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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덤 산보

2019년 7월 18일 업데이트됨

* <21세기문학> 2018년 겨울호에 수록.




그 짧은 여행의 이유 중 하나는 석조 씨와의 이별이었다.

아빠에게 평창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털보 아저씨나 보러 가자고. 아빠는 숟가락으로 함박스테이크를 뭉텅뭉텅 자르면서 그러든지, 라고 답했다. 서울에서 평창까지는 족히 세 시간은 걸릴 것이다. 아빠는 오전에 일찍 다녀오면 차가 막히는 퇴근 시간 전에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식당 한쪽에 틀어놓은 텔레비전 화면에는 마침 평창 올림픽 봉사자들의 모습이 비쳤다. 얼마 남지 않은 행사를 위해 3개월째 합숙을 하며 크고 작은 일들을 수행하는 봉사자들은 동일한 트레이닝복과 엠블럼이 새겨진 조끼를 입고 두 손을 한데 모으며 외치고 있었다. 다 함께 화이팅! 함성을 끝으로 슬로 처리되는 화면 속, 해사하게 웃는 봉사자들의 화목하고 정겨운 모습. 그 화면을 보고 있는 우리들조차 왠지 희망적인 기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얼굴들.

나는 슬로 화면에 잡힌 봉사자 중 한 명을 석조 씨의 집에서도 보았다. 나란히 방석을 깔고 앉아서 쉬라즈 와인에 얼음을 타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창밖으로는 제법 굵직한 눈송이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폭설이었나. 그랬을 것이다. 계속 진눈깨비만 오더니, 이번에는 영락없이 쌓이겠다. 석조 씨가 말했다. 제설 작업이나 제대로 하지. 저딴 허식 치르는데 돈 쓰지 말고. 석조 씨는 평창 올림픽에 관해서라면 일관되게 부정적인 태도였다. 올림픽 유치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아직도 그런 거로 국가 위상 따위를 논하는 것부터가 선진국의 자세가 아니라면서. 나는 석조 씨가 평창 올림픽 얘기만 꺼내면 왕왕 된소리를 내는 것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우리가 내는 세금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일에 쓰이는 게 화가 나지 않느냐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일리가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렇데도 평창 올림픽이 석조 씨를 직접 화나게 할 만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석조 씨는 요즘 뉴스를 보면서 자주 화를 냈다. 원래도 그랬지만 더 심해졌다. 나는 그런 석조 씨를 보면서 아빠를 자주 떠올렸다. 석조 씨는 아빠처럼 늙어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세상일이 다 본인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걸까. 석조 씨는 나보다는 아빠와 더 비슷한 연령대니까. 나는 평창 올림픽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올림픽 봉사자들의 3개월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나는 문득 3개월씩이나 매일 붙어 지내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한집에 모여 산다는 건, 룸메이트나 셰어하우스가 아닌, 경제권과 생활 궤도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혈육이 아닌 사람과 한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고, 학부 때 사귀던 학교 선배가 동거를 몇 번 제안하기는 했지만, 같이 있을 때 화장실을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싶어 거절했었기에, 이런 호기심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석조 씨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석조 씨는 한동안 그런 삶을 살았으니까. 한집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함께 장을 본 재료로 요리를 해 먹고, 각자 벌어온 돈을 같은 통장에 넣어서 필요한 물건들을 함께 사고, 두 사람이 만족할 만한 매트리스를 고르고, 색만 다를 뿐 짝이 있는 물품들을 집에 들여 두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직도 석조 씨의 집에는 그 짝이 두 개씩인 물품들이 버려지지 않고 곳곳에 놓여 있으니까. 각각 분홍색과 하늘색의 칫솔꽂이, 노란색과 초록색의 빨래통, 디지털 체중계에 아직도 저장된 163센티미터, 53킬로그램이라는 숫자. 현관문에 걸려 있는 드림캐처. 색만 다른 에스프레소 잔 두 개. 그런 것들. 이제는 거의 식구나 다름없죠, 하고 웃는 남녀 봉사자들을 지켜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석조 씨를 보았다. 석조 씨는 지루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텔레비전은 왜 틀어서는. 아무리 우리가 오래 만났다지만 연말 분위기를 낸다며 와인까지 사 들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선곡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의 흔적 하나 없이 조명이든 캔들이든 온화한 불빛 하나 없이, 정수리에 직각으로 쏟아지는 백열등 밑에 앉아서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보고 있느냐는 말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래 만났다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결혼하면 어떤 느낌이야?

나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물어봤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연예인이 출연해서는 처음 보자마자 이 사람이랑 결혼할 줄 알았어요. 주변에 먼저 결혼한 선배들이 그런 말 했을 땐 안 믿겼는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정말 이 사람이랑 내가 영원히 함께 살겠구나, 그런 직감이 딱 오더라니까요, 라고 할 때. 나는 석조 씨의 무릎에 얼굴을 베고 누워 물었다. 정말 저랬어? 석조 씨도 딱 이 사람이다, 그런 감이 왔어? 어쩌면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하는 거지? 정말 그런 촉이 오긴 하나 봐, 그치? 그러면 석조 씨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치우면서 다 사후적인 거야, 결혼했으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석조 씨는 어땠어? 결혼해봤으니까 그런 감은 왔을 거 아냐. 그제야 석조 씨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을 잡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걸 꼭 나한테 물어야 속이 시원하니 너는. 그럴 때 석조 씨는 담배를 피운다며 자리를 피했다. 왜 나하고는 그런 마음이 안 드는 건데. 왜 나한테는 딱 이 여자다, 이런 직감이 안 생기는 건데. 칭얼거리고 싶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좀 구질구질하니까.



다 먹었으면 가자.

아빠는 내 돈까스가 반이나 남았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산대로 가서 커피를 뽑고 있다. 그러고는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데 커피 값 100원을 굳이 받아야겠느냐고 카운터에 있는 사장에게 물었다. 아빠야말로 굳이 저런 말을 해야 되나. 그런다고 마시지 않을 것도 아니면서.

