 쳤다. 그러자 곰의 시선 끝에 선 사육사가 양동이 안에 든 먹이를 꺼내서 곰에게 던져 주었다. 곰은 선 채로 용케 받아 먹었다.

재주가 좋네.

정명이 수연을 보며 말했다.

수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곰을 바라보았다. 곰이 다시 손뼉을 치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려 소리를 내자 사육사는 먹이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곰은 먹이를 받아 먹었다. 정명이 손나팔을 만들어 통키, 하고 소리쳤다. 곰이 시선을 돌려 정명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곰이 뒤뚱뒤뚱 몸을 돌리더니 정명을 향해 두 번 손뼉을 쳤다. 그 뒤로 정명을 향해 손사래를 치는 사육사가 보였다.

귀엽지?

정명이 수연을 보며 물었다. 수연은 대답 없이 숨을 참고 곰을 바라보았다. 곰이 정명을 향해 다시 한번 손뼉을 치더니 입을 동그랗게 오므려 소리를 냈다. 정명이 으하하 웃었다. 수연은 곰이 사람을 아군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끔찍했다. 작은 아군이라고 느꼈던 사람이 실은 가장 큰 적군이라는 걸 눈치채기 전에 곰은 죽을 것이다.

통키 많이 늙었다. 작아졌어. 나 어릴 땐 더 컸던 거 같은데.

정명은 입맛이 쓴 듯 입을 짭짭거리더니 마음이 좀 그렇다고 덧붙였다.

수연은 동물원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울타리에 갇힌 동물을 더는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돌아가자는 말을 건네기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다.

정명, 저 곰은 더 차갑고 더 넓은 곳에 있어야 해.

잠자코 있던 에두아르도가 말했다.

안에 에어컨 있을걸? 안에 에어컨 있어.

...정명, 우리 얼른 이 동물원에서 나가자.

응? 호랑이 본다며. 호랑이는...

내가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정명.

에두아르도가 정명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사파리 투어 예약했는데?

취소하자.

아마 취소 안 될걸?

정명. 저 곰은 무료함, 두려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어.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수연은 스트레스라는 영어 발음이 왠지 더 스트레스답게 들렸다.


동물원 출구를 지나는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셋은 우산을 사기 위해 가까운 편의점을 향해 뛰었다. 편의점에 도착한 정명은 수연에게 함께 쓸 우산 한 개만 사자고 말했지만, 셋은 각자 우산 한 개씩을 사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한국 속담을 필살기처럼 쓰며 에두아르도가 우산을 펼쳤다. 수연은 와중에 코웃음이 나는 걸 참으며 우산을 펼쳤다.

오지 않으려는 당신을 끌고 와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산을 펼치다 말고 에두아르도가 수연을 보며 말했다. 수연은 괜찮다고 답했다.

제 잘못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에두아르도의 우산이 활짝 펼쳐졌다.

전 괜찮아요. 에두아르도가 미안할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수연이 에두아르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옆에서 정명이 말없이 새로 산 우산의 포장 비닐을 벗겨내고 있었다. 수연과 둘은 기흥역에서 헤어졌다.


서른 개가 넘는 정거장을 지나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한 수연은 인적이 드문 상가 골목을 지나 집으로 걸어갔다. 십 분정도 걸었을까. 수연은 오른편에서 방진막이 처져 있고 부서진 외벽 돌무더기와 철근이 얼크러진 곳을 발견했다. 무너진 건물 뒤편으로 가려져 있던 빌라의 옆 모습이 보였다. 창문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어떤 건물이 있던 곳인데,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수연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항상 지나다니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놀란 수연이 조심스레 현관문으로 다가가서 외시경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현관 복도에 트렁크를 든 에두아르도와 정명이 서 있었다. 작아진 정명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눈썹 끝을 매만지다가 에두아르도에게 무언가 중얼거렸다.

나갈게.

정명이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수연이 현관문에 대고 말했다.

아, 응.

정명이 대답했다.

입구에서 보자니까.

응?

...아니야, 금방 나갈게.

수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10시 45분. 약속 시각까지 십오 분이 남아 있었다. 수연은 식탁에 놓인 랩톱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 에두아르도가 반갑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에두아르도가 악수를 청했고 수연은 악수에 응했다. 정명은 악수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정명이 봐둔 냉면집이었다. 정명이 수연의 냉면 그릇에 삶은 달걀 반쪽을 옮겨 담았다. 난 계란을 좋아하고 넌 계란을 싫어하니 우린 정말 잘 맞는다고 정명이 수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궁을 보면서 피자랑 맥주 먹을 수 있는 데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정명이 젓가락으로 냉면 사발 안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여기 식탁보가 재밌습니다.

에두아르도가 말했다. 테이블에는 반투명한 하얀색 일회용 식탁보가 겹겹이 씌워 있었다. 에두아르도가 젓가락 끝을 테이블 위에 두드리며 고쳐 잡았다.

이거 식탁보 아니야. 테이블 치우기 쉽게 깔아 놓은 거야.

정명이 식탁보를 문지르며 말했다. 겹쳐진 비닐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에두아르도가 조심스럽게 집어 올리던 무생채가 젓가락에 떨어졌다.

보면 여러 장 깔려 있잖아. 하나만 싹 걷어내면 바로 새 테이블이 되는 거지.

정명이 식탁보를 걷어내는 시늉을 했다.

한국은 정말 효율적이구려.

에두아르도가 다시 집어올린 무생채를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정명은 먹는 내내 에두아르도에게 냉면이 맛있는지, 맵지 않은지, 열무김치는 맛있는지를 물었다. 에두아르도가 서툴게 젓가락질하며 남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그래서 한국으로 올 거야?

