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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선의는 정의가 아닙니다

2019년 6월 20일 업데이트됨

당신이 생각하는 선의는 정의가 아닙니다

- 김경주 시인 대필 사건에 부쳐


소설가 천희란




잊고 살았는데 생각해 보니 저도 잠깐 리라이팅과 윤문을 아르바이트로 한 적이 있습니다. 12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저자에게 직접 받아서 한 일이었습니다. 가벼운 기업경영 관련 책이었는데 처음에는 윤문 수준으로만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았지만, 마지막 원고는 리라이팅이었습니다. 원고를 받고 보니 여기저기서 수집한 기사를 모아놓고 꼭지를 나눠 여러 사람에게 일을 시킨 모양이었습니다. 말이 리라이팅이지 수집해놓은 자료로 제가 글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가 말한 것을 누가 곧바로 타이핑한 건지 완성형으로 적히지 않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 책에 대한 임금은 약속한 날짜에 입금이 되지 않아 몇 차례 독촉을 했는데 개인사정으로 미루고, 이메일을 씹고, 결국에는 제가 일을 형편없이 해놓았기 때문에 책을 낼 수 없게 되었다나, 그 원고는 쓸 수 없게 되었다나 뭐라나. 약속한 금액을 줄 수 없다 하여 일부만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엉망이었으면 원고를 받고나서 곧장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지적하거나 진작 이야기해서 수정을 하라고 시켰으면 될 것을 왜 돈 줄 날이 한참 지난 뒤에야 그렇게 말했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책이 나왔는지 어쨌는지는 더욱 모르겠습니다. 돈을 제대로 못 받은 게 아주 서럽지는 않았고, 다만 아 이렇게 책을 쓰고 자기 이름을 거는 저자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일의 과정이 어땠는지 찾아보려고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아보려는데 실수로 청구서함에 들어갔던 임금 지급 지연에 관한 답변 메일 하나만 남아 있네요. 사실 일의 과정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합니다. 대신 그는 제가 일과는 무관한 생생한 기억 하나를 남겼습니다. 처음 일을 받기 전에 얼굴을 보자고 해서 일종의 미팅을 했습니다. 그를 소개시켜준 건 이미 그의 일을 돕고 있었던 남자 후배였는데 그는 연결만 해주고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미팅이 아주 길어졌습니다. 무슨 손금도 봐주고 이름풀이도 해주고, 그냥 빨리 일이나 주면 좋겠다 싶었죠. 맥주도 한 잔 하고 그러기 시작하니 영 기분이 찝찝했습니다. 후배에게 가능한 빨리 와달라고 문자를 보냈지요. 지금 같으면 그냥 집에 갔을 텐데. 후배가 돌아왔고 대충 분위기를 맞추다가 노래방까지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후배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제 옆으로 와 앉더니 어깨동무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손이 자꾸만 가슴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힘껏 붙잡고 손이 못 내려오게 버티면서 노래 부르는 후배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습니다. 노래를 부르던 그가 곧 제 상황을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춤이라도 추자는 양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친구와 한 손씩 마주잡고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춤을 추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얼른 방에서 나와 카운터에 남은 시간 다 빼달라고 한 뒤에 후배에게 모든 걸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저자에게 메일 한통이 왔습니다. 지난밤 필름이 끊겼는데 혹시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지요. 저는 돈이 궁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큰 실수를 하셨다, 앞으로 일과 관련한 자료는 이메일과 인편으로만 주고받겠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고 그 뒤로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서 일을 도운 것은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그는 그들과 가끔 가까운 곳으로 즉흥 여행을 떠나는 듯했고,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아주 가끔은 그들을 통해 제게 동행을 제안하기도 했지요. 물론 따라나서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탬버린으로 머리통 깨부수고 경찰서 갔을 텐데, 하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는데, 그래봐야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김경주 시인의 대필 시인 이후에 쏟아져 나오는 기사를 보면서 대체 차현지의 마음은 어떨까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성추행을 당했는데도 돈이 궁해서 한동안 그의 일을 받아서 하고, 마지막엔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관계를 끝냈습니다. 그를 써먹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런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물며 20대 중반의 또래 작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신인에게 선생이자 선배인 권위 있는 작가가 다가와 일할 기회를 주며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너의 경력이 될 거라고 말할 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이미 관계가 깊어진 후에는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더라도 김경주 자신이 말한 것처럼 과연 그의 "파급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차고 나올 수 있었을까요. 