운전석에 탄 아빠는 창문을 열어 한쪽 팔을 내밀면서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가 연신 차 속으로 들어왔다. 차를 둘러보니 곳곳에 흩어진 담뱃재와 먹다 남은 커피에 버려진 꽁초들로 엉망이었다. 찌그러진 캔 커피가 바닥 시트에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 명의로, 엄마의 현금으로 산 차가 왜 아빠에게로 와서 이 지경이 됐는지. 세차를 하도 안 해서 앞 유리에 낀 먼지가 성에처럼 빽빽했다. 그래서 평창은 언제 가자고? 아빠는 물었다. 내일 오전에 가지 뭐. 여기 사거리에서 내려줘. 아빠는 늘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하지만 나는 웬만하면 딱 중간에서 헤어지고 싶다. 서로에게 마음 쓰는 일 없이, 솔직한 심정으로는 빚지는 느낌 없이 깔끔해지고 싶어서.

내일 아침 9시까지 나와 있어 그럼.

알겠다고 하고 차 문을 닫았다. 금세 출발해버리는 늙고 오래된 우리 집 똥차.

나 잘하는 짓일까.



집에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아빠를 만나는 날이란 걸 알기에 걸려 온 전화다. 아빠랑 뭘 먹었느냐고 묻고, 아빠 몸 상태는 물어봤느냐고 묻고, 임플란트는 다 끝났냐고, 치과 보험은 해결했느냐고 엄마는 물어왔다. 그럴 거면 본인이 직접 만나서 묻지 그래.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다 해주면서 덧붙여 아빠와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네 아빠랑?

어.

네가 가자고 했어?

어.

희한하게들 놀고 있네. 털보 무덤은 가서 뭐하게?

그냥. 연말인데 누구한테든 가서 빌고 싶어서.

엄마랑 일요일에 성당 가면 되잖아.

내가 모르는 죽은 사람 말고, 내가 알던 죽은 사람한테 빌고 싶어 그런다.

엄마는 지랄한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전화해서는 털보 아저씨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긴 하느냐고, 남두 엄마한테 물어봐 주겠다고 했다.

남두 엄마.

사실은 남두 엄마 때문에 털보 아저씨를 보러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녀는 1분도 늦지 않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역 사거리 앞에서 만났다. 눈이 마주쳤지만, 인사도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빠는 피곤해 보였다.

어제도 대리 뛰었어? 오늘 낮에 움직이는데 좀 쉬지.

그럼 휘발윳값이랑 톨비는 누가 내냐.

내가 가자고 했으니까 내가 내겠지.

웃기지 마. 내 친구 보러 가는데 네가 돈을 왜 내.

아빠는 커피나 사 오라며 만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나는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서 카페라테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빠가 마실 라테에는 설탕 시럽을 왕창 넣었다. 아직 출발하기도 전인데 엄마에게서도 계속 문자가 왔다. 진짜 가는 거냐고. 출발은 했냐고. 남두 엄마에게 물어본 주소를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다시 알려주었다. 선산의 가장 밑단에 홀로 있는 무덤이 털보 아저씨래. 도착하면 사진 찍어서 보내봐. 남두 엄마한테 확인 해볼 테니까.

커피부터 한 모금 마시고 난 뒤에 안전벨트를 맸다.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아빠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평창으로 가는 길도 모르고, 어떤 고속도로를 타야 하는지, 톨게이트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중간에 어느 휴게소를 들러야 좋을지 하나도 모르니까. 아빠는 다른 건 다 못해도 운전만큼은 잘하니까. 나는 속 편하게 앉아서 창밖 구경이나 하면 된다.

근데 왜 갑자기 털보냐?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한참 지나서 아빠가 물었다.

갑자기 털보 무덤에 왜 가고 싶으냐고.

내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자, 아빠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냥. 털보 아저씨 장례식에 못 간 게 죄송해서.

털보가 재작년에 죽었는데, 왜 이제야 죄송해?

그냥.

너 내가 구치소에 있었을 때, 털보가 너네 데리고 에버랜드 갔던 거 기억나냐?

아빠가 구치소에 간 적이 있어?

고모부 노래방 일 도와주다가 누명을 쓰는 바람에 반나절 있었지. 그때 털보네가 네 엄마랑 너네 다 데리고 갔다 왔잖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다. 구치소라니.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고놈이 너네한테 참 잘했어. 아니, 네 엄마한테 잘했지.

털보 아저씨 첫사랑이 엄마였다며.

남두 엄마랑 결혼하고서도 그렇게 네 엄마를 상전처럼 모셨다니까. 내가 제 거 뺏어간 것처럼 심통을 오지게 부리면서는 깽판을 치길 3박 4일을 쳤어.

털보 아저씨가 엄마를 짝사랑했다는 건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일화다. 아빠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이면 늘 우스갯소리처럼 하던 에피소드. 스물다섯이던 엄마는 털보 아저씨와 아빠, 둘 중에 아빠를 택했다. 엄마 말로는 너스레를 잘 떨고, 배우 이종원처럼 잘 생기고, 기타도 못 치는데 폼 잡는 게 멋져 보였다고. 엄마랑 아빠랑 헤어진 이유도 똑같다. 배우 이종원처럼 잘 생기는 바람에 여자가 자꾸 꼬이고, 너스레를 너무 잘 떨어서 일을 대충대충 했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폼만 잡느라 사업도 이것저것 손대다 망했으니까. 관계가 깨질 무렵이 되면 상대의 장점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덧 모두 단점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는 그런 급진적인 변환이 찾아오고, 그걸 어떻게든 버티느냐 아니면 쫑을 내느냐, 그것으로 관계가 정리되거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 엄마랑 아빠는 쫑이 난 걸까.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왜 엄마 명의로 된 차는 아빠가 몰고 다니는 거지.

