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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미래

2019년 6월 20일 업데이트됨

- 영화 [컨택트], [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요즘 나는 부러 사건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사실 꽤 오래된 목표이기도 한데, 언젠가부터 실제 사는 일에 힘을 써버리면 쓰는 일이 버거워진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조금은 건조하고 밋밋한 일상, 편편한 리듬 속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이 소설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실제로도 그렇다. 소설 속 사건을 일상에게 빼앗기지 말 것. 비록 무미건조한 날들의 연속은 가끔 하품이 나오게 시시껄렁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요해지길 간곡히 소망한다. 일상에서만큼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감정이 녹스는 게 아니라, 도리어 반들반들 광이 나는 거지. 몇 해 전 헤어진 나의 늙은 애인은 말했다. ‘녹’과 ‘광’의 차이가 뭐지. 결국 무뎌진다는 소리 아냐? 나는 반문했고, 애인은 웃으며 ‘여유의 유무’라 답했다.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하도 생에 치이는 바람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덤덤해지거나(‘녹’), 감정쯤은 쉽게 핸들링이 가능한 관록에 가까운 상태(‘광’)로 나뉜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엔 그저 말장난 같았지만, 어찌 보면 그건 꽤나 진실에 가까운 말장난이었다. 그렇다면 여유는 어떻게 가질 수 있지. 경험치가 많아지면 생기려나. 여유란 온갖 사건으로 파생된 무수한 감정의 진폭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일종의 전리품인가.

  감정이 나를 완전하게 앗아가는 시기마다 나는 언제쯤 녹이 슬까, 아니 언제 광이 나지? 하며 불안해하곤 했다. 적잖이 고저가 잦은 감정의 파동 속에 있을 때마다 나는 고요해지기를 바랐다. 거대한 사건이 딱히 없는 삶. 남들이 봤을 때엔 다소 지루해보일지 모르는 일상들이 하나 둘 꿰어진 수더분하고 나른한 패턴의 패치워크 같은 삶. 어쩌면 노인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나는 종종 노인이 된 나의 모습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한다. 그건 꼭 해변에 누워있는 느낌이다. 스페인 남부 지역의 바닷가. 때는 습기가 가신 9월이 좋겠다. 몸을 뉘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담요와 책 한 권을 들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래사장에 발을 푹푹 빠트려가며 산책하는 기분. 내가 상상하는 나의 노년은 이렇게 좋으면서 또 이렇게 철이 없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생존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찾아올지 모른다. 이를테면 엄마의 치매 선고나 지인의 부음, 혹은 병치레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나 수개월씩 밀린 이자 같은. 현재로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을 일들이 일상을 파고들어 나를 좀먹을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내가 사건이라 명명하지 않은 것들, 앞으로도 딱히 사건이라 여기지 않을 일들이 밀려들겠지. 사건은 뭘까. 나는 어떤 일들을 엑시덴탈(!)한 사건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을까, 혹은 써왔던 걸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봤다. <다가오는 것들>(2016)과 <컨택트>(2017)인데, 두 편 모두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자인 <다가오는 것들>(2016)에는 일상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60대의 철학교사 나탈리가 나온다. 애인과 함께 살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25년간 동지였던 남편, 가장 아끼던 30대 제자와의 철학적 신념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 더 이상 출판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절판된 자신의 책 등, 탄탄하게 잘 쌓아놓았던 일상의 벽돌들이 가차없이 허물어진다. 예정도 없이. 당연히 사건은 예정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든다. 실제 삶이라는 건 그렇다. 사건이 생기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문맥을 살피듯 인과관계를 따져보게 된다. 그럼에도 감정의 후유증은 까슬까슬 일상을 방해한다.

  애정결핍으로 온종일 자신만을 찾던 80대 노모조차 죽게 되자, 나탈리는 이 모든 공습과도 같은 사건들로 인해 감정적으로 패배한다. 그녀는 요양원에 노모를 맡기고 나서 울고, 버스 차창 너머 남편과 그의 애인이 지나가는 걸 보다 울고, 노모가 키우던 고양이를 안고 울고, 남편과 마지막으로 간 휴양지의 침대 맡에서 운다. 60년을 넘게 산 그녀에게 다가온 것들은 전부 그녀를 울게 만드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드라마틱하게 굴지 않는다. 자살 시도를 하는 노모의 긴급한 전화가 와도 평정심을 잃지 않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남편의 말에도,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하고 시니컬하게 되묻는다. 60년이라는 견고한 경험치에도 속절없이 사건은 닥쳐오고, 감정은 또 다시 질퍽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그녀의 감정에서는 ‘광’이 나는 걸까. 어쩌면 ‘광’이라는 패는 다름 아닌 사건 ‘이후’를 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건 연륜, 혹은 삶을 대하는 숭고하리만치 순응적인 태도.

  <컨택트>(2017)에서는 삶이라는 장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모조리 훑게 된 언어학자 루이스가 등장한다.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시제가 아닌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확보한 외계 언어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미래, 죽기 직전까지 본인에게 일어날 모든 사건들을 미리 접하게 된다. 손끝에 닿아본 적 없는 딸의 머리칼, 투병으로 자신보다 먼저 생을 마치는 딸의 마지막 모습. 살아본 적 없는 삶이 이미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루이스는 피할 수도 있었던 사건들과, 그로 인해 발생할 고통과 상실의 감정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딸의 죽음이 예견된 미래이지만, 딸의 숨결과 함박웃음, 작고 여린 손가락과 매끄러운 머리칼을 실제로 만지고 느끼기로 선택한 것이다. 예정된 사건들을 천천히 감각해가는 삶. 루이스 역시 사건 ‘이후’의 삶을 순응이라는 방식으로 대처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최대한 고요해지는 걸 선택한 나는 괜찮은 걸까. 노인이 된 나의 미래는 어떨까. 상상처럼 든든할까. 수십 년간 침묵에 대한 에세이를 써왔던 존 케이지의 글에 약간 위로가 된다.


텅 빈 공간이나 텅 빈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언제나 무언가가 보이고 무언가가 들린다. 사실 아무리 침묵을 만들어내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소리는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음악의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존 케이지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사건은 늘 도래한다. 감정도 역시. 사건의 선행으로 기인한 감정, 혹은 어떤 지배적인 감정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 사건과 감정의 인과율은 서사의 능선을 만든다. 결국 이야기란 사건이 아닌, 사건 ‘이후’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나는 요즘 쓰는 일이 곧 사는 일이라고 여긴다. 다만 잘 쓰는 게 잘 사는 일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일상의 사건들이 잡음처럼 들려와 간간이 쓰는 일을 방해할지라도 나의 미래는 제법 든든하다. 사건 ‘이후’의 삶을 써내려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어쩌면 내게 쓰는 일이란 감정을 다독이는 또 다른 방법일지 모른다. ‘녹’도 슬고, ‘광’도 나는 감정의 후기後記.


필자 소개


차현지

소설가. 산다고 살아지니.



#차현지 #노인의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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