정명이 묻고 나서 열무김치를 집어 입안에 넣고 아삭아삭 씹었다.

에두아르도는 뭉친 면 가닥을 앞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끊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타다요시에게 가봐야 알지 않겠나.

냉면을 꼭꼭 씹어 넘긴 에두아르도가 짧은 기침을 하고 답했다.

에두아르도, 이걸로 잘라 먹어요. 난 서울 싫던데. 일본으로 가요.

수연이 에두아르도에게 가위를 건넸다.

복잡한 게 아니라 다양한 거지.

복잡한 거야. 다양하지 않아, 절대로.

그렇게 따지면 서울 못 살지. 에두아르도, 못 들은 거로 해.

정명이 손사래를 쳤다. 에두아르도가 미소를 띠며 면을 가위로 잘랐다.



조도가 낮은 카페였다. 수연이 정명을 다시 만난 건 에두아르도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삼 일이 지난 후였다.

정명아, 복잡하진 않지만 중요하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정명이 집중하는 듯 허리를 바로 세웠다.

나 결혼하고 싶지 않아.

이번엔 수연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정명이 정지된 화면처럼 굳어 있었다.

그게 너라서가 아니라, 네가 아니라도 나 결혼하고 싶지 않아.

정명의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

우리 아빠 딸 좋아하는데.

정명이 말했고 수연은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둘 사이에 칠흑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네 아빠가 딸을 좋아하는 거랑 이거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수연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만날 필요 없겠다.

정명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수연에게 결혼을 하자는 말은 이별 통보였고 정명에겐 결혼을 안 하자는 말이 이별 통보였다. 삶은 달걀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만큼 가벼운 이별의 이유였다. 정명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드르륵 마찰음을 냈다. 수연은 정명이 천천히 걸어나간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수연은 정명에게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며칠 후 정명이 보람이 가출 했다는 문자를 보냈지만 그게 다였다. 정명은 개 대신에 보람이 집을 나간 거라고 말했다. 수연은 돌멩이를 주워들어 개집을 향해 던진 뒤에 잘 갈무리된 마당 정원을 유유히 걸어 나가는 보람이 떠올랐다.



수연이 살짝 데친 방울토마토를 샐러드 볼에 담았다. 방울 토마토엔 십자 모양의 작은 칼집이 나 있었다. 수연은 샐러드 볼을 식탁에 내려놓고 방울토마토 껍질을 하나씩 벗겨냈다. 방울 토마토를 도마 위로 모두 옮긴 뒤에 수연이 일어나 싱크대 서랍에서 과도를 꺼냈다. 도마 위에 놓인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갈랐다. 방울 토마토를 한 줌 유리병에 옮겨 담고 그 위에 설탕을 뿌리고 다시 방울토마토 한줌을 옮겨 담고 설탕 뿌리기를 반복했다. 방울토마토와 설탕이 유리병 목까지 차올랐다. 수연은 도마 위에 남은 토마토를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일어나서 싱크대로 향했다. 비닐랩을 꺼내는데 휴대폰에서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이름이 없는 정명의 번호였다.


전화를 안 받아서 문자를 보내. 에두아르도가 너한테 편지를 보냈어. 너한테 전해달라고 해서 네 주소로 택배 보냈어. 오늘이나 내일 도착할 거야.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람이는 다시 집에 들어왔어.


초인종이 울렸다. 수연이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비닐랩을 식탁에 올려놓고 수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택배기사였다. 수연이 택배를 받아 들고 현관문을 닫았다. 도어락에서 삐비빅하고 전자음이 울렸다. 수연은 과도로 택배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가르고 택배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 국제 우표가 붙은 빨간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편지 봉투에는 영어로 된 에두아르도와 정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수연이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냈다.


안녕하세요. 수연. 잘 지내고 있나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전 이곳 스페인에서 한국인에게 문학을 배웠습니다. 그 교수의 이름은 경자구. 경자구는 제가 다니는 대학의 문학과 교수입니다. 저는 경자구 교수에게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습니다. 경자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경자구에게 뜻있는 일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동물원에서 우리가 찍은 사진을 기억합니까. 동물원 초입에서 셋이서 함께 사진을 찍었잖아요. 경자는 사진 속 수연을 가리키며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이름을 듣자 너무 놀라더니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연의 엄마의 이름이 경자구가 맞습니까? 다만 그는 그의 전남편에게 수연을 입양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경자의 전남편은 태영권입니다. 태영권은 수연의 아빠가 맞습니까. 경자는 수연을 찾으려고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수연에게 도움이 되고자 경자의 사진을 보냅니다. 불꽃놀이를 할 때 찍은 사진이라고 했어요. 그때는 광복 50주년이어서 서울에서 성대한 불꽃놀이를 했다고 경자가 말했습니다. 이 사진 속의 아이가 수연이 맞습니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수연의 엄마 경자가 맞습니까? 저는 꽤나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경자처럼 확신할 순 없었습니다. 경자는 수연을 스페인에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전 곧 일본으로 떠납니다. 경자가 일본을 추천했어요. 만약 경자가 수연의 엄마가 맞다면 제가 일본으로 가기 전에 스페인에서 함께 만나길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 소식이 수연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으면 합니다.


에두아르도 올림.


추신.

사진 뒷면을 보시면 경자구의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geongjaku@uv.es

1986. 10. 1





필자 소개


정원

만화를 그립니다.

열모임의 구성원입니다.

장편 만화책 <올해의 미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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