중부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는 아빠와 나 둘 다 말이 없었다. 대신 멀뚱히 앞 유리창을 보며 터널을 지날 때마다 각 터널의 이름을 확인했다. 터널이 진짜 많았다. 어릴 때 가족들과 홍천 스키장에 놀러 갈 때에는 산을 에둘러 고개를 넘고 뱅글뱅글 돌아서야 도착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산자락마다 뻥뻥 터널 구멍이 뚫려 있어 가는 길이 험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석조 씨와 함께 터널이 무너지는 재난 영화를 보았는데,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 영화가 생각이 나서 조금 무서웠다.

석조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석조 씨도 나처럼 몸 어딘가에 구멍이 하나 크게 뚫린 느낌이 들었을까. 그렇게 오래 만나다가 헤어졌는데 그래도 슬프기는 하겠지? 그래도 나만큼 어리진 않아서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거나 숨이 안 쉬어진다거나 젠장 당분간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끝없이 절망적이네, 하고 울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석조 씨는 이혼도 한 번 해본 사람인데. 그러니까 쫑을 내본 이력이 있는데. 나라고 석조 씨 이전에 만났던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별은 이별인데. 그건 힘들고 슬픈 일이잖아.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경험치로 무뎌질 만한 일은 아니잖아.



석조 씨가 전화했을 때, 나는 자주 가는 목욕탕에서 머리를 말리며 커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목욕탕에 가곤 하는데, 그 시간에는 출근 전에 잠시 들리는 사람들이 오거나, 아니면 새벽잠이 없는 할머니들이 와서 조용히 몸을 닦고 있는 풍경이 제법 고요해서 좋다. 그날도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들어가 자수정이 녹아있다는 정보가 걸린 패널을 쳐다보며 탕 속에 앉아 있는데, 내 바로 앞으로 중년 여자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게 고무 부항을 자신의 몸에 좀 놓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물기가 있을 때 쫙, 하고 얹으면 돼요. 자, 이렇게. 여자는 자신의 팔뚝에 색색의 고무 부항을 하나씩 올려두었다. 나는 여자의 손이 닿지 않는 등허리 부분을 어쩌다가 맡게 되었는데, 생전 모르는 사람의 피부를 만지면서 고무로 만든 이상한 물체를 올려두는 것이 좀 이상하고 괴이하기까지 해서 얼른 이 행위를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일을 마쳤다. 여자는 고맙다며 나가는 길에 커피 우유라도 하나 먹고 47번으로 걸어두라고 말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극구 47번으로 걸어두라고 해서 나는 알겠다고 했다. 여자는 늘어진 살 위에 고무 부항 10여 개를 올려두고는 단전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후, 후, 후, 후, 하며 가쁘게 호흡을 내뱉었다. 자수정탕의 물살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이 모든 걸 석조 씨에게 얼른 말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하루에 일어난 가장 희한하고 이상한 일을 서로에게 공유하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다. 마침 목욕을 다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석조 씨에게 전화가 왔다. 이른 아침에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문데. 나는 커피 우유를 마시면서 으응, 하고 답했다.

석조 씨, 나 지금 문어 괴물 봤다.

석조 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우르술라 같은 여자가 있어.

은곤아.

아니 여기에 진짜 무슨 미국 사람처럼 엄청 큰 여자가.

나 당분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뭘 쉬어?

그냥 좀 쉬고 싶어.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5분 전이었다. 아침부터 쉬고 싶다는 게 무슨 소리인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은곤아, 한동안만 좀 쉬고 싶어.

아침에는 일어나서 일을 해야지, 왜 쉰다고 그래.

그러게. 근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도와줘?

그냥 은곤이도 네 할 일 하면서, 좀 쉬어.

뭘 쉬어?

응. 우리 좀만 쉬자.

그걸 뭘 쉰다고 표현하니. 그것도 아침부터.

내가 감당이 안 돼. 뭐가 부서졌나 봐. 내가 다시 정리가 가능해지면 그때 연락할게.

…….

은곤아.

…….

이해해줄 거지? 그런 줄 알고 끊는다.

그리고 정말 전화가 끊겼다. 뭘 이해해달라는 거지. 마침 온몸에 고무 부항을 뜬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마어마한 수증기와 함께. 훈김이 사라지자 부항이 하나둘씩 몸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석조 씨에게서는 정말 2주째 연락이 없다. 내가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차단한 건지 수신 정지를 해놓은 건지 ‘고객님은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라는 말만 수없이 들었다.



깜빡 졸았는지 안전벨트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려니, 아빠가 휴게소에 다 왔다며 차를 세웠다.

화장실 다녀와. 10분 뒤 출발한다.

아빠가 먼저 나갔다. 유리창 가득 내리쬐는 햇볕에 얼굴이 홧홧해질 정도로 뜨거웠다. 꿈에서는 우르술라 같았던 여자와 석조 씨가 나란히 앉아 나를 줄곧 경멸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울었다. 쉬면 쉬는 거지, 왜 나를 빼고 쉬어야 하는 건데. 휴식을 취하는데 어째서 애인의 품이 아니고, 애인이 방해 요인이 되는 건데. 나는 엉엉 울었다. 속이 상했다. 이게 다 석조 씨의 엑스와이프 SNS 계정을 보여준 내 탓이다. 허율, 이라는 여자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서 그녀의 일상을 낱낱이 훑어보고, 그녀가 운영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공식 SNS 계정에도 들어가 매일의 메뉴를 체크하고, 그녀가 서울에서 4일, 제주에서 3일을 산다는 정보를 석조 씨에게 알려준 것이 문제였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석조 씨는 그냥 다 놓아버리고 쉬고 싶은 걸까. 허율이 너무 잘살고 있어서. 이혼하고 10년이 지나도록 무른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 보이는 허율이 너무 미워서. 그래서 뭔가가 부서진 기분이 들어버린 걸까. 10년이나 지났는데. 그 10년 동안 나와는 4년을 함께 했는데도. 내 칫솔은 허율이 꽂았던 칫솔꽂이에 꽂혀 있고, 내 키는 163센티미터가 아니라 168센티미터인데도, 그래도 쉬어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석조 씨라는 것이 나는 너무 분해서 엉엉 울었다.