기사에 나온 것처럼 그는 어떤 일들에는 임금을 챙겨줬을 테고, 어떤 일들에는 깊은 신뢰를 보였을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들은 터무니없는 임금이나 마감 기한을 주거나 과도한 열정을 요구하더라도 당당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를 후배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생계를 유지할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준 사람이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차현지도 얼마간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대필 원고를 쓴 시점과 차현지의 등단년도를 두고 이미 신인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그건 활동 연차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20대 초중반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기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제가 했던 선택들을 자꾸 생각합니다. 그때 제 주변에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친구들과 진짜 어른들이 없었다면 저를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취약한 인간에게 네 세계가 여기뿐이고 너를 위하는 건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이면 그 사람은 그 세계 바깥으로 빠져나올 꿈도 꿀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당함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믿을만하지 않아도 그를 믿어야만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습니다. 때로 어떤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당연한 사실조차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시간을 겪어야만 합니다.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지 않기 위해 했던 모든 쿨한 행동,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스스로 덧붙였던 의미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자신이 기만적인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싸우는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겨우 그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난다 해도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을 피해자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라는 논리로 이용하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스스로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비로소 그가 고립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해자는 자유로워졌고, 가해자의 암시는 통하지 않습니다. 홀로 선 자의 의지는 결코 짓밟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재능 있지만 기회가 없는 제자/후배의 영토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자/후배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틀렸습니다. 당신은 그저 그의 머리 위에 드리운 낮은 먹구름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친구라는 말로 발아래 두려했던 그 친구는 이미 당신의 그림자 밖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것도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한 작가의 일회적인 도덕적 일탈이라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계속 입 없이 지내온 차현지의 존재만이 지워지게 될까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차현지는 고소를 하겠다는 겁박을 받았습니다. 네가 한 짓들에 대해서 말하고 다닐 것이고, 그 파급력은 네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예고했지요. 저는 차현지의 동료이고 모든 걸 차현지가 원해서 했다는 김경주의 말을 믿지도 않지만, 설령 그의 말이 모두 옳았다하더라도 그가 보낸 협박조의 문장들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고 선택한 일이었으나 지금 차현지가 그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자신도 그것이 청탁을 한 작가에게 사죄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제자/후배인 차현지에게 왜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가 만일 정말로 친구로서 차현지를 생각해온 사람이라면 차현지의 마음을 달래고 사과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는 본래부터 원저자를 밝히기로 약속해 놓았다면서 이 대필 사건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흑표범님께 사실을 고백하는 메일에 왜 차현지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일까요.



