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S

몸이 아닌 욕망의 '누드'

2019년 6월 20일 업데이트됨

[플레이보이 창간호 – ‘Nude’ 크리틱]


몸이 아닌 욕망의 ‘누드’

- 포르노그래피 속 여성의 몸



근대 소설은 포르노그래피와 함께 발전해왔다. 기존에 신성시되던 종교적인 관습과 계급의 막강한 권위를 비판하는 역할을 담당해온 두 매체는 인쇄술의 발달과 계몽주의의 흐름을 타고 급진적으로 성장하고 확대되었다. 초기 포르노그래피는 고전 문학작품을 비꼬는 듯한 풍자와 암시, 우상 파괴와 같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가 다분히 녹아 있었다. 최초의 민중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과 포르노그래피의 상관관계를 이어보려는 후대 문학가와 사학자들의 시도가 마냥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포르노그래피 속에 가득 차있던 사회를 향한 신랄하면서도 날렵한 비판 덕분일 터.

체제의 전복과 저항의 이미지로 ‘벗은 몸’이 채택된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벗은 몸’으로 비춰지는 대상이 대부분 여성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초기 포르노그래피 출간물의 독자층은 도시에 사는 귀족 출신에 자유사상을 지닌 엘리트 남성이었다. 문자를 통해 더듬는 여성의 몸은 그것을 읽는 대상의 시선이나 구미에 적절하게 부합하여 표현되었다. 지금 당장 여성의 신체를 정형화한 묘사들을 떠올려보라. 오래 생각지 않고도 금방 떠오를 것이다. 파란 실핏줄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희고 풍만한 가슴, 건드리면 톡 부서질 듯 파리한 발목, 물이 고일 것처럼 윤곽이 도드라진 쇄골…… 이밖에도 여성 신체의 곡선을 과장되게 드러낸 묘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부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수없이 쓰인 표현들이다.

게다가 여성의 신체를 앞세워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정작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포르노그래피 속 여성들의 성적 욕망은 성애 묘사가 있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다수의 포르노그래피에서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화자로 매춘부 캐릭터가 등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정숙한 귀부인에게서는 욕망을 억압하려는 안간힘이 더 도드라져 보일 뿐, 자신의 본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려는 의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여성은 유혹을 하기보다는 유혹 당하는 대상으로 더 많이 쓰여 왔다.

(‘감춰진 욕망 서사’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유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숙한 여인이 등장한다.

2. 피치 못할 성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고, 자신도 모르고 있던 성적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3. 그 사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감당할 수 없이 불타오르는 욕망에 점점 지배당한다.

4. 참혹한 파국에 치닫는다.

이런 골조의 이야기는 너무도 많아서 굳이 예시를 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가장 대표적이겠다.)



성녀와 창녀라는 대립각, 요조숙녀와 요부라는 극단적인 롤플레잉의 출현은 여성의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파악하기 쉽지만, 사실은 욕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어떤 희한한 안간힘(‘다메’!와 ‘야메떼!’로 얼룩진 바로 그 감정),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남성의 매우 가학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밤에는 갈 데까지 가는 요부이길 원하면서, 낮에는 지고지순한 청순캐이길 바라는 성적 판타지는 하나의 인격체에게 해리성 정체 장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진정 애인이 다중인격이길 바라는가?

포르노그래피의 발생 이후 약 500여년이 흐른 지금, 여성에게는 아직도 ‘베이글녀’ 따위의 호칭이 부여된다. 문자에서 시각이미지로 매체가 변화해도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여성의 욕망을 거세하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회의 진정한 속살을 드러내려는 명분의 노출도 이제는 아닌 듯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들이 얻어낸 이 값진 자유와 해방의 결과물(포르노그래피)을 어떻게 애용하는 것이 좋을까.

지난해 골든 글로브상의 영예를 안은 레이첼 블룸 주연의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탄탄대로였던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첫사랑과의 사랑을 재현하려는 주인공 레베카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랑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 약간 미쳐 보일 순 있겠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벗어도 내가 벗어!’의 서사랄까. 여성에게 욕망에 대한 주체적인 실현을 하게 하라. 끌리면 끌린다고, 젖으면 젖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 이보다 더 완벽한 성적 매혹이 있을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당대의 뛰어난 작가였던 디드로는 시대를 뒤바꿀 혁신적인 철학 이론 저서들을 집필하는 와중에 틈틈이 포르노그래피 소설을 썼고, 그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그가 말하길, “우리의 가장 고상한 감정과 순수한 친절함의 밑바닥에는 약간의 성욕이 깔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가장 근원적인 에센스에는 포르노그래피의 혈맥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시대와 장소에서건 자유와 해방을 원할 수 있고, 당당하게 논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노출함에 있어서는, 이제 비로소 여성의 차례다.




필자 소개

차현지

소설가. 산다고 살아지니.


#차현지

조회 0회

©2019 by akaive of memorandum : Cha Hyun Jee.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