너 우냐?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온 아빠가 울고 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왜 우냐?

몰라. 그냥 우는 거야.

털보 생각나서 우냐?

아니거든.

아빠는 주유소에서 받은 휴지를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휴지로 닦아내는데도 청승맞게 계속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지랄하고 있다, 정말. 또 남자 새끼한테 채였구먼.

아빠는 화장실이나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나는 콧물이 찔끔찔끔 흐르는 걸 가까스로 막고서는 걷기 시작했다. 밖을 나와 보니 확실히 서울보다는 좀 더 추운 것 같았다.

다 쳐 울고 와!

아빠가 뒤에서 소리쳤다. 쪽팔렸다.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건 엄마와 아빠의 이혼 때문이었다. 스물이 된 동생이 꽤 좋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엄마는 가차 없이 아빠를 버렸다. 아빠는 일평생 무능했고 책임감이 없었다. 엄마는 서울에 하나 갖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나와 동생에게 보증금 정도의 금액을 주고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연립주택을 매매했다. 아빠에게는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아빠는 아직도 엄마를 빌어먹을 독한 년이라고 부른다. 그 추운 겨울에 고시원에라도 갈 돈 몇 푼도 주지 않고 맨몸으로 내쫓아버린 게 네 엄마야. 25년을 같이 살았는데 지나가는 길고양이한테 베풀 아량은 있고, 나는 무슨 바퀴벌레 새끼 취급하고.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 신세가 된 아빠는 일단은 내 원룸에 얹혀 살았다. 보증금 500에 월세 50. 가까스로 구한 분리형 원룸에서, 아빠는 거실 같지도 않은 거실에서 자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쪽에서 잤다. 밤에는 아빠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고, 부엌도 아니고 거실도 아닌 애매한 공간에서 얇은 이불보를 덮고 자는 아빠를 보는 건 더 몹쓸 일이었다. 그러길래. 정말 그러길래 좀, 이라는 말만 나왔다. 동생이 반찬을 갖다 주러 올 때마다 너저분한 아빠의 짐들을 보고는 야, 너도 착한 척 좀 그만해, 라고 말하기도 해서 나는 내가 아빠를 거두는 게 착한 척하는 건가, 아니, 아빠는 아빤데 그러면 아빠를 누구한테 맡기나 싶고, 동생이나 엄마나 야박하게 구는 게 악의적으로 그러는 건지, 본때를 보여주다가 아빠가 정신을 차리면 그때야 다시 받아줄 요량으로 더 나쁘게 대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같이 산 시간이 버젓이 나와 동생으로 증명된 셈인데.

아빠는 보증금 400만 원을 모아 내 집과 15분 거리에 있는 월세방을 구했다. 반지하라서 여름이 되면 곰팡이도 많이 슬고, 오래된 집이라 외풍도 심하고, 높은 언덕길이라 밤이면 인적이 드물어 무섭긴 했지만, 아빠는 그 정도면 아방궁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엄마 차를 아빠가 모는 건지. 아빠의 실손 보험비료가 매달 빠져나가는 계좌는 왜 엄마의 통장인지. 엄마랑 아빠는 이혼 도장을 찍은 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마주친 적이 없다. 동생의 대학교 졸업식에는 아빠가 참석하질 않았고, 친가 쪽 행사에는 엄마가 참석하지 않았다. 이제 이혼은 너무 쉬운 거라고들 해서, 아무나 다 하는 거라서, 우리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살기로 했다.

아빠라는 짐, 혹은 혹을 달고 살기로 작정한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으므로, 나는 주기적으로 아빠를 만나 어떻게 살고 있나 감시 관찰을 해야 했다. 일정한 시간에 만나서 점심을 먹거나 아빠의 집에 반찬을 갖다 주러 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나 감시 관찰을 마치면 늘 엄마에게 상부 보고를 해야 했다. 도대체 헤어졌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고, 정 좀 떼라고, 그럴 거면 같이 살지 뭐하러 이렇게 떨어져 지내느냐고, 동생과 내가 말할 때마다 엄마는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런다, 하고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더 알게 되면 싫어지잖아. 싫어지면 그건 또 슬프잖니.

엄마는 아빠가 남의 일처럼 되는 게 속이 편하다고 했다. 아빠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남의 일처럼 건너 듣는 게 좋다고. 그런 건 뭘까. 가족이 남처럼 되는 일. 나도 엄마나 아빠를 그렇게 남처럼 생각할 수 있는 걸까. 그냥 저들은 0촌이라 그런 거겠지. 사랑했다가 싫어지면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서. 그런 관계로 시작해서 가정을 이루었다가 다시 남이 되어버리기로 한 것.

쉬울 수 있을까. 남이 되는 일. 남이었다가, 남이 아니었다가, 다시 남이 되는 일. 무엇보다, 남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일. 그것처럼 어려운 게 있나. 단념처럼 어려운 것이. 땅따먹기처럼 선을 긋는다고 한순간에 여기는 내 땅, 거기는 네 땅. 이제부터 이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그 선 하나가 견고한 성벽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 지난한 납득의 과정을 감히 쉽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눈에는 얼마든지 쉽게 허물어질 것 같은 성벽, 지우개로 지우면 금세 흐려지고 말 희미한 선처럼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석조 씨의 집이 이해가 된다. 신혼집으로 산 아파트에 짝을 맞춘 가구와 소품들, 수저와 젓가락 같은, 이름표만 안 붙었지 부부의 것임이 명백한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석조 씨는 허율과 결혼한 지 4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석조 씨는 몇 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중 한 명은 진짜 좋아했고, 나머지는 그냥 외로워서 만났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를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4년을 함께 보냈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해부터. 내가 분리형 원룸에 아빠와 함께 기거하던 중에. 나는 탈출하듯 석조 씨의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석조 씨가 버리지 못한 그 무수한 짝 있는 물건들 틈에서 이틀이나 사흘씩 보냈다.