문학장 내의 선생님, 선후배님, 동료 여러분, 제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주십시오. 저는 물론 당사자가 아니지만,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스럽고 두렵습니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고 그를 아는 많은 분들이 깊은 충격에 빠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문학성에 권위를 실어준 분도 있을 것이고, 그의 문학을 내심 아껴오던 분도,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던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김경주는 등단한지 15년이 넘은 시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고, 그와 교류하고 그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겠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충격과 죄책감을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핑계가 되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김경주가 말하는 그 “파급력”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디 기억해주십시오. 여론을 형성하고 즉각적으로 발언하고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해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가 있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부디 그것을 고민하고 실천해주십시오.

문학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저는 눈에 보이는 연대활동을 한 신인 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된 한 권의 책도 없이 말하기를 시작했고, 연대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연대 후 심리적인 문제로 오랫동안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아야 했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과 틀어졌고, 또 누군가와는 다투고 소원해지기도 했습니다. 선의의 말이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등단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권력자 선생님이 된 적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운동에 보탬이 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무척 컸습니다. 그래서 억울했습니다. 그 처참한 사건들을 밟고 서서 권위를 얻게 된 사람들에게 또다시 평가받기 위해 써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문학을 하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상처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고마웠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제게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고 말해준 동료들, 제가 무너질 때 안아주고 보듬어준 연대자들, 문학의 개념을 다시 고민하고 쓰려는 작가들, 힘을 실어준 출판 관계자들, 후배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힘을 보태주겠다는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들을 믿고, 그들과 함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거듭 생각합니다. 변화한 문학장의 분위기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걸 느낍니다. 물론 아주 조금이지만, 그 조금을 함께 변화시켰다고 느낄 때에는 작게나마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우리는 문학의 권위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한 번 확인했습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문학성의 일부로 낭만화해온 시절을 반성했습니다. 이제 문학이 함부로 우위를 매길 수 없는 수평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위계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 해의 작품들 가운데 몇몇 작품에게 상을 주고, 특정 작가를 조명하고 평가하며, 판매부수에 따라 홍보비용이 달라지고, 또 당장은 선택과 배제를 통해 작품을 실을 기회와 출판의 기회가 나뉩니다. 이것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닌 현실입니다. 문학은 수평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경쟁에서 살아남아 역사에 기록된 작품들에 한정해서나 겨우 말해질 수 있는 평등입니다. 동일한 시스템의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연령과 경력, 주목도를 모두 떠나 평등한 동료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제 위에 있고, 다른 누군가는 제 아래에 있습니다. 위아래와 무관하게 제가 동등하게 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위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는 바로 그 위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씩 소외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을만한 힘이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결코 그 마음 뒤에 숨지 마십시오. 자신이 가진 힘을 인정하지 않는 한 충분치 않은 그 작은 힘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아무리 작아도 결코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위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인정하고 선하게 쓰되, 자신의 선의지가 정의 그 자체는 아님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일 아닐까요. 문단 안팎의 동료 여러분, 부디 여러분의 작은 힘에 주어진 책임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며칠간 거의 이 문제에 골몰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차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 현지가 제게 전화를 해서는 제발 트위터 보지 말고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이 마감일인 원고를 다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 제가 원고를 쓰고 있는 줄 알겠지요.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선은 하고 싶은 말을 좀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고, 그래야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성급하지만 이 글을 씁니다. 그래도 저는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차현지는 언론의 연락을 받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요. 아마 저보다 하고 싶은 말이 수천 배는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할 수 없었고, 지금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모든 걸 침착하게 받아들이다가도 제게 전화해 울음을 터뜨리고, 다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비판도 달게 받고, 오해가 생기는 것도 감수하자고 다짐했지만, 정말로 많이 무서울 거예요. 그래서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라고 다르겠냐마는 차현지 자신은 결코 신나게 말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지가 그 침묵 속에서 다시 고립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현지가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모임에 다녀와서 당시 연대했던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몇 차례 직접 만난 분들도 있고, 온라인으로만 알고 지내거나 다른 연대자를 통해서만 들어온 분들도 있고, 또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해 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벅차고 감동적이었지만, 역시 피해자들의 말이 가장 가슴에 남았습니다. 충분히 함께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피해자 중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시는 게 제게도 좋은 연대의 방법입니다. 그때 개인적 아픔을 방패로 쓰는 일이 지긋지긋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제 피해자성의 고통을 내세우지 않고 연대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방식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제 자신을 위해서요.

저는 단체 생활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싸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고, 실은 작은 갈등상황도 잘 못 견디는 편입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에 취약하지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일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혼자 잘 노는 시간을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지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친구를 위해 글을 쓰는 법도 있고, 불안에 떠는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어제 한 시문학상의 초대메일을 받았는데 실수로 보내진 받는 사람 목록에 성폭력으로 교수직을 잃은 시인,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시인, 미투 고발자인 최영미 시인에 보복성 고소를 한 시인의 이름으로 된 메일주소가 들어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저 그걸 보내는 누군가의 세상에는 우리가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일 겁니다. 그 시 문학상을 주관하고 있는 곳에 항의 메일을 보내주실 분을 찾습니다. 기왕이면 소설 쓰는 저보다는 시를 쓰시는 분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끔 모든 걸 탁상공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현실적 조건들을 얘기하면서 거기까지는 바뀔 수 없다고, 너도 이 시스템에 들어와 있는 이상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냥 너 할 일이나 잘 하라고 해요. 어떤 면에는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더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건 아니겠지만 가끔 그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로 들리기도 해요.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떠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 좋으라고 떠나냐 싶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훨씬 신나게 비꼬고 비아냥대고 제가 세상 정의인 양 떠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진지합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경쾌해지고 만 이상한 글 속에서도 말이죠. 누가 들어 옮기고 내쫓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 발로는 절대 안 나가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절을 괴롭히는 중이 될 생각입니다. 아무도 혼자 고요히 수행할 수 없도록 계속 시끄럽게 하고 싶습니다.

김경주 시인께도 올립니다. 당신에 비할 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도 파급력이 있습니다. 그건 작가적 경력도, 명성도, 인맥도 아닙니다. 그저 힘들게 자기고백을 한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과 마감을 펑크 낼 용기죠.

혹여 편집자 선생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갈까 걱정되는데요. 이 글이 단편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어서 더 죄송스럽네요. 펑크 내지 않겠습니다. 마감을 많이 늦추는 편이 아닌데, 이번엔 조금 많이 늦을 것 같기는 해요. 딱 한 번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공개할 곳이 없네요. 많이 돌려 읽어주세요.

2019. 5. 31 천희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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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사과문 발표 이후의 소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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