한번은 대대적으로 서재를 청소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것 대부분은 석조 씨의 것이 아니라, 엑스와이프의 손때가 묻은 DVD, CD, 그리고 결혼 앨범과 서약서 등이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서약서 같은 걸 밥 먹듯 쓴다는 것쯤은 나도 부모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습니다, 금연하지 않을 시 안방에 들어가서 자지 않겠습니다 등의 못 지킬 약속들을 적어두고 사인이나 지장을 박고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는 용도의 문서. 석조 씨와 허율의 사이에서도 그런 서약들이 종종 있었다. 석조 씨는 오랜만에 들춰 본 서약서를 내게 보여주면서 얘가 이렇게 독했어, 라고 말했다. 석조 씨는 엑스와이프에 대해서라면 일관되게 부정적인 태도였다. 원래는 그런 앤 줄 몰랐지. 순했어, 정말. 처음에는 나와의 관계를 잘 빚어나가기 위해 하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혼이라는 전사를 겪었지만, 현재 자신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석조 씨는 첫 데이트서부터 엑스와이프와의 이혼이 자신의 인생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고, 그녀가 얼마나 나쁜 행동들로 자신을 배신했는지를 소상히 털어놓았다. 석조 씨는 광화문의 카페에서 케냐 AA를 두 잔이나 마시면서, 연남동의 태국음식점에서 푸팟뽕커리를 앞에 두고서, 엑스와이프의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왜 혼인신고를 끝까지 하지 않았는지, 어째서 갑자기 자신에게 차가워졌는지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불쌍했네요. 나는 석조 씨에게 그런 식으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진 사람에게 그런 박한 소리를 하는 석조 씨가 불쌍해 보여서 한 말이었는데, 석조 씨는 아마도 그걸 그 뜻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세 번째 데이트를 하고 나서 잤다. 석조 씨의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평수의 아파트였지만 뭔가가 부족하고 엉성한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이케아에서 조립식으로 산 철제 침대 같은 것. 원래는 원목으로 된 침대 틀이 있었는데 엑스와이프가 나갈 때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책상도 소파도 텔레비전을 올려두는 서랍장마저도 죄다 이케아에서 산 조립형 가구였다. 그마저도 별로 없어 마루가 훤했다. 여자가 골랐을 법한 분홍색의 샤워 커튼도 때가 누렇게 낀 채로 걸려 있었다. 나는 석조 씨의 철제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 얇은 매트리스에서 어떻게 섹스를 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을 잤다. 확실히 침대가 많이 흔들렸다.

게을러서, 그냥 이렇게 살아.

첫 섹스를 끝내고 석조 씨가 말했다. 누가 갑작스럽게 뛰쳐나가버린 것 같은 집에서 6년씩이나 살고 있는데, 그게 고작 게을러서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만 애도 기간이 기네요, 라고만 답했을 뿐.



그들이 헤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석조 씨의 교수 임용이 불발된 것이었다.

석조 씨의 모교 대학 선배가 학과장으로 있던 학교였는데, 교수 임용 확정을 앞두고 석조 씨는 룸살롱으로 불려갔다고 했다. 룸에 들어가자 학과장이 중앙에 앉아 있고, 과 교수들이 좌우로 포진했다. 그들 사이마다 당연하게도 여자애들이 앉아 있었고. 겨우 슬립만 걸친 어린 여자애들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쥐고 있던 교수들은 석조 씨에게 위스키를 권하며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 사람인데, 라고 능글대면서. 석조 씨는 불쾌했지만 참았다. 한참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석조 씨는 학교에서 수업 받는 학생들이 저 여자애들 또래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학과장의 예년 미래 계획과 포부를 들어주었다. 학과장은 석조 씨에게 7천만 원을 상납하라는 말을 아주 또박또박 전했다. 술에 취해 말꼬리가 휘어가는 와중에도 7천만 원이라는 액수는 매우 또렷하고 정확하게 발음했다고. 석조 씨의 인상이 즉각 빼뚤어지자 옆에 있던 교수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윤 교수, 유학 생활 해봤으면 알 거 아냐. 1년 치 집세라고 생각해. 디파짓, 유 노? 3년 차 되면 다시 자기 꺼야. 잠깐 묵혀둔다고 여기면 돼. 7천이면 싸게 부른 거야. H대는 더 심해. 자네 대학원 동기가 거기 임용됐다며? 못해도 1억은 줬을걸.

학과장은 석조 씨의 안색에 기분이 상했는지 술맛 다 떨어지네, 하면서 웨이터를 불렀다. 얘 가슴이 너무 커, 딴 애로 바꿔줘. 여자애는 하자 있는 물건처럼 끌려 나갔다. 석조 씨는 이 모든 게 좆같다고 생각했다. 이럴 거면 저는 교수 안 하겠습니다, 하고 일어섰다. 교수들이 우왕좌왕 대면서 윤 교수 이러면 곤란해, 하며 붙잡았지만, 학과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석조 씨는 학교 선배였던 학과장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살자고 날 불러, 씨발?

말을 마치자마자 석조 씨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석조 씨보다 조금 일찍 임용된 막내 교수가 뒤따라 나와서는 나가려는 석조 씨를 붙잡고 전통적으로 여기 술값은 그쪽이 내셔야 되는 건데, 하고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석조 씨는 187만 원 어치 술값을 내고 집으로 갔다. 소식을 들은 엑스와이프는 옳은 선택을 했네, 라고 말하고는 잠을 잤다고 했다.

옳은 선택을 하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석조 씨는 이혼 소송에 시달렸다. 석조 씨의 부모님이 주신 아파트를 처분해 위자료 명목으로 분배를 해달라는 것이 상대측의 요구였다. 석조 씨는 지난한 시간을 거쳐 가까스로 소송에서 이겼고, 아파트를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없는 사람. 살지 않는 사람. 유령 같은 사람. 교수 임용이 되겠거니 싶어 회사도 관두고 타 대학 강의도 거절했는데, 남은 건 집뿐이었다. 33평형 아파트. 중산층 신혼부부가 적당히 살 만한 공간. 아이를 낳게 되면 좀 더 넓은 평수로 이사는 가겠지만 그래도 전세는 아니고, 부모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자가인 아파트. 그곳에 석조 씨는 혼자 남게 되었다.

이 잔인한 이혼사를 세 번째 데이트하는 날까지 들었다. 석조 씨와 내가 커피를 마시고, 양갈비에 정종을 마시고, 아쌈티와 밀크티를 마시고, 파르메산 치즈가 잔뜩 뿌려진 라자냐에 값이 좀 나가는 이탈리아산 바르베라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동안 길고 지겨운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나는 그가 혹시 나를 성인으로 착각하는 건가, 신부님 앞에서도 이렇게 고해성사는 안 하겠는데, 싶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라고 묻는 석조 씨에게 네, 정말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사셨네요,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다만 옳은 선택을 하셨네요, 라고 했을 뿐.

석조 씨와 나는 열일곱 살 차이가 난다.

나로서는 아무리 가늠을 해보려 해도 알 수 없는 아주 멀고 아득한 이야기였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했던, 그 멀고 아득한 과거처럼.





횡성 휴게소 화장실에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천재 화가 이중섭, 소의 고장 횡성으로 오다.’라는 문구가 화장실 중앙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횡성과 이중섭의 공통분모는 한우였다. 화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누가 죽었나 싶게 꺼억꺼억 울어대던 나는 별안간 이중섭의 사진을 보고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대체 무슨 의도일까. 지자체 사업 중에 마음에 드는 건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없지만, 이건 정말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중섭과 횡성을 갖다 붙일 수 있지.

횡성에서부터 평창까지는 논스톱이었다. 아빠는 별말 없이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나는 더는 훌쩍이지 않았다. 그저 이중섭의 그림만 눈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는 내가 털보 아저씨의 무덤에 가는 이유도 횡성과 이중섭의 공통분모처럼 기막히고 어이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털보 아저씨 무덤에 가려고 하는 거지?

평창에 다다르자 올림픽 관련 엠블럼이 그려진 깃발들이 가로등마다 꽂혀 있었다.

근데 아무것도 없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개천이나 논두렁밖에 없는 이곳에 경기장이 있을 리가 없어 보였다. 차로 지나다 보면 이따금 엄청난 크기의 조소 작품이 눈에 띄었는데, 이를테면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막국수를 형상화한 조각 같은 거. 젓가락에 딸린 면발이 거의 2미터는 돼 보였다. 가평처럼 주변에 강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딱히 레포츠를 즐길 수도 없는 이곳에 왜인지 펜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털보도 여기에다 펜션 지었다가 망했잖아.

아빠가 말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펜션 사업을 하겠다고 평창에 들어왔다가 펜션을 많이 짓는 바람에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는 파산 신청을 했다고. 끌어다 쓴 돈이 너무 많아서 갚을 능력도 없었다고 했다. 딱 그때쯤에 남두 엄마와 이혼을 했는데, 그 이후로 털보 아저씨는 엄마에게 매일 같이 전화를 했다. 그것도 가장 바쁜 오전 8시에 술에 만땅 취한 목소리로 은곤엄마, 하고 불렀다. 엄마는 처음엔 불쌍해서 말 상대라도 해주고 싶어 전화를 받았다. 파산도 이혼도 한 큐에 해버렸으니 마음이 성할 리가 없잖겠느냐면서.

털보 아저씨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한 걸 알고는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평창에 가서 작은 펜션 하나 지어서 텃밭도 가꾸고 그렇게 여생을 보내자고. 남두도 제대했으니 저 혼자 알아서 잘 살 거라고. 은곤엄마, 우리 평창에 내려가서 삽시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같이 오순도순 얼마나 좋아. 엄마는 털보 아저씨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우습게 넘겼지만, 도가 지나치게 생떼를 쓴다는 느낌을 받은 후로는 이 남자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디 나한테, 아니 지 불알친구 와이프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호되게 면박을 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한동안 엄마 집에 내려와 있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밤마다 털보가 올까 봐 무서워서 잠에 못 들겠다고. 털보 아저씨가 엄마 집이 어딘 줄 알고 찾아와. 아빠도 모르는데. 그래, 맞지. 그놈이 올 수가 없지. 정말 속상해. 남두 엄마한테 죄스럽지도 않나? 하기사 그쪽도 남두 엄마가 내쫓은 거니까. 그 순한 여자가 이혼까지 한 걸 보면 털보가 진짜 문제야.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그랬겠어.



나는 순한 사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털보 아저씨의 아내였던 남두 엄마.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순한 얼굴을 지닌 사람. 상냥하고 조곤조곤한 말씨로 등에 업힌 남두를 토닥이며 재우던 그 얼굴. 남편과 그의 친구들이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남편들의 아내들이 남편 욕을 하며 친해지는 동안 남두 엄마는 가만히 그들을 보면서 때때로 웃기만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아빠의 고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많은 아줌마와 아저씨들 사이에서 남두 엄마는 단연 순한 인상이었다. 은곤이가 우리 남두를 잘 챙겨줘서 아줌마가 참 고마워. 우리 남두도 은곤이처럼 착하게 컸으면 좋겠다. 남두 엄마는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모두가 남두 엄마에 관해서라면 그 양반이 참 순하지, 라고 하나 같이 입을 뗐다. 그 순한 남두 엄마가 저버린 털보 아저씨라니. 순하다는 건 뭘까. 아빠는 왜 엄마를 빌어먹을 독한 년, 이라고 부르는 걸까. 착하고 선한 거랑 순한 거는 다른 거잖아. 어쩌면 사람에게 순하다고 붙이는 건 칭찬도 아니고 오히려 나쁜 것 같은데. 알코올 농도를 낮춘 소주를 보고 순해졌네, 할 수는 있지만, 사람에게 사람이 저 사람은 참 순해, 라고 말하는 게 좋은 건가? 순하다는 게 뭔데?

털보 아저씨는 엄마에게 차이고 반년쯤 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년간 뇌사 상태로 지냈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가, 경기도 근교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 6개월을 버티다가 생을 마감했다. 보호자를 남두로 지정해두었지만, 정작 병원을 더 많이 찾은 건 남두 엄마였다.

아빠는 털보 아저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엄마와 이혼을 한 뒤, 아빠는 나 말고는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없는 사람. 유령 같은 사람. 살지 않는 사람처럼. 내가 이제 좀 나가주시죠, 하고 운을 떼고 나서야 아빠는 일을 시작했다. 가장 쉬운 건 대리운전이었다. 다리도 성치 않은데 새벽바람 쐬며 하는 일 말고 제대로 된 것 좀 하면 안 돼? 라고 했더니, 그제야 낮일을 찾았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 석원이 아저씨가 꾸리는 벌목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경기도 외곽의 산야를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나무를 벴다. 가끔은 제주도 출장도 다녀왔다.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숲 냄새가 기분을 좋게 한다면서.

벌목공들 중에는 아빠처럼 혼자가 된 아저씨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내한테 소박맞은 남자들. 그중에 절반은 경마나 도박에 미쳐 있고, 나머지들은 술꾼이라고 했다. 아빠는 술도 안 먹고 게임도 좋아하질 않아서 그 치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들과 자신이 같은 처지라는 느낌이 드는 게 싫다며 벌목 일도 때려치웠다. 그래도 2년을 버텼으니 아빠의 직업 인생에서는 나름 선방한 셈이었다. 그때 만든 보증금과 여분의 돈, 그리고 틈틈이 대리운전을 해서 생활비를 버는 아빠는 무릎도 이도 성치 않고, 앞으로도 점점 삐걱대며 몸의 문제가 삶의 증거처럼 하나둘 드러날 텐데. 그래서 엄마는 아빠의 보험비를 다달이 내주고 있는 것일까. 남두 엄마가 털보 아저씨의 병원을 매일 같이 드나든 것처럼.



여우별 펜션. 그 뒷길에 털보 아저씨가 묻혀 있는 선산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여우별 펜션의 팻말을 한참 찾아 비포장도로를 돌아다녔다. 마을 깊숙한 곳에 펜션이 있었다. 언덕길이 전부 꽝꽝 얼었으므로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확실히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런 데서 무슨 올림픽을 한다고. 아빠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석조 씨 생각이 나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나는 마을 입구에서 산 참이슬 빨간 병과 새우깡, 그리고 털보 아저씨가 즐겨 피웠다던 디스플러스 담배가 담긴 비닐봉지를 괜스레 흔들며 걸었다. 펜션의 뒷길로 올라가니 정말 층층이 무덤이 보이는 선산이 있었다.

선산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고 나는 미끄러운 언덕을 어떻게 올라야 할지 겁을 먹고 있었다. 아빠가 손을 건네며 아빠 손잡아라, 라고 했고 나는 아빠의 손을 붙잡고 언덕을 올랐다. 아빠가 이끄는 손은 단단했다. 수없이 나를 잡아 끌어주었던 손. 관악산과 설악산과 북한산과 청계산과 철봉과 그네와 미끄럼틀과 정글짐과 수락산 계곡과 스키장과 스케이트장과 이층 침대와 어렸을 적 내가 걸었던 그 무수한 계단들 앞에서, 나를 이끌어주었던 손처럼 아빠가 이끄는 힘은 그때와 변함없이 단단하고 듬직했다.

엄마의 말대로 선산의 가장 밑단에 홀로 있는 무덤이 보였다. 나는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무덤 앞에는 백합 모양의 조화가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했다. 나는 검정 비닐봉지에서 담배와 소주를 꺼내 아빠에게 건넸다. 아빠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 뒤 무덤 앞에 두었다. 그러고는 빨간색 뚜껑을 열어 무덤의 주변을 빙빙 돌며 소주를 부었다. 그동안 못 찾아와서 미안하다. 편하냐, 새끼야. 아빠가 말했다. 나는 새우깡 봉지를 뜯어 무덤 앞에 두었다. 아빠 말로는 고등학교 시절 둘이 가장 많이 먹었던 소주 안주라고 했다.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남두 엄마가 찾아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래. 나는 아빠에게 털보 아저씨의 무덤이 맞다고 말하고 나서 그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무덤이 향하는 쪽으로는 높은 산자락이 보였다. 밑으로는 선산의 사당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그냥 무덤가에 얼마간 앉아 있었다. 옆으로 고라니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뭐 좀 빌었어?

아빠가 담배를 한 모금 길게 태우며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어. 하늘에서 아빠 좀 잘 살게 감시해달라고 빌었어.

웃기고 있네. 그래, 와서 뭔가가 풀렸어?

풀릴 게 뭐 있어.

맞다. 이런 데 온다고 만사가 풀리면 맨날 와서 제사 지내겠지. 춥다. 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언덕길을 내려왔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무서워서 나는 아빠의 두 손을 꽉 잡고 천천히 발을 뗐다.

막국수라도 먹고 가자는 아빠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서울 가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는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니 그새 해가 졌다. 아침부터 새우깡이랑 커피로 대충 떼우느라 아빠나 나나 약간 탈진 상태였다. 나는 아빠가 다니던 고등학교 부근으로 가달라고 했다. 어릴 적 아빠와 숱하게 왔던 서촌 동네. 아빠는 여기가 이렇게 바뀌었냐, 하면서 놀란 눈으로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학교와 인접해 있는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브레이크 타임이 이제 막 끝났는지 저녁 손님으로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고 긴 원목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었고, 모서리마다 2인용 테이블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메인테이블에 앉았다. 아빠는 뭘 이런 델 데리고 왔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빠는 어색하게 파카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러자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이 아빠와 나의 외투를 가져가 옷걸이에 걸어두겠다고 말하며 친절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따뜻한 얼그레이티와 석류 소스를 얹은 석화가 웰컴 푸드로 나왔다. 직원은 메뉴판을 건네면서 천천히 드시면서 보세요, 라고 말했다. 이미 SNS로 오늘의 메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오늘의 메뉴 코스를 시켰다. 크리스마스 메뉴에는 머스타드 크림의 치킨과 파고티니 파스타, 바칼라 토르티노라는 생경한 음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긴 왜 왔어?

털보 아저씨를 기리는 여행의 마지막이지. 두 분이 다니셨던 학교 근처 순방하기.

근데 왜 하필 여긴데?

연말이라 맛있는 것 좀 먹여줄려고 그런다, 왜. 그냥 입 닫고 드셔.

쉬라즈 와인 한 병을 주문하려다가 대리기사가 남한테 대리운전 시킬 일 있냐는 아빠의 말에 그냥 아빠가 진저에일 두 잔을 시켰다. 이윽고 식전 빵과 함께 차례로 음식이 나왔다. 넓은 그릇에 오밀조밀하고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특히나 그릇이 예뻤다. 이런 그릇은 어디서 났을까. 외국에서 사 온 거겠지. 이렇게 예쁜 그릇을 고를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릇은 앤티크한 느낌을 풍겼다. 그러면서도 정갈하고 깔끔해 보였다. 음식은 맛있었다. 아빠는 한 입 거리로 보이는 작은 바칼라 토르티노를 조금씩 베어 물었다.

멀리서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 석조 씨에게 팔짱을 두르며 찍힌 결혼사진과 비교하면 흰머리가 조금 생긴 것 빼고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인상이었다. 앞치마에 밀가루가 군데군데 묻어 있는 채로 여자는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녀가 내게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맛이 어떠세요? 저희 크리스마스 메뉴 오늘 처음 선보인 건데.

여자가 물었다.

난 이런 거 잘 모르는데 우리 딸애가 오자고 해서. 사장님이세요?

아빠가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네, 직접 요리도 하고요. 좋으시겠어요. 따님이랑 같이 이렇게 다정하게.

여자는 오너 셰프의 당당함이 엿보이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멋있어 보였다.

좋은 시간 되세요, 하며 여자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빠가 등허리를 낮추며 내게 소곤댔다.

순하게 생겼다. 근데 똑부러질 것 같고. 옛날 네 엄마 닮았어.

아빠는 여자만 보면 다 엄마 닮았대.

살아봐라. 맑고 순한 사람 어디 흔한가. 네 엄마가 그랬다니까.

지금은 왜 근데 빌어먹을 독한 년이야?

내가 웃기게 살았으니까.

알긴 아네. 다행이다. 몰랐으면 더 화날 뻔 했는데.

음식 앞에 두고 말 많았다. 얼른 먹어.

나는 파고니티 파스타 한 점을 접시에 담았다. 생긴 게 꼭 포춘쿠키 같았다. 안에 소가 들어 있는 이탤리언식 만두. 차마 파스타를 반으로 가를 수가 없었다. 나쁜 예언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고 싶지 않은 불행한 미래가 그 속에 숨어 어서 나를 쪼개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대로 내두고 싶었다. 열지 않으면 영영 모를 포춘쿠키 속처럼. 접시 위 파스타는 천천히 식어갔다.

뭘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석조 씨의 엑스와이프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만 이별이 납득될 거라 생각한 걸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고 해도, 나는 아내가 아니었잖아. 아내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말 졌다. 더 이상 나는 석조 씨를 만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또 연락을 하면 나는 숨어버릴 거다. 하지만 결국 그의 연락을 받을 것이고 늦은 밤에 그가 사는 집을 향해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정차할 때마다 세다가는 역 출구에 미리 나와 있는 석조 씨를 보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겠지. 깍지를 끼고 손을 잡겠지. 신혼집이었던 그 집에 들어가 겉옷부터 차근차근 벗기고 벗으면서 우리는 침대로 향하겠지. 섹스가 끝나고 나서는 많이 울겠지. 왜 우냐고 물어봐도 그냥, 하고 엉엉 울 것 같다. 그렇게 좋았어?라고 농담을 해도 그냥 울고 말 거다. 하지만 다시는 석조 씨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평창엘 다녀왔고, 석조 씨의 엑스와이프가 하는 레스토랑에 와서 그녀가 오늘 가장 맛있게 할 수 있는 요리를 먹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걸 아빠와 함께 했으니까. 나는 단호해졌다. 단호한 마음이 들었고, 단호하기로 했다.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했고 대신해서 인사를 전했다. 그것이 석조 씨와 이별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인 것처럼.

밥을 다 먹고 나와서는 아빠가 다녔던 고등학교까지 걸었다. 운동장을 돌며 고등학생 시절 아빠와 털보 아저씨의 기행들을 들었다. 별거 아닌 내용이었다. 땡땡이를 치고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돈을 안 내고 토꼈다든가,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해서 목사님이셨던 털보 아저씨의 아버지가 당구 큐가 부러지도록 아빠와 털보 아저씨를 두들겨 팼다든가 하는.

나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석조 씨를 생각했다.

눈이 온다.

진짜 눈이 오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냥 살아라. 만났다 헤어지는 거 별거 없다.

정말 별것이 없을까. 만났다가 헤어지는 거.

아빠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혼자 좀 더 걷고 싶었다. 경복궁을 향해 걷다 보니, 맞은편 이정표에는 석조 씨의 동네가 적혀 있었다. 직진은 나의 집, 오른쪽 방향은 석조 씨의 집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같이 산다는 건 뭘까.

영락없이 쌓일 것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필자 소개


차현지

소설가. 산다고 살아지니.



#차현지 #